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내가 뒤이어 주머니에서 꺼낸 계약금을 전달하자 나드가 대신 받아들고서 금액을 세어보았다.
“백 데나이 맞습니다.”
“크흠. 그럼 계약을 해볼까.”
제트렌의 손짓에 정보원 중 하나가 종이를 들고 왔다. 그가 그것을 받아들고선 2부 중 한 부를 우리 쪽으로 내밀었다.
“이게 뭐지?”
“계약서요. 우선 한 번 살펴보시오.”
오. 계약서라니 제법 체계적인데?
나와 대공은 계약서 위의 글씨들을 살폈다.
<의뢰계약서>
- 나이트 워치는 의뢰인의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 계약금은 10%인 100데나이로 계약과 동시에 지급한다.
- 나이트 워치가 목적을 달성한 경우 의뢰인은 나머지 900데나이를 즉시 지급한다.
- 의뢰인은 의뢰 해결을 위해서 정보의 제공 등 적극적으로 협조한다.
- 이 계약은 기밀이며 절대 함구한다. 만약 어길 시 어떤 식으로든 보복이 가능하다.
내용은 세밀하지 않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중요한 건 서류가 아니니까.
“에레 에센스를 받았으니 원하는 추가 사항이 있으면 끼워 넣도록 하지.”
“아니, 내용은 마음에 들어. 대신 이걸 마법사에게 공증을 받았으면 좋겠군.”
“뭣? 흐음.”
어차피 내뺄 공산이 큰 것은 저쪽이었다. 황제를 노리다가 실패하더라도 조직을 와해시키면 그만이니까. 그래서 음지에서 활동하는 거고, 비상시의 행동 강령이 완벽에 가깝게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마법공증이란?
마법공증을 받으면 지키지 못할 시에 처벌 형태의 패널티가 주어지는데, 그 중요도에 따라 목숨까지 걸기도 한다.
제트렌은 내키지 않는지 까슬까슬한 자신의 턱만을 연신 매만졌다.
“샘플 5병 준 거치고는 우리한테 너무 불리한데.”
“에레 에센스를 매달 5병씩 지급하는 조건이면 어떻지?”
“에센스를 매달?”
내가 내세운 과감한 조건에 방안이 일순 술렁거렸다. 제트렌은 이빨까지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런 거라면 좋소. 진작에 말씀하시지. 껄껄껄.”
그는 덩치에 맞게 목소리가 아주 컸다. 그뿐만 아니라 콩고물이라도 받게 될까 옆의 정보원들도 기쁨에 키득키득 웃어댔다.
화장품 사업이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는군.
나는 입꼬리를 만족스럽게 올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대공도 그리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데 공증에는 어떤 조건을 걸 테요?”
“흐음.”
나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입술을 떼었다.
“모든 조직원의 왼손이 어떤가. 절단 부위는 팔목으로 하지.”
“뭣?”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거기에는 레이몬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크흠. 생각보다 과감한 조건을 내미는군.”
“정보원들이 손목을 거는 것 정도야 흔한 일이 아닌가?”
“그래. 알았소이다.”
고민하던 제트렌의 입에서 승낙이 떨어지자, 깜짝 놀란 정보원들이 다급히 그를 불러댔다.
“다… 단장.”
“단장님.”
“시끄럽다. 손님 앞에서 무슨 소란이냐. 일체의 이의는 받지 않을 테니 함구해라.”
제트렌은 손을 내밀어 거부의 의사를 확실히 드러냈다. 그러자 정보원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사실 원작을 본 나는 알고 있었다.
나이트 워치의 정보원들에게 손목이라는 건 목숨과도 같다는 것을.
이들은 조직에 들어오면서 복수라는 염원을 이룰 때까지 목숨을 걸겠다는 언약을 몸에 새겼는데, 그 부위가 바로 왼쪽 손등이었다. 물론 이 사실은 조직원들만이 아는 기밀이고 나는 그것을 이용한 것이다.
즉, 완전히 한배를 타게 된 거라는 얘기다.
이제 레이몬드가 원하는 그림이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나이트 워치가 황제를 처리하는 것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우리는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쉽지 않을 일일뿐더러, 황제가 대공을 노리는 이상 그를 견제하는 세력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나서 근처 마을의 마법사를 초빙해 공증까지 마쳤다. 마법공증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 큰 실력을 요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이트 워치 건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니 퍼먼트에서의 기반도 착실히 잘 다져졌다. 당연히 거기에 일등공신은 바로 나지! 나는 아주 뿌듯했다.
***
똑똑똑.
“폐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안에서 꺄르륵 거리는 여인들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황제의 근엄한 목소리만이 들렸다.
“들어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선 시중은 공손한 몸짓으로 고개를 숙였다.
“바로 보고하러 오라고 하셔서 들어왔습니다.”
“그래.”
그의 말에 카일이 여인들을 돌아보며 명령했다.
“너희는 나가라.”
“예. 폐하.”
여인들이 합창하듯이 대답하더니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시종은 황제의 곁을 슬쩍 보았다.
카일의 양옆에 속살을 드러내며 붙어있던 여인들은 이불 속으로 숨어서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었다. 그러더니 적당히 가린 채 밖으로 잽싸게 뛰어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카일이 시종에게 물었다.
“보고는 누구에 관한 거지?”
“대공, 그리고 코웻 공녀입니다.”
“음? 둘 다라고?”
느른하던 카일의 눈빛이 뾰족해졌다.
“예. 맞습니다.”
“어서 보고해봐.”
내용이 궁금하여 애가 닳은 그는 시종을 채근했다.
“두 사람이 최근 마을을 함께 돌아다니는 장면이 ‘황실의 눈’에 포착되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예. 소탈한 옷차림에 긴가민가했지만, 확인 결과 맞았습니다.”
황실의 눈은 황제가 퍼먼트를 중심으로 제국 곳곳에 풀어놓은 감시자들이었다. 카일은 주먹을 꽉 쥐며 부들부들 떨다가 이를 콱 깨물었다. 두 사람이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둘이서 뭘 하던가?”
“최근 대공이 시작한 화장품 사업이 잘되고 있는데, 거기 가게를 방문하는 길이었습니다.”
“화장품?”
“에레 에센스라고, 사교계에서 아주 인기가 많습니다.”
“에센스라….”
에일린이 그 화장품을 사러 간다고? 그걸 사는데 왜 둘이 같이 간 거지?
아직 단서가 부족하다고 느낀 카일이 질문을 던졌다.
“시종이 보기엔 두 사람이 왜 상점에 간 것 같은가?
“저…. 그게….”
눈치를 보며 망설이던 시종은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그 화장품이 돈이 있어도 구하기가 힘들 만큼 인기가 많다는데, 혹시 아는 얼굴이라 공녀께서 부탁을 한 게 아닐까…요.”
시종은 자신 없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이것도 그럴싸한 이유가 될 순 있었다. 귀족 영애들이 피부나 헤어 관리에 환장한 것은 사실이니까. 단, 에일린이 아니라면 말이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한 그랬다.
‘이건 분명히 뭔가가 있다.’
카일의 직감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공녀에게 밀착 미행을 붙여라. 루틴을 파악해서 내게 가져오도록. 또한 지시하면 언제든 보낼 수 있게 경비대원들을 증강 배치해. 또 한 번 둘이 만난다면 현장에서 바로 포착할 수 있도록 말이야.”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시종은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
대공이 힐스 마을을 떠나고 공식적으로 수도에 머물기 시작하면서, 사실상 자유를 지켜주던 울타리는 무너져내렸다.
레이몬드와 에일린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이후로는 자주 만났지만, 몸을 사려야 해서 주로 밤을 이용했다. 공식적으로 마을을 떴을 뿐 알려지지 않은 아지트는 여전히 힐스 내에 존재했기에, 그곳이 그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그런데 에레 에센스의 인기가 문제였다.
안전을 위해서는 밤에만 움직이기로 했는데, 밀려드는 주문으로 물량을 맞추기 위해서 일정상 낮에도 방문할 일이 생긴 것이다.
“흐음.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데.”
“괜찮아요. 전에는 낮에 서점에 같이 다녔잖아요.”
“그때와는 경우가 다른걸.”
“대신 철저히 분장하죠, 뭐. 시간 없으니까 어서 가요.”
에일린과 레이몬드는 아지트에서 분장을 한 후에 곧바로 공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들의 동선은 카일 황제의 귀로 흘러 들어갔다.
“당장 경비대를 출동시켜!”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카일의 날 선 명령에 몸을 사리며 물러난 시종은 경비대장을 불렀다. 그러고는 에일린 코웻 공녀의 인상착의를 알려주며 반드시 찾아내라고 지시를 내렸다.
대공과 공녀의 관계는 정확히 눈으로 보이는 게 중요해서 그전까지는 함구하는 것이 여러모로 나았다. 자칫 황제가 질투에 사로잡혔다는 소문이 날 수 있으니 명령을 일부만 흘린 것이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공녀님.”
공장에 도착한 에일린이 인사를 건네자, 대공의 부하들이 기쁘게 반겼다. 남자들이 대부분인 칙칙한 작업 환경에 꽃분홍색의 에일린이 나타나자 행복해진 것이다.
부하들은 그녀와 친해지려고 접근을 시도했지만 레이몬드에 의해 번번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저흰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작업을 끝마친 후에 에일린이 레이몬드와 함께 공장을 도로 나섰다. 아직 태양이 중천에 떠 있을 시각. 그녀는 모처럼 낮에 나온 터라 그냥 돌아가기가 아쉬웠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야 할까요?”
“흐음. 그럼 근처에 에이비씨 시장이 있는데 뭘 좀 먹으러 갈까?”
“와, 좋아요!”
에일린은 간만의 데이트를 할 생각에 신이 났다.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작은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에는 대낮답게 한밤중보다 맛있는 것들이 훨씬 풍족했다.
“맛있겠다.”
에일린이 냄새에 홀려 다가가 군침을 흘리면, 레이몬드가 돈을 지불해서 그녀에게 건네주는 방식이 여러 번 이어졌다. 이제는 거리낌이 없어져 하나를 가지고 함께 나눠 먹는 게 자연스러웠다. 두 사람은 막간을 이용해 길거리 데이트를 즐겼다.
그런데 에이비씨 마을 근처에서는 기이한 움직임이 일었다. 평소라면 거의 보이지 않을 새들이 어디에서부터 온 건지 나무 곳곳에 잔뜩 날아와 앉은 것이다. 그 때문에 마을에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로 꽉 찼다.
짹짹 짹짹. 구구구구. 까악까악. 비배쫑비배쫑.
“오늘 새들이 왜 이렇게 많아?”
“시끄러워서 환장하겠네.”
나무가 있는 곳마다 사람들은 귀를 막으며 발걸음을 서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