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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77화 (77/125)

77화

황제와 대공, 나 이렇게 셋이서 삼자대면을 한 후로 레이몬드가 내게 철저히 당부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절대로 자기 없이 황제를 만나러 가지 말라는 것.

내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나를 다시 납치하여 자기 곁에 두겠다고 난리가 난 것을 겨우 진정시켰다. 갈등 구도가 제대로 수면 위로 떠오른 이상, 혼자서 황제를 만나러 가는 게 사실상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 쉽지. 황제가 부르는데 어떻게 안 가?

그래서 협상한 것이 내 호위로 네버레스트의 단원 중 한 명을 더 붙인다는 조건이었다. 이름이 판이라는 자인데, 단장인 온과 마찬가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겠다고 했다. 코아랑 달리 그는 남성이기에 내가 방을 나서는 순간부터 곁에 머물기로 정해 두었다.

그리하여 레이몬드의 부하 둘을 호위로 모시고 황성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나를 부른 황제는 평소에 머무르는 테라스를 대신해 넓은 정원 한가운데에 테이블을 놓고 자리했다. 테라스보다 더 탁 트인 공간이라 내 입장에서도 이쪽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나를 왜 부른 걸까 싶을 만큼 황제는 한동안은 별다른 말이나 행동이 없었다. 처음 보았을 때 인사를 나누고서 차만 홀짝홀짝 마셔댔다.

날 옆에 두고서 또 멍하게 있네.

황제의 침묵이 불편했으나 협박을 하거나 다정하게 구는 것보다 나았기에 나 또한 조용히 있었다. 그런데 먼 곳을 바라보며 차를 홀짝이던 황제는 나를 돌아보더니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그대에게 호위를 붙여줄까 하는데 어떻소?”

“예?”

나는 앞뒤 맥락 없이 흘러들어온 물음에 잠시 얼떨떨하게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지금의 호위로도 충분해요.”

“흐음.”

그러나 대답이 마음에 차지 않는지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기사로는 한계가 있을 텐데. 그대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말이오. 이번에 마탑으로부터 마법사를 병력으로 지원받았는데 그중에 한 명을 호위로 붙여주겠소.”

마법사 호위라니.

그럴듯하게 포장했지만, 황제의 의도는 뻔했다. 대놓고 자기편을 붙여놓겠다는 뜻이지.

황제나 대공이나 다 나한테 호위를 못 붙여서 안달이래?

내 사생활은 대체 어디에….

나는 차마 거절하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눈물을 흘렸다.

“말이 나온 김에 바로 고르지.”

황제는 근처에 서 있던 시종을 부르더니 마법사들을 불러오라며 명을 내렸다. 굳이 이런 상황을 연출하는 걸로 보아, 새로 보강한 자신의 세력 기반을 알리기 위해 날 부른 게 틀림없어.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시종과 함께 마법사들이 나타났다. 로브를 입은 무리는 우리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오, 왔군.”

그들은 황제의 앞에 도달하자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여느 귀족들처럼 공손하기보다는 뻣뻣한 동작과 표정이 형식상 하는 인사 같아 보였다. 전해 듣기로 마탑은 제국과 견줄 수 있을 만큼 세력이 크다더니 정말인 듯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폐하.”

“그렇소. 지금쯤이면 회의를 마칠 시간일 것 같아 잠시 들르라고 하였소.”

황제가 왜 시간만 때우고 있나 했더니 이들의 시간에 맞추려고 그랬나 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가장 앞에 선 자를 내게 직접 소개했다.

“이 자가 마법사들 중에 최고 실력자요. 어려운 것도 자유자재로 다루는 천재마법사라고 하더군. 이번에 황성의 수석마법사로 임명하였소.”

황제가 자랑스럽게 말하자, 그자는 손으로 망토의 모자를 벗어 내리며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니얀 올리버츠입니다.”

턱을 추켜올린 천재 마법사의 얼굴에는 거만한 빛이 어렸다. 은발에 붉은 눈동자를 지닌 미남자는, 눈매와 턱선이 날카로워 샤프한 이미지를 자아냈다.

시선을 마주침과 동시에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전에는 옅은 빛에 언뜻 보았을 뿐이지만 분명히 같은 남자였다. 저잣거리에서 용하다는 바로 그 점쟁이…!

황성의 수석마법사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머릿속에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지만 서둘러 표정을 수습하고서 예의 있게 화답했다. 황제가 아는지 모르는지는 몰라도 우선은 숨기는 편이 옳다고 여겼다.

“이쪽은 내 약혼녀인 에일린이오. 코웻 공작 가의 영애지.”

“공녀님께서는 굉장히 아리따운 분이시로군요.”

“하하. 자네의 말이 맞다오.”

두 사람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내 칭찬을 해댔지만, 막상 혼란 속에 잠긴 내 귀에는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한참 대화를 나누다가 황제가 니얀에게 물었다.

“마법사들 중에 한 명을 에일린의 호위로 붙일까 하는데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호위요? 아아.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째서지?”

니얀이 고개를 젓자, 황제가 의문이 깃든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오만하고도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제가 공녀께 실드 마법을 걸어드리지요. 그러면 그 어떤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 구슬로 언제든지 공녀님의 위치와 행동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오호라. 그게 정말인가?”

니얀의 말이 떨어지자, 황제의 안색이 밝아지고 반대로 내 표정은 썩어들어갔다.

그런 게 가능하다고? 이런 미친!

내 속은 경악으로 물들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으니 어금니만 빠드득 깨물었다.

“그렇게 좋은 방법이 있다니! 과연 마탑이 인정한 마법 천재로구만.”

“과찬이십니다.”

황제가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 사이, 니얀은 나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속았다는 배신감을 떨칠 수 없던 나는 조용히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

저벅저벅.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테라스 쪽으로 빠르게 걸었다.

이제 넌 진짜로 큰일 났다, 에일린 코웻.

지금까지의 위기는 위기라고도 볼 수 없게 됐군. 황제의 사람한테 레이몬드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간파당한 것도 모자라, 빙의자라는 사실까지 노출되다니.

이번엔 반대편으로 터벅터벅 걸으며 애꿎은 상의를 쥐어뜯었다.

게다가 이건 어쩔 거야? 나는 몸 주위에 희미하게 둘린 빛무리를 살폈다. 꼭 벗겨지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갑갑했다.

황성의 수석마법사로 나타난 니얀 올리버츠께서 몸에 친히 둘러준 실드 마법이었다. 단 한 번의 중얼거림으로 위치추적과 동시에 CCTV 기능까지 가능하다니 이런 사기가 따로 없었다.

황성에서 돌아온 날 밤.

나는 레이몬드와 만나기로 한 약속도 깨어버리고서 방 안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대로 그를 만났다가는 이놈의 실드로 인해 일이 극단적으로 치달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레이몬드는 실드의 존재에 분노할 것이고, 황제한테는 대공의 아지트가 소상히 드러나겠지. 그렇게 된다면 전쟁의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휴우.”

나는 답답한 마음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감시로 인해 자유를 박탈당하다니 새장에 갇혀버린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점을 보러 가서도 딱히 한 말은 없었다. 난 그냥 당하는 입장이었고, 니얀 그놈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아챈 거지. 그래, 그게 문제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지?

나는 고심을 거듭하면서 계속해서 방안을 이쪽저쪽으로 왔다 갔다 했다.

“니얀. 니얀 올리버츠.”

“저를 부르셨나요?”

내가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 옆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대답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보니 그 니얀 올리버츠가 나를 보며 서 있었다.

!!!!

“어… 어… 어떻게….”

“제 이름이 들려서 와봤죠.”

너무 놀란 나머지 말을 더듬으며 마구 삿대질을 날렸다. 그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빙긋 웃을 따름이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나는 다급히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공작 저의 호위들은….”

“텔레포트를 쓰고 와서요. 제가 온 줄도 모를 거예요.”

“코아랑 판은….”

“두 사람은 잠시 쉬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니얀은 들어 올린 검지를 허공에서 흔들었다. 그러자 그 끝을 따라 빛이 반짝거리며 잔상처럼 따라다녔다.

이럴 수가! 레이몬드가 붙여준 두 실력자가 완전히 무용지물이라니.

충격에 휩싸인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래서 기사가 호위로는 한계가 있다고 한 건가. 마탑이 제국에 견줄 수 있다는 세간의 평가가 수정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이네.”

당황과 놀라움으로 젖어 있는 내게로 그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걱정 마요. 나만 한 실력자는 마탑에서도 손꼽히니까.”

그는 안심하라며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여러 번 끄덕거렸다.

“손꼽힌다는 건 여럿이라는 뜻?”

“음. 나 포함 둘 정도? 마탑주님이랑 나랑.”

니얀은 일부러 손가락까지 접어가면서 보여주었다.

“허.”

그러니까 지금 자기가 마탑주 만큼 강하다고 자랑하는 거지? 그 말본새가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자랑이 아니라 사실! 근데 진짜로 표정으로 다 보이네. 신기하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내 얼굴을 구석구석 살폈다.

사람 놀리는 거야 뭐야?

나는 팔로 얼굴을 가리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니얀이 자신의 허리춤에 양손을 얹더니 “으흥.” 소리를 내며 여유로운 웃음을 날렸다.

저기에 휘말려서는 안 돼.

서둘러 이성을 차린 나는 팔짱을 끼고서 그에게 쏘아붙였다.

“침입자 주제에 당당하네요?”

“공녀께서 제게 그런 나쁜 말씀을 하실 처지가 아닐 텐데요?”

“허.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제가 공녀님께 무엇 때문에 그러겠습니까.”

니얀은 놀라는 시늉을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결백을 주장하는 동작이건만, 과한 제스처가 오히려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진지한 낯빛으로 그에게 물었다.

“거리의 점쟁이인 줄 알았는데 황성의 수석마법사로 나타나다니 내가 속은 것 같은데. 당신은 대체 누구죠?”

“제가 바로 공녀께 큰 도움을 줄 귀인입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가슴 아래에 팔을 얹고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

그의 말에 나는 정곡을 찔린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결국 나는 저 사람의 손에서 놀아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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