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우아아아앗!”
나는 최고속도를 내는 스포츠카의 조수석에 앉은 사람처럼, 카일의 허리를 생명줄처럼 부여잡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아까 황제가 했던 경고가 떠오르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해!
약간의 스킨십도 하기 싫었던 황제이건만 생명의 위협 앞에서는 싫고 좋고가 없었다. 나는 오직 본능에 충실하여 팔을 꽉 감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트럭 백작이 전방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폐하. 저기에 있습니다!”
전방에는 엉덩이가 크고 토실토실한 멧돼지가 다리에 화살이 꽂힌 채 미친 듯이 달려나가고 있었다. 황제는 다리로 몸을 고정한 채 달리는 말 위에서 또다시 시위를 당겼다.
투웅. 투웅.
화살을 두 번 더 명중시키자, 멧돼지가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으로 쓰러졌다. 귀족들은 급히 말을 세우더니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고서 멧돼지를 푹 찔렀다. 멧돼지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는 곧 완전히 숨을 거두었다.
으으. 싫다.
나는 그 장면이 보기가 힘들어서 등에 얼굴을 파묻어버렸다. 아무리 동물이라도 살생하는 장면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일전에 옥희의 부탁으로 동물들을 치료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가슴이 더 아팠다.
“이리도 큰 사냥감을 잡으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폐하는 역시 명사수십니다. 달리는 말에서 세 번이나 명중시키다니요.”
“공녀께서 또 한 번 반하시겠습니다. 허허.”
따라온 귀족들은 레퍼토리처럼 칭찬을 늘어놓았다.
이렇게 세 번을 더 반복하고 나서야 사냥이 끝이 났다. 동물들은 세 번 모두 황제가 쏜 화살에 쓰러졌으니, 귀족들은 사냥개 노릇이나 하라고 데려온 듯했다.
사냥하는 내내 등만 보였던 황제는 숨을 크게 골랐다. 그의 등에 기대어 나도 숨을 고르고 있었다.
“경들은 앞서 가시오. 잠시 에일린과 할 말이 있으니.”
“예. 폐하.”
명령이 떨어지자 세 귀족은 부럽다느니, 보기 좋다는 말들을 늘어놓으면서 앞서 달렸다. 황제는 일부러 말을 천천히 몰아갔다. 거리가 제법 떨어지고 나자 비로소 그는 내 이름을 불렀다.
“에일린.”
“예. 폐하.”
“사냥에 따라오니 어떻소?”
“어, 오랜만에 바람을 쐬니 좋습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대충 얼버무렸다.
사실은 전혀 좋지 않았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도 어떤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지 다음 말로 넘어갔다.
“오늘 보아서 알겠지만 나는 명사수요.”
“그러시네요. 저도 오늘 처음 알았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나는 멀리 있어도 그대를 알아볼 수 있고 맞출 수 있으니, 감히 내게서 달아나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
황제의 목소리와 말투는 다른 사람의 것처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순간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끼쳤다.
그의 허리에 둘린 팔이 오싹오싹했다. 사람이 아닌, 차가운 얼음덩어리를 안고 있는 느낌이었다.
“왜 아무 대답이 없지?”
그는 느릿하던 말의 걸음마저도 완전히 멈추게 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팔을 뻗더니 내 허리를 감싸 안아서 자신의 앞쪽으로 이동시켰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깜짝 놀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황제를 바라보았다. 정면으로 마주 본 그의 표정은 실연을 당해 상처 입은 사람처럼 완전히 구겨져 있었다.
“숲으로 되어있는 사냥터는 이 카일의 전용 놀이터야. 이곳의 동물들은 전부 내 소유지. 처음부터 내 명령에 의해 이곳에 살게 되었으니 살리든지 죽이든지 내 마음이야. 저것들에게 선택의 권한은 없어. 내 것이니까 내 자유라고. 알고 있나?”
“…….”
“그대가 착각하는 게 그거다. 내가 내 것이라 하면 그건 내 것이다. 에일린. 거부권은 없다.”
황제는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는 내 턱을 붙잡더니 억지로 끌어올렸다. 독기 어린 눈빛이 내 코앞에 당도했다.
“크읏.”
손동작이 너무 거칠었기에 미간이 구겨지면서 입술 사이에서 신음이 흘렀다. 황제는 고통 어린 표정이 마음에 든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더니 손을 홱 하고 내팽개쳤다.
“하지만 아직은 그대에게 기회를 주고 싶군. 다음부터는 유순해진 눈빛을 기대하지.”
그는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고서 등을 돌렸다. 그러곤 다시 말을 몰기 시작했다.
죽도록 싫었지만 살려면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아야 했다. 머뭇거리다가 몸이 비틀대자 본능에 의해 팔이 먼저 나갔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소한의 면적만이 닿도록 노력하는 것 하나뿐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주변을 감싸는 동안, 나는 황제의 등 뒤에서 그의 말을 곱씹었다.
억지로 가져도 억지로 끌려오는 꼴은 보기 싫다 이건가?
그 이기성의 극치에 치가 다 떨렸다. 나는 아랫입술이 피가 나도록 질끈 깨물었다.
함께 사냥을 간 세 귀족은 하사받은 사냥감을 가지고 각자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황제는 황성으로 가는 지름길 대신에 백성의 마을을 둘러가는 코스를 택했다. 당연히 우리의 뒤에는 호위들이 따르고 있었다.
“왜 이 길로 가는지 궁금하지 않소?”
“왜인가요?”
“그대가 백성의 마을을 자주 돌아다닌다기에 어떤 매력이 있나 궁금해졌거든.”
“….”
레이몬드와 나 사이를 의심하고 있구나.
황제의 반복되는 협박과 떠보기에, 가정은 점점 확신이 되고 있었다.
우리가 탄 말머리는 이윽고 마을 어귀로 들어섰다.
황제의 행차는 공식적인 알림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그저 어떤 귀족이 지나가는구나, 생각하며 일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평민 중에는 황제의 얼굴을 아는 자가 거의 없으니까.
마을 길은 때마침 장이 서 있는 통에 복작거렸다.
사람이 잔뜩 몰려들어 좁디좁은 골목길을 말을 타고 가다니 민폐도 이런 민폐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고 자라길 한결같이 귀한 황제에게는 세상 모든 이 앞에서 자신이 1번이어야 했다.
뒤에 타고 있던 나는 사고가 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을 부여잡고 있는데 역시나 일이 터졌다. 황제의 말에 누군가가 부딪힌 것이다.
“아이고!”
나이를 70세 넘게 먹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그는 거동이 불편한지 느릿느릿하게 걷다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말의 몸뚱이와 부딪혀버렸다.
“어머나.”
“저런.”
나를 포함한 주위 사람들은 노인의 안부를 걱정했다. 잘못 넘어졌다가는 뼈가 부러질 것 같이 연약해 보였으니까.
황제가 고삐를 잡아당기자 말은 투레질을 하며 멈춰 섰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매섭게 말했다.
“감히 내 앞길을 막고서 바닥에 엎어져 있다니 제정신인가?”
“죄… 죄송합니다. 나으리.”
상식적으로는 말을 탄 사람한테 책임이 있을 것 같지만, 이런 신분제 사회에서 높은 신분은 모든 것을 상쇄시키며 우선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지적을 받은 노인은 서둘러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일어서려고 할 때마다 무릎이 꺾여 주저앉기를 반복하는 걸 보니 부딪히면서 다리를 다친 건가 싶었다.
시간만 흐르자 황제가 대뜸 말에서 내렸다.
왜 내리는 거지? 설마 도와주려는 걸까?
이유가 궁금해서 지켜보고 있는데, 황제가 허리춤에서 장검을 빼내더니 노인 쪽을 겨누는 것이 아닌가.
“꺄악!”
갑작스러운 무기의 등장에 사람들은 아연실색하며 거리를 벌렸다. 나 역시 입이 쩍 벌어졌다. 너무 놀란 나머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 나으리. 저에게 자비를….”
“다리가 쓸모없어진 모양이로군. 그렇다면 아예 끊어주도록 하지.”
노인의 간절한 요청에도 황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검을 치켜들었다. 금속이 살을 파고드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노인의 입에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
“끄허어어억.”
사고파는 소리로 북적여야 할 시장은 이제 노인의 신음을 제외하고는 거의 정적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이 무서운 광경을 떨리는 눈동자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자신에게로 시선이 모인 것을 의식한 황제는 고개를 치켜들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이같이 선포했다.
“나는 대 프라레스 제국의 황제 카일 루슬로다. 앞으로 내 앞을 막는 자는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용서치 않을 테니.”
여기까지 말한 그는 몸을 돌려 나를 보았다.
“가슴 깊이 새겨두도록.”
내 눈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면서 마지막 문장을 읊었다.
저 경고는 명백히 나를 향한 것이었다.
검을 든 것도, 노인을 베어버린 것도 모두가 내게 주는 경고.
그걸 위해서 굳이 이런 상황을 연출하고 무고한 백성을 희생시키다니 정말이지 끔찍한 성품이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아래를 보았다. 노인은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다. 어서 손을 쓰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인데도, 사람들은 공포에 얼어붙어 섣불리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백성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선황제의 폭정이 그들의 핏줄과 역사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으니까. 이미 황제라는 단어에서부터 모두가 공포에 질려버렸다.
여기서 저 노인을 구할 수 있는 건 나뿐이로구나.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자 나는 황급히 말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황제를 스쳐지나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끄으으.”
“조금만 참으세요.”
나는 허벅지에 꽂힌 장검을 빼내어 바닥으로 내던졌다. 지혈을 위해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상처 부위에다 대고 꾹 눌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입안으로 침을 잔뜩 모은 다음,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게 고개를 푹 숙였다.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이 주변의 시야를 차단했다. 나는 안심하며 손수건을 살짝 들어 올려 침을 몽땅 아래로 흘러내렸다. 처음에는 퐁퐁 터져 나오던 피와 침이 섞이더니, 몇 초 사이에 상처는 점차 아물어 갔다.
됐다…!
나는 다시 지혈하는 척하면서 손수건으로 덮었다. 잠시 후 손수건을 길게 만들고서는 그의 다리에 둘러 묶었다. 나의 기이한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노인은 어느 순간 고통이 잠잠해지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검지를 들어 입에다 갖다 대고는 ‘쉿!’ 소리를 내었다. 노인은 내 비밀스러운 동작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이 치료 장면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황제는 내 지척에 있어 일거수일투족을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찌푸린 얼굴이 점점 놀라움으로 물들어가고 있다는 게 그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