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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70화 (70/125)

70화

황제의 명령을 받은 경비대원들은 퍼먼트의 마을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경비대장은 이제 막 순찰을 갔다가 돌아온 대원들을 향해 물었다.

“이번엔 어디 차례지?”

“에이비씨 마을입니다.”

“그럼 a팀은 변두리 쪽으로, b팀은 시장 쪽으로 가라.”

“예.”

지시가 떨어지자 경비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들은 서둘러 에이비씨 마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편, 에일린과 레이몬드는 시장의 가장 번화한 사거리로 접어들었다.

“오, 저건 뭘까요?”

에일린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음료수통에 다가설 때, 경비대도 이쪽으로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경비대의 걸음으로는 이제 백 걸음만 더 가면 사거리가 펼쳐지면서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에 닿을 예정이었다.

마흔 걸음, 서른 걸음, 스무 걸음….

점차 거리가 짧아지고 곧 마주치게 될 상황이 일촉즉발인 바로 그때였다.

푸드드드득.

인근 나무에 있던 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르더니 시장을 통과하여 대거 이동하기 시작했다.

“으헉. 이게 뭐야?”

“여긴 웬 새가 이렇게 많아? 자칫하다간 부딪히겠어.”

새들의 대이동은 시장을 온통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혹여나 새들과 충돌할까 봐 두려워 몸을 숙이거나 피하고 달아났다.

경비대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신없는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자 경로를 틀어 그대로 직진했다. 이윽고 사거리를 빠른 걸음으로 통과하여 시장길을 완전히 빠져나갔다.

경비대와 새들까지 물러나고 나자, 에일린은 레이몬드가 막 사서 건네준 알록달록한 음료수를 손에 든 채 환하게 웃었다.

“이거 진짜 맛있고 시원해요! 어서 드셔보세요.”

“어디?”

빨대를 문 레이몬드의 입속으로 음료수가 떠올라 이동했다. 주린 배를 채우고 마른 목도 축이고 나자 에일린은 이제야 살 것 같았다. 아주 만족스러운 데이트였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까?”

“네.”

에일린은 레이몬드를 올려다보며 사랑스럽게 끄덕였다. 두 사람은 손을 잡는 대신 팔과 어깨를 붙인 채 나란히 걸었다. 그런데 저 멀리 나무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한 존재가 있었다.

높고 청명한 울음소리가 스타카토로 끊어진다. 무성한 잎사귀 탓에 잘 보이지 않는 나무의 안쪽에서 동그란 두 눈동자가 희번덕거렸다.

***

모처럼 낮 데이트를 즐긴 날 밤.

레이몬드의 연락을 받고 아지트로 이동한 나는 나쁜 소식을 접해야 했다.

“오늘 낮에 황제가 길거리에 경비대를 풀어 공녀님을 찾아 헤맨 것 같습니다.”

“네? 그게 정말이에요?”

멜라스의 보고 내용에 나는 깜짝 놀랐다. 레이몬드는 미리 들은 터라 표정이 마냥 어두웠다. 과장되거나 거짓이길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사실이 명백해지는 근거들만이 대답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네. 그들의 대화를 엿들어보니 황제의 긴급지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자세한 연유는 말해주지 않은 것 같고 찾아내는 게 주 임무로 보였습니다.”

“황제는 왜 갑자기 에일린을 찾으라고 한 거지?”

레이몬드의 의문 제기에 우리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우선은 내 일정을 간파하고 있었던 거로 보아 미리 미행을 붙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미행을 왜 붙인 걸까? 레이몬드가 힐스 마을에서 나온 후로는 주로 밤에 만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레이더망에 걸릴 일이 없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다가 번뜩 떠오른 게 있어 고개를 홱 들었다.

“아! 설마 그날인가.”

“짐작 가는 게 있나?”

양손에 쥔 주먹을 위아래로 마주치자 레이몬드가 물어왔다.

“우리가 2주 전에 낮에 만났잖아요. 나이트 워치에게 선물로 줄 에센스를 포장해둔 걸 가지러 상점에 갔었는데, 그걸 보았던 게 아닐까요?”

“그렇군. 그때 들킨 건가.”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이군요. 대공 전하와 공녀님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니까요.”

멜라스의 말이 맞았다. 경비대에는 나를 찾으라고 지시를 내렸지만, 실은 대공과 내가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도록 하는 게 숨겨진 임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안일했던 걸까. 철저한 분장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던 모양이다.

의문이 될만한 점은 하나 더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희를 찾지 못한 걸까요? 샅샅이 뒤지지 않았더라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흠.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인걸.”

“그렇죠?”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레이몬드가 턱을 매만지며 동조했다.

우리는 거의 방심한 채로 편안하게 돌아다니고 있었으니, 경비대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서로의 존재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다니 기이한 일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확실한 연유는 모르겠지만 아무쪼록 들키지 않아 다행입니다. 앞으론 몸가짐을 더 철저히 하셔야 하겠습니다.”

“물론이죠.”

“알겠어.”

멜라스의 당부에 우리는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시일이 지나고 헤레나는 티파티를 개최했다. 대공과 더불어, 그를 꼬드기기 위한 발판으로 절친이라고 소개한 나까지 초대했다.

키튼 백작 가의 파티에는 한 가지 룰이 있었다. 그것은 초대된 영애들은 분홍색 드레스를 입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명확했는데, 바로 주최자가 입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헤레나는 늘 분홍색만을 입었다. 아마 그 색깔에 대단히 애착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하여 오늘의 난 초록색 드레스로 골라 입었다.

초대장을 열어보니 나에게 10분 정도 일찍 와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녀의 부탁대로 조금 이른 시간 키튼 백작 가에 도착하자, 나를 발견한 헤레나가 부리나케 다가왔다.

“코웻 공녀님. 이리로 와보세요!”

그리고 나를 구석으로 데려가서는 남들이 들을세라 작당 모의를 하듯 낮게 속삭였다.

“대공 전하께서 오늘 티파티에 참석한다고 답장을 보내오셨어요.”

“네.”

“그래서 말인데, 옆에서 바람 좀 잡아주세요. 저랑 대공 전하가 좋은 분위기를 형성하도록 말이에요.”

“아….”

“저 도와주시기로 한 거 잊지 않으셨죠? 열심히 해주셔야 해요.”

헤레나는 주먹까지 꽉 쥐며 파이팅을 해 보였다.

저기요. 내가 언제 너를 도와주기로 했나요?

그녀는 다른 사람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이 자기 할 말만 쏟아내고서 사라졌다.

곧 초대받은 레이디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정원은 빠르게 채워졌다. 썰렁하던 분위기가 점차 열기를 띄어가고 있을 때쯤, 입구 근처에서부터 미약한 환호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얼핏 바라보자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가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오셨다!”

미어캣처럼 귀를 곤두세우고 있던 헤레나는 입구 쪽으로 뽀르르 이동했다. 그리고 그녀의 한쪽 팔에는 내 팔이 붙들려있었다.

“대공 전하. 어서 오세요.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차 앞에 당도한 그녀는 예쁘게 웃으며 인사를 올렸다. 오늘 제대로 날을 잡았는지 한껏 힘주어 꾸민 모습이 제법 잘 어울리는 듯했다.

그러나 역시 나의 최애. 앞으로 보아도 뒤로 보아도 잘생긴 이 남자는 잘 다린 제복 차림 하나만으로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레이몬드의 멋짐 앞에서 레이디들은 모조리 시들어버린 상추처럼 생기를 잃었다.

나는 인사도 잊은 채 그를 넋 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다.

레이몬드는 헤레나를 일별하고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입을 반쯤 벌린 채 볼이 발그레해진 내 모습이 우스웠을까. 그는 올라간 입꼬리를 주먹으로 가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어쩐지 얼굴이 조금 상기된 듯 보였다.

“크흠. 코웻 공녀는 내게 인사하지 않을 텐가.”

“앗.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멍하니 있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선 서둘러 인사했다.

“그래. 나도 반갑소.”

누구에게 한 말일까? 레이몬드는 우리를 향해 그리 말하고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헤레나는 그를 우리 테이블 쪽으로 안내했다. 자신의 모습이 잘 보일 수 있게 맞은편에 앉았고, 나는 그녀의 옆자리였다.

자리가 만들어지자 하녀들이 다가와 주전자를 기울여 찻잔을 채워주고 물러났다. 레이몬드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자, 헤레나가 얼른 말을 붙였다.

“차향이 어떠세요? 입맛에 맞으시나요?”

“흠. 괜찮군.”

“어머, 다행이다. 멀리 그랜드 왕국에서 특별히 공수해온 거랍니다. 귀한 분께는 귀한 것이 어울리지요. 호호.”

그녀는 어떻게든 호감을 사보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러나 별다른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초조한지 나를 보며 눈짓을 보냈다.

응? 나더러 뭘 하라고?

바람을 잡아달라는 요구가 일방적이기도 했지만 사실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 더욱 난감했다. 나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아무 말이나 꺼냈다.

“대공 전하.”

내가 부르자 그를 비롯한 주위의 시선이 내게로 모여들었다.

“전하께서는 오늘 진한 초록색 제복을 입으셨네요. 정말 근사하세요. 여기 티파티에 참석하시느라 신경 쓰셨나 봐요.”

오늘따라 더욱 멋진 레이몬드의 옷매무새를 칭찬해보기로 했다.

바람 잡는 포인트는 바로 신경 썼다는 부분! 헤레나는 내 멘트가 마음에 들었는지 기대 어린 표정으로 대공을 보았다.

“그래. 공녀도 초록색이로군. 이거 우연인걸.”

“어, 그러네요. 하하.”

그러나 레이몬드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받아들였다.

나와의 색깔 맞춤을 짚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듣고 보니 공통점을 찾은 것 같아 기쁘면서도 바람 잡기에 실패해 난감했다.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말을 이어나갔다.

“초록색을 좋아하시나 봐요.”

“꼭 그렇진 않아. 주는 대로 입었을 뿐이거든.”

“그럼 전하께서는 어떤 색깔을 선호하시나요?”

“난, 분홍색이 좋아.”

레이몬드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리 말했다. 날 보는 그의 눈동자가 분홍빛으로 물들어있었다. 그 안에 있는, 바다 위로 떨어진 벚꽃잎을 보듯 청초하고 아름다운 색감에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바다 마녀의 유혹에 매료된 듯 파도에 꼼짝없이 끌려들어 갈 것만 같았다.

“공녀는?”

“저는….”

대답을 하려고 입술을 떼려는 그때 갑자기 옆에서 접시가 깨지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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