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대공의 관심을 겨우 2프로 정도 얻는데 성공했지만 폭을 따지면 대단히 큰 변화긴 했다. 이거다 싶어진 헤레나는 본격적으로 입에 시동을 걸었다.
“다 같이 친하게 어울리면 좋을 것 같아요. 사람은 많을수록 즐거우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어.”
“다음에는 저희 집 파티에도 초대하겠습니다. 그때 꼭 와주세요. 아, 그 전에 제 티파티 때 다 같이 모여도 좋을 듯해요. 코웻 공녀님은 열 때마다 꼭 참석해 주신답니다.”
“그렇군.”
레이몬드는 그녀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성의 없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눈동자는 헤레나가 아닌 내게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주황색도 잘… 리는군.”
“?”
그는 헤레나가 옆에서 떠들어대는 동안 날 보며 뭔가를 중얼거렸다. 하지만 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실은 대공의 목소리도 작았거니와 헤레나가 흥분하여 아주 큰 소리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획득한 그의 관심에 신이 났는지, 이 절호의 기회를 어떻게든 활용해보려고 고군분투 중이었다.
“전하는 어떤 차를 가장 좋아하세요? 말씀해주시면 제가 그걸로 준비해 놓겠습니다. 호호호.”
성실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대꾸에도 헤레나는 끝까지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내가 못 알아듣는 표정을 지어서 짜증이 났던 걸까? 레이몬드는 돌연 미간을 구기더니 고개를 홱 돌려 헤레나를 향했다.
“어떤 차를 좋아하는진 모르겠지만, 눈치 없이 끼어드는 자를 가장 싫어하는 건 분명해.“
“네?”
그는 일침을 던지고서는 저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가 버렸다. 인사 차례를 빼앗겨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던 하이른 백작이, 이제야 자기 차례다 싶어서 서둘러 다가가 대공을 맞이했다.
남겨진 신세가 된 헤레나는 그때까지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자존심 강한 똑똑한 귀족 영애가 또 무시당했으니 얼마나 억장이 무너질까.
나는 상처 받았을 헤레나가 가여워 위로를 해주기 위해 그녀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저, 헤레나….”
“대공 전하께서는 쑥스러움이 정말 많으신가 봐요. 다음번에는 조금 더 힘을 내봐야겠어요.”
헤레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 내어 다짐했다. 나는 위로를 건네려던 입술을 닫고서 얼른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냥 포기하면 안 되겠니?
그녀의 집요함에 경악 섞인 감탄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
“키튼 가의 여식과 친한가?”
사업을 위해 새롭게 일군 아지트에 도착하자마자 레이몬드가 날 보며 꺼낸 말이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더니 물어오는 모양새를 보아 그게 아니었나 보다. 나는 괜히 심통이 나면서 불퉁한 마음이 일었다. 사실대로 이야기해주기가 싫었다.
“네. 아주 친해요.”
“이번 키튼 가의 티파티에 참석할 건가?”
“그럴 거예요.”
“…그럼 나도 참석해야겠군.”
그는 썩 내키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레이몬드에게도 티파티 초대장을 보냈구나.
헤레나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매몰차게 거절을 당해놓고도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벌써 두 번이나 그랬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야망 앞에서는 일말의 자존심도 사치인 걸까.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데 레이몬드가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높았던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갑작스러운 접근에 당황한 내가 뒤로 한발 물러나려 하자, 그가 잽싸게 내 어깨를 붙잡았다.
“왜 그러세요?”
“에일린. 이거 좀 봐.”
“?”
레이몬드는 반대편 손으로 자신의 입술 옆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상처가 나 있고 붉은 피까지 맺혀있었다.
“다친 거예요?”
“맞아.”
“어쩌다가요?”
“검술훈련을 하다가 훈련이 격해져 버렸거든.”
검술훈련을 하다가 그랬다고?
검으로 상대와 치고받고 싸우는데 어째서 주먹다짐이라도 한 것처럼 입술 옆이 터진 거지?
잘생긴 얼굴에 흠이 생겨 가슴이 아프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자니, 레이몬드가 의구심이 자라날 싹을 자르려 듯 얼굴을 바싹 갖다 대었다.
“이것 봐. 상처가 너무 깊어. 따가워서 말할 때마다 아픈걸.”
“정말요?”
눈앞으로 다가온 상처를 보자 그의 말도 납득할 만했다. 검술로 다친 게 아니면 어떠랴, 소중한 내 최애가 다친 것을. 나는 얼른 상처를 치료해 주기 위해서 병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그 손을 저지했다.
“그건 쓰지 말고.”
“그럼요?”
“에일린이 직접 치료해줘.”
그는 내게 너무나 당당하게 요구했다. 그 뻔뻔함에 하마터면 “네.”라고 자동으로 대답이 튀어 나갈 뻔했으니까.
어째서 얼굴이 그토록 두꺼우신가요.
한마디로 애무하듯이 해달라는 건데, 그의 말투는 반창고를 붙여달라는 정도로 가벼웠다. 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의사를 확인했다.
“직접이라면.”
“혀로 핥아주면 되겠지.”
“아니, 그건 좀….”
“어허. 어서.”
레이몬드는 짐짓 엄하게 명령조로 말했다.
어째서 이럴 때에 진지해지시는 건가요.
황당한 마음이 들면서도 그의 행동이 너무나 귀여웠다.
그러자 문득 건국제와 하이른 가 파티에서의 레이몬드가 떠올랐다. 헤레나를 보던 그의 얼굴은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릴 정도로 강렬했다. 한기가 느껴질 만큼 냉기를 품은 탓에 보는 사람에게 상처가 될 정도였는데.
지금 이 모습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애교일까…?
당연하게도 소설 속에는 대공이 애교를 부리는 모습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악역으로서 지조와 카리스마가 있는 성격이었으니까. 분명 과묵하고 무뚝뚝하며 엄격했는데…… 현재 내 앞의 레이몬드는 그저 만져주기를 기다리는 한 마리의 대형견 같아 보였다.
“서두르는 게 어때? 시간이 무한정 있진 않을 텐데.”
“아… 알겠어요.”
나는 이채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이기지 못해 긍정을 입에 담고야 말았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레이몬드의 얼굴이 훅 다가와 밀착했다. 입술은 닿을 듯 말 듯 지척을 유지했다.
“….”
그의 재촉에 못 이겨 결국 혀를 살짝 내밀었다. 상처 부위에 혀끝이 닿자 혈향이 훅하고 끼쳐왔다. 갑작스러운 접촉이 따가웠는지 그의 얼굴 근육이 살짝 경직되었다. 나는 고통을 최대한 낮추기 위해 부드럽게 움직였다. 상처는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 순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오 됐다!
상처를 씻은 듯이 치료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기뻤다. 임무를 무사히 완수했으니 이제 혀를 거두어들였다. 아니, 거두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빠르게 다가온 그의 입술 사이에 물리듯이 갇혀버렸다.
“핫?”
여… 역시 키스가 목적이었어!
이미 짐작했으면서도 붙잡혀 빠져나올 수 없는 당황스러운 처지가 되었다.
레이몬드는 막대 과자 끝을 물고 있는 사람처럼, 끝까지 다 먹으려는 듯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자 내 입은 완전히 잠식당하고 말았다.
입안에 머물던 혈향은 어느덧 사라지고 이제는 그의 향기로 대신 채워졌다.
피부가 스칠 때마다 간지러워 솜털이 곤두서고, 휘몰아치는 부드러운 감각은 따뜻하면서도 촉촉했다.
서로의 숨결이 오가면서 얼굴 근처의 공기마저 온기로 채워졌다.
숨이 가빠지려는 찰나, 입술이 떨어졌다.
시선은 여전히 집요하게 나를 향해있었다. 레이몬드는 혀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느릿하게 핥더니, 관능적인 입술을 열었다.
“에일린은 참 맛있어.”
“무… 무슨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세요.”
나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부끄러움에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얼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
대공과 나는 나이트 워치에 또다시 방문했다.
여전히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였지만, 지난번과는 다르게 훨씬 간소한 옷차림이었다. 한 번 거래를 튼 이상 과한 분장은 불필요했으니까.
오늘 이곳에 방문한 목적은 계약금 전달이었다.
퍼먼트 내에는 대공이 에레 화장품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는 소문이 점점 퍼져가고 있었다. 군사력과 더불어 경제력까지 탄탄하다는 사실은 안전상 유리할 수밖에 없어 일부러 더 소문이 퍼지도록 만든 부분도 있었다.
나이트 워치 역시 정보상답게 사업주가 누구인지 간파하고 있겠지? 물론 여전히 모르는 척할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제트렌이 꺼낸 말은 내 예상을 산산이 깨부수었다.
“에레 에센스 말이오. 그쪽으로 내가 직접 살 수도 있소?”
“에?”
그의 입에서 나온 발언은 의외의 것이었다. 저렇게 말하는 건 우리가 대공세력인 걸 안다고 밝히는 꼴이잖아? 어느 정도는 숨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대뜸 말해버리다니?
그의 다급한 말투조차 의아스러워하고 있을 때 다음 말이 이어졌다.
“그거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더군. 지인 찬스로 구할 수 있다면 계약조건을 그쪽에게 유리하도록 조정해줄 의향도 있소만.”
말은 간소했지만, 간절한 눈빛이 유성우처럼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의향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바짓가랑이를 붙들린 기분이었으니까.
험한 일을 하고 다니는 시커먼 사내들이 바르려는 건 아닐 테고.
나는 궁금한 점을 물어봤다.
“직접 쓰려고 그러나?”
“그것도 좋겠지만. 처가 사고 싶다는데 구할 수가 있어야지 원.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것도 있더군.”
보통 인기 있는 제품은 웃돈을 얹어서라도 사려는 무리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제 막 런칭한 에레 에센스는 신분이 최상위인 귀족들에게 먼저 보급되느라 그마저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돈 위에 권력이 있는 셈이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서 안에 있는 것을 꺼내었다. 자그마한 선물상자였는데 뚜껑을 열자 손바닥만 한 병 다섯 개가 들어있었다.
“안 그래도 선물로 에센스를 챙겨왔는데. 이걸 사용하지.”
“우오오! 고맙군. 정말 고마워. 이제야 마누라의 닦달에서 벗어날 수 있겠어.”
험상궂은 제트런의 얼굴이 아침 햇살처럼 환해졌다. 옆에 선 정보원들도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부러움으로 꽉 찬 눈빛으로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