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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71화 (71/125)

71화

헤레나가 대화에 끼어든 것이다.

“어머어머! 전하는 분홍색을 좋아하시는구나. 저도 분홍색이 최애 색깔이에요! 우리 정말 똑같아요. 이런 공통점이 있을 줄이야.”

레이몬드와 나 사이에 난입한 헤레나는 소란스럽게 지껄여댔다. 제대로 건수를 잡았다 싶었는지 들뜬 마음을 유감없이 표출했다.

“저는 분홍색을 좋아해서 항상 분홍색 드레스만 즐겨 입는답니다. 오늘 입은 이 드레스도 그랜드 왕국에서 옷감을 공수해온 거예요. 정말 예쁘지 않나요?”

“….”

“게다가 전 짙은 분홍을 선호해요. 옅은 색은 왠지 좀 가짜 같잖아요? 앗, 그러고 보니 공녀님의 머리칼은 좀 더 진했으면 좋을 텐데. 이렇게 옅으면 물 빠진 색 같아서 좀 그래요.”

얘가 원래 이렇게 수다스러웠나?

좋은 순간을 방해받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반감이 올라왔지만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런데 이 기분은 나 혼자만 느낀 게 아닌가 보다. 레이몬드는 미간을 구기며 계속해서 떠들어대는 헤레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내가 눈치 없이 끼어드는 걸 가장 싫어한다고 했을 텐데?”

레이몬드는 손가락으로 헤레나의 드레스를 정확히 가리켰다.

“내가 말한 건 그런 만들어진 가짜 분홍색이 아니라 천연의 분홍색이 아름답다는 뜻이다.”

벌떡 일어선 그는 내 손목을 붙잡더니 다짜고짜 끌어당겼다. 나는 강한 힘에 붙들려 나가면서도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했다. 모든 내빈들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몰려든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키튼 백작 가의 정문에 다다르고 나서야 조금 정신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바위처럼 제자리에 서서 굳어있는 헤레나는 우리를 있는 힘껏 노려보고 있었다. 완전히 의심과 분노에 사로잡힌 표정이었다.

***

결국 카일의 손에는 어떠한 근거도, 소문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자 의구심만 남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한 번 시작된 의심은 금세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알현실의 황좌에 앉은 카일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지?

아드리엔과 레이몬드의 연결고리가 에일린이라는 걸 말이야.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라, 실은 에일린을 사이에 두고 친해진 거라면?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자 카일은 분노했다. 그는 팔걸이를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제길. 이걸 이제야 깨닫다니. 반드시 현장을 잡았어야 했는데…!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렸다. 증거를 찾아야 꼬투리를 잡을 수 있을 텐데.

레이몬드 쪽에서도 자신이 경비대를 풀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테니 앞으로는 몸을 사릴 것이다.

“여봐라!”

“예, 폐하.”

카일은 또 다른 시종을 불렀다. 이 일을 실패한 대가로 감옥에 가두어둔 시종장에게 매질을 열 대 추가하라는 명령을 내려 대신 화풀이를 해야 했다.

그때 문지기 노릇을 하는 신하가 다가왔다.

“폐하. 키튼 백작 가의 여식 헤레나가 폐하를 알현하기를 청하옵니다.”

“뭐? 키튼 백작의 영애가?”

카일은 찾아온 의외의 인물에 의아함을 느꼈다. 살짝 호기심이 동하자, 곧 알현을 수락했다.

“들어오게 해라.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물러가 있도록.”

“예, 폐하.”

신하가 물러가고 잠시 후 헤레나가 알현실로 들어와 예를 갖춰 인사했다. 오늘도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홍학과 같은 우아한 자태를 뽐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알현을 허락해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래. 키튼 영애.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한 건가?”

화를 채 식히지 못한 급한 음성이었다.

헤레나는 가까이 마주친 황제의 모습에 가슴이 떨렸다. 황금빛 머리칼이 실크처럼 부드럽게 흔들리며 빛나고 있었다. 코웻 공녀에게 빼앗기기에 너무 아까울 만큼 아름답고 기품 있는 외모에 속으로 결심을 다졌다.

‘그래. 이런 폐하를 능멸하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지. 내 치욕과 함께 반드시 갚아 주겠어.’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면서 공손한 목소리를 내었다.

“폐하. 이런 말씀 올리기가 참 송구하지만, 용기를 내어 찾아왔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코웻 공녀님과 루슬로 대공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뭐?”

순간 짧고 날카로운 되물음이 황제의 입에서 터졌다. 헤레나는 어깨를 움찔 떨었지만, 이윽고 내려온 명령에 입을 움직여야 했다.

“계속 말해라.”

“네. 두 분은 최근 사교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데 번번이 같은 파티에서 마주쳤습니다. 그런데 대공님은 공녀님 외에는 누구와도 춤을 추지 않으세요. 두 분만 춤을 춘 게 여러 번이고요. 평소에 그게 굉장히 이상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제 티파티에 두 분이 참석하셨는데 거기서 대공님은 공녀님만을 바라보고 대화했습니다. 심지어 주최자인 제가 대화에 끼어든다고 무안을 주며, 두 분이서 손을 잡고 당당히 걸어나가기까지 했습니다.”

그녀는 한 번 터진 입을 신나게 놀렸다.

“그게, 사실이냐?”

“예. 저는 제국의 앞날이 걱정되어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고하신 폐하께 누가 되는 일은 결코 있어선 안 되니까요.”

“알았다. 용기를 내어줘서 고맙군.”

카일의 말에 헤레나는 큰 상을 받은 것처럼 뿌듯하고 안도했다. 황제에 관한 흉흉한 소문 때문에 찾아오기가 다소 두려웠지만 오로지 갚아 주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 판단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고개를 들어봐라.”

카일은 계단을 내려오더니 헤레나의 턱에 손을 대고 올렸다. 그러자 자연히 올라간 헤레나의 두 눈이 카일의 조각 같은 얼굴에 닿았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넋이 나가 입을 벌린 채로 그를 보았다.

“그대가 보기엔 내가 어떤가.”

“폐… 폐하는 너무나 멋있고 아름다우십니다.”

마치 황제를 칭송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 이게 일반적이지.’

‘폐하는 너무 조각이라서 현실성이 없으세요.’라고 침착하게 말하는 건 올바른 반응이 아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종류였으니까.

“나와 키스하겠는가?”

“예… 예? 제게 감히 그… 그런 영광을….”

헤레나의 눈에서는 하트가 폭포수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올바른 반응이라고!’

카일은 예전의 에일린을 떠올리자 분노가 치밀었다. 지금 이 헤레나와 에일린은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었으니까.

자신을 만질 수 있게 은혜를 베풀었는데도 두려움에 떨며 그저 빠져나가고자 했던 에일린은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붙잡았던 헤레나의 턱을 내팽개치듯이 홱 놓았다. 내팽개쳐짐을 당하고도 그녀는 여전히 사랑에 빠진 상태 그대로였다.

‘가만두지 않겠어. 코웻 공녀.’

황좌에 도로 착석한 황제는 다리를 꼬며 분에 젖은 눈동자를 빛냈다.

***

헤레나의 티파티가 있던 날 커다란 보름달이 떠올랐고 우리는 아지트로 모였다. 레이몬드와 마주 앉은 나는 그를 향해 푸념을 잔뜩 늘어놓았다.

“아. 이제 어쩌죠.”

“미안하군.”

“아무리 화가 나도 참으셨어야죠.”

“에일린을 들러리 취급하는 게 견딜 수 없어서. 내가 더 참았어야 했는데.”

내가 계속 혼을 내자, 레이몬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여러 번 사과를 했다. 그 모습이 불편했는지 멜라스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구박은 이 정도로 끝낼까.

자신이 경솔하게 행동했음을 반성하는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탓을 해봐야 소용이 없으니까. 게다가 그는 나를 위해 움직인 거라 마냥 비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욱하는 사람일 줄이야.

그곳에서 우리를 본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자칫하다간 여태 조심하며 지켜왔던 것들이 모조리 도루묵이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떠나기 전 일별했을 때 헤레나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에게 나는 절친에서 철천지원수로 순식간에 지위가 하락했다.

그렇게 찝찝한 마음으로 하루가 마무리되고 다음 날이 밝았다.

공작 저에는 아주 오랜만에 황성으로부터 사람이 찾아왔다. 그 때문에 저택 내는 아침 일찍부터 때아닌 분주함에 사로잡혔다.

“코웻 공녀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아니, 연락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오시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황제 폐하의 명령을 전할 뿐,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꾸밀 시간을 드릴 테니 노여워 마시지요.”

준비를 위해 이동하면서 응접실 내부 광경이 보였다. 심부름을 온 황제의 시종은 공작 저의 하녀장 엠마의 항의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점으로 향하려는 내 일정은 모조리 취소되고 황성 나들이가 새로운 스케줄로 등록되었다.

아. 가기 싫다.

하녀들이 나를 씻기고 꾸밀 동안 내내 이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직접 와서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 뭉그적거릴 여유는 없었다. 마음과는 다르게 몸은 어느 때보다도 가고 싶어 애타는 사람처럼 바삐 움직였다.

황성에 도착하자 시종은 나를 평상시와는 전혀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오늘은 어디로 가나요?”

“폐하께서는 공녀님을 알현실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음? 웬 알현실일까?

한 치도 예상할 수 없는 장소에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코웻 공녀님 드십니다.”

문지기의 알림에 문이 양옆으로 열리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가 불러서 간 그곳에는 낯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두 남자가 황좌 아래에서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외관상으로 보아 한 사람은 귀족, 다른 한 사람은 평민은 듯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죄를 지은 사람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때 황좌에 앉은 황제가 나를 맞이하며 입술을 열었다.

“어서 와. 나의 에일린.”

그는 이 장면들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은 환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이곳에 나를 왜 부른 걸까.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앞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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