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나는 응급처치를 마치고서 카일에게 물었다.
“폐하. 이 노인을 의사에게 데려가도록 허락해주세요.”
황제가 저지른 일에 내가 감히 훼방을 놓았으니 이쯤에서 물어볼 필요가 있었다. 경고는 이 정도로 충분하니, 제 권위를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라면 허락을 입에 담으리라 여겼다.
과연 황제는 비틀어진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허락하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누가 부축 좀 도와주시오. 대충 지혈을 했으니 의사에게로 데려가야 하오.”
황제와 함께 있던 귀족 여인의 요청에 사람들은 그제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행자가 등장했으니 용기를 내도 되겠다 싶어진 것일까. 두 명의 장정이 다가오더니 노인을 부축해 세우고는 마을 안쪽으로 이동했다.
“고맙습니다.”
노인은 등을 돌려 떠나면서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길 없는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어서 가거라.”
“물러나라.”
황제의 호위들이 나서서 몰려든 사람들을 흩어 보내버렸다.
그때까지 황제는 내 모습만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먼지를 털고 일어나 그를 보았다. 황제는 내 머리카락을 보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 가보니 머리끝이 피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아까 노인을 치료하다가 묻은 듯했다.
황제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그러자 흥미로움으로 채워져 번들거리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안에 깃든 욕망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들켰네. 나는 꼼짝없이 잡히고 말겠구나.
스스로를 덫에 넣은 행동이 조금은 후회스러웠지만 이미 늦어버린 후였다.
***
먼저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황제는 나와 레이몬드 사이를 확신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나를 자신의 것이라 명하며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협박했다. 거기다가 치유력마저 들킨 상황인 거지.
황제에게 내가 가진 치유력이란 얼마나 큰 효용을 가질까?
다르게 생각해 보면 그래도 나의 쓸모를 증명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나는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으로 황제 앞임에도 불구하고 치유력을 사용한 거지. 정의의 사도라 노인을 구한 게 아니라고.
……에라이!
눈앞에서 무고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내가 능력도 있는데! 이래 봬도 인격을 존중하는 사회의 시민 출신인데!
공작 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연분홍색 머리칼을 두 주먹으로 움켜쥐었다. 자책해봤자 머리카락만 빠질 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차피 황제는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고, 오늘은 협박의 향연을 펼치기로 작정한 날이었으니 하나 더 보탠 것뿐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결론적으로 짜두었던 나의 시나리오가 완전히 어그러졌음이 증명되고야 말았다.
위옹위옹! 내 안에서 경보가 울렸다. 진정으로 위험이 코앞에 당도한 느낌.
그래서 플랜B로 시나리오를 수정하기로 결심을 세웠다.
그날 밤, 대공의 아지트에 도착한 나는 평소보다 부쩍 조용했다. 내 조신한 모습에 그의 부하들이 낯설어하는 게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늘의 나는 절박해야 했고 실제로도 절박했으니까.
“에일린.”
방으로 들어온 레이몬드는 햇빛을 반사하는 바다면 같이 나를 반겼다. 다가와 옆자리에 앉더니 내 안색을 유심히 살폈다. 그 모습이 귀여워 힘없이 웃었더니 그가 내 허리를 끌어안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스킨십이 아주 거리낌이 없네?
“레이몬드. 진지하게 할 말이 있어요.”
내가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버둥대자 그가 놓치지 않으려는 듯 팔에 힘을 더 꽉 주었다.
“말해.”
“이러고 어떻게 말해요.”
“못할 것도 없지.”
밀어내려고 애를 썼지만 미동도 없자 그만 포기해버렸다. 나는 지척에 있는 그의 얼굴을 대신해 어깨 끝에 시선을 두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해 줄 수 있어요?”
“뭐든지.”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떼었다.
“전 황제의 약혼녀잖아요. 레이몬드는 어째서 호수에서 제게 그런 말을 한 거예요?”
‘나의 연인이 되어줘’라고 했던 고백 이야기였다. 그는 말뜻을 한 번에 알아들었는지 즉시 대답을 내어주었다.
“우리의 마음이 같은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니까.”
“그러면 다음은요? 황제는 저를 놓아주지 않을 거예요.”
“카일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에일린의 마음이지. 너와 나의 마음이 같다는 걸 안 이상, 절대 놓치지 않을 테니까.”
레이몬드의 눈빛이 의지로 반짝였다. 욕망으로 꽉 차오르던 황제의 것과는 종류가 다른 결연함이 묻어있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쐐기를 박을 필요가 있었다.
“레이몬드. 제 뜻을 존중한다면 같이 도망가요.”
“도망?”
“네.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 숨어서 살아요, 우리.”
고개를 끄덕인 나는 일부러 ‘우리’라는 단어에 부쩍 힘을 주었다. 함께 사랑의 도피 혹은 야반도주를 하자는 유혹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는 고민하느라 생각에 빠져드는 듯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대답을 내놓았다.
“에일린이 원한다면 그리 하지.”
예상보다 레이몬드는 내 의견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응? 부모님의 복수를 위해 칼을 갈고 있던 거 아니었어?
그의 빠른 긍정이 의아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내 뜻을 따라준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나는 환한 웃음으로 그에 대한 고마움을 대신 표현했다. 그리고 미소 안에는 의뭉스러운 속마음을 꼭꼭 감추었다.
그에게는 말하지 않은 진실이 있었다. 그걸 위해서 나는 거짓을 고했다.
우리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레이몬드만 보낼 생각이었으니까. 내가 황제의 시선을 잡아끄는 사이, 그를 수도에서 멀리 떠나게 만들 계획이었다.
나는 레이몬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이 소설 속으로 빙의했으니 그를 위해서 황제의 곁에 머무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
사냥터에 다녀온 이후, 황제는 다시금 나를 황성으로 불러대기 시작했다.
협박이 난무하던 그날과는 달리 그는 내게 다정하게 대했다. 내가 말 잘 듣는 고양이처럼 얌전하게 구니까 그 사실이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억지스러운 스킨십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피차 서로가 껄끄러운 걸 아는 터라 선을 넘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한달까. 꼭 계약 결혼을 한 부부 같이, 표면적으로 좋아 보이는 사이가 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듯했다.
“이걸 드시오. 에일린.”
“고맙습니다. 폐하.”
황제는 시녀가 테라스로 날라온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을 내게로 밀어주었다. 나는 평소 충실하던 본능을 내려놓고 얌전하게 포크 질을 했다. 하지만 완전히는 숨기지 못하고서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내었다. 디저트는 죄가 없으니까!
나는 바닥에 남은 크림마저 포크로 몽땅 긁어모으다가 관찰하는 시선이 느껴져 포크를 내려놓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며 턱을 괴고서 멀리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맑은 하늘과 녹음이 어우러져 싱그러움을 자랑하는 통에 눈이 아주 시원해졌다.
자연을 보면 참 평화로운데 인간의 삶이란 투쟁의 연속이로구나. 할 일이 없으니 그런 고리타분하고 철학 같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황제는 보이는 것에만 치중할 생각인지 통 말이 없었으니까. 근래에는 황성에 와서 시간만 보내다 가는 기분이었다.
똑똑.
그런데 별안간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테라스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시중도 끝났고 더 이상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을 감지하고서 고개를 돌려본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밀린 문 사이로 테라스에 들어서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레이몬드였다.
***
한편, 함께 도망가자는 에일린의 제의를 승낙한 레이몬드는 속으로 그녀와는 완전히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에일린이 자신과 함께 멀리 가서 살기를 원한다면, 카일과 협상을 해볼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는 예전에 황성에서 열린 파티 때 카일이 보여준 쇼맨십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일은 카일에겐 에일린이 아닌 약혼녀가 필요할 뿐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레이몬드는 자신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퍼먼트를 뜨는 조건으로 에일린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원하는 대로 꺼져줄 테니 그녀와 함께 가겠노라고 말이다. 그런 용무를 가지고 황성을 방문했다.
하지만 레이몬드의 이런 계획은 도착과 동시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테라스에는 황제뿐만 아니라 에일린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보고 싶다고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레이몬드 역시 대공이라는 지위가 있지만, 미리 약속을 하고서 황성을 방문하였다. 고로 약속한 날짜와 시간에 하필 에일린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 건, 백퍼센트 카일의 의도라는 뜻이었다.
레이몬드가 테라스로 발을 내딛자, 고개를 든 에일린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녀의 표정을 정확히 인지하면서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레이몬드 왔나?”
카일은 의뭉스러움을 쏙 숨긴 채 느른한 태도로 자신의 사촌을 반겼다. 레이몬드는 몸가짐을 바로 하고서 허리를 깍듯이 숙였다.
“제국의 태양을….”
“아아, 됐어. 우리끼리 있을 땐 편하게 대하기로 해놓고 왜 그러나.”
“하지만 약혼녀께서 함께 계시는군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잘됐군. 서로 인사를 나눌 자리를 따로 마련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야. 레이몬드 자네도 여기에 앉지.”
카일은 자연스럽게 에일린의 옆자리를 고수하며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그녀를 슬쩍 일별한 레이몬드는 얌전히 건너편으로 가서 앉았다.
“그래. 서로 인사들 하지. 이미 구면이겠지만 사적인 자리는 처음일 테니 말이야.”
카일은 그렇게 말하며 에일린의 어깨에 팔을 슬쩍 올렸다. 순간 살결에 닿은 낯선 감촉에 그녀는 움찔 떨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노력했다. 그러고는 레이몬드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루슬로 대공 전하.”
에일린이 자신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에 레이몬드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참아야 한다.’
에일린이 황성에 종종 방문할 줄 알았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분노를 자아냈다. 그러나 그녀가 예쁜 미소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걸 보며 올라오는 감정을 죽을힘을 다해 억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