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대공과 내 이름의 앞글자를 따서 지은 에레 에센스를 생산하기 위해서 이날을 비롯해 본격적인 사업 준비에 착수했다.
우리는 커다란 창고를 하나 빌려서 엄청나게 커다란 물탱크와 빈 병을 대거 구입했다. 탱크에 물을 가득 넣고 치유액을 몇 방울을 떨어뜨려서 반짝반짝 빛이 돌면 그것을 병에 담는 방식이었다. 양을 많이 넣으면 상처까지 치료해버릴 수 있기 때문에 극소량만을 투여해야 했다.
이 모든 과정은 대공의 부하들과 함께했는데, 앞으로도 이들이 사업의 실무자로서 일해줄 예정이었다. 그래서 레이몬드, 멜라스와 의논한 결과 나의 치유능력을 밝히는 게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모두 모여봐. 코웻 공녀님께서 할 말이 있으시단다.”
멜라스는 물탱크 안을 청소하고 나온 부하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궁금한 얼굴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모여들었다. 기존에 알고 친하게 지내던 부하들도 있었지만, 영지에서 불러들인 부하들도 있었기에 시선이 모여든 게 상당히 쑥스러웠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내 입장에서는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았기에 마음을 가다듬고 깊게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리고 애써 용기를 짜내어 입술을 열었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알려드릴 것이 있어요. 화장품을 만든다면서 왜 생수와 빈 병만 모을까 이상하게 생각했죠? 사실 제 침에는 치유능력이 있는데, 그걸 사용할 예정이기 때문이에요.”
언젠가 생각했었지만 치유력 자체는 몰라도 내 치유의 근원은 남에게 밝히기 낯뜨거운 사항이었다. 이들의 반응이 과연 어떨 것인가 떨리는 마음이 가득했는데, 긴장감에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환한 표정들이 날 맞아주었다.
“오오오. 그게 정말입니까? 공녀님?”
“와, 진짜 대단해요!”
“그렇다면 그날 대공 전하를 고치신 게 공녀님이셨군요!”
사실이 밝혀지자 한바탕 난리가 났다. 대공의 부하들은 신비롭다며 칭송하느라 입에 침이 마를 지경이었다. 나는 예상을 훨씬 웃도는 열렬한 반응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심지어 어떤 부하는 내게로 다가와 징징거리며 애교 섞인 부탁을 했다. 이번에 영지에서 올라온 닉스로,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소년이었다.
“공녀님. 저 아까 물탱크 청소하다가 팔꿈치에 멍들었는데요. 여기 호 해주세요.”
“그래? 어디 봐 봐.”
부탁을 들은 내가 닉스에게로 다가가려는데 그 사이로 불쑥 레이몬드의 팔이 튀어나왔다. 그는 짐짓 엄한 표정으로 닉스를 혼냈다.
“닉스. 그런 언행은 공녀께 무례하지 않나?”
“앗, 아닙니다. 대공 전하. 하하하. 제가 어찌 감히 공녀님께 그렇게 하겠습니까. 공녀님 죄송합니다. 어서 일하러 가야겠다.”
살벌하고 날카로운 눈빛이 닉스를 잔뜩 노려보자 그는 당장 꼬리를 내리며 물탱크 쪽으로 달아났다.
“아, 아니. 잠깐….”
닉스가 가버리자 치유해주려고 뻗었던 내 손은 공중에서 정처 없이 휘휘 돌아야 했다. 나는 타박을 주기 위해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레이몬드를 향해 눈을 흘겼다.
“레이몬드. 뭐 어때서 그래요?”
“나는, 싫다.”
“이러면서 가까워지고 하는 거죠. 모처럼 친해질 기회였는데 아쉬워라. 다음부턴 그러지 말아요.”
“….”
한껏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레이몬드는 대답도 하지 않고 못마땅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닉스와 말을 틀 기회를 날려버린 건 아까웠지만, 대공 부하들의 너나 할 것 없는 열렬한 환영은 내 마음의 짐을 내려주었다. 지금까지는 침 치유력이 부끄러웠는데, 이제는 좋아질 것만 같았다.
그래. 나 자신을 더 사랑하자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기로 했다.
일은 매우 순조롭게 출발했다.
처음에는 귀족들이 자주 다니는 번화한 곳에 상점 한 군데를 열어서 시작했다. 오픈 행사로 샘플을 나눠주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연해보도록 권하면서 입지를 다져나갔다.
그리고 며칠 새에 에레 에센스는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귀족 영애들을 비롯하여 부인들까지 에센스를 구하려고 혈안이 되었고, 그들의 하녀들이 새벽부터 상점 앞에서 긴 줄을 서는 게 일상이 되었다. 에센스는 아주 비싼 값을 매겼음에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피부까지 살린다고 하여 ‘생명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렇게 은행에는 사업의 성공으로 인한 금전이 착실히 쌓여가고 있었다.
“런칭 한 달 만에 팔십 데나이가 모였어.”
“거봐요. 제가 그랬죠?”
장부를 보며 놀라워하는 레이몬드의 목소리에 나는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
화장품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자 일은 대공의 부하들이 전담했다. 대공은 공식적으로 수도로 돌아온 만큼 본격적으로 사교계 활동을 해내야 했으니까.
대공이 여러 파티장에 자주 나타나기 시작하자, 그를 가장 환영한 것은 귀족 영애들이었다. 나비엔을 거절한 후로 자신들에게 기회가 돌아왔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황족에다가 제국 5대 미남에 아드리엔과의 해프닝을 제외한 염문설도 하나 없으니 대공은 누가 봐도 최고의 신랑감이기 때문이다. 황제와의 알력싸움은 뒤에서만 일어나고, 겉으로는 철저히 평화로움을 유지했기에 이 부분도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렇지만 역시 가장 좋은 사람은 바로 나라고.
누가 뭐래도 최애 사랑은 내가 일등이니까!
비록 어색하게 인사만 나누고서 등을 돌려야 했지만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레이몬드는 공식 석상에서는 친분이 티 나지 않게 늘 조심했는데 가끔은 내게 춤 신청을 하기도 했다. 황제의 약혼녀에게 청하기에 딱 적당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나 외에는 그 어떤 레이디와도 춤을 추지 않아 눈에 띄는 면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하이른 백작의 파티에 참석한 날, 레이디들이 둘러앉은 테이블에서 옆자리에 앉은 헤레나가 내게 슬쩍 말을 붙여왔다.
“코웻 공녀님.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아, 네.”
구석으로 이동하고 나자 헤레나는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얼굴을 가까이 붙이며 속삭였다.
“공녀님. 전에 보니까 대공 전하랑 친하신 듯 보이던걸요. 아무래도 높으신 분들끼리는 친분이 있으시겠죠?”
그녀는 조심스러워하면서도 보석을 박은 듯 반짝이는 눈동자로 물었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조금씩 빼냈다.
“아무래도… 그렇죠?”
“그래서 말인데요, 절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헤레나는 두 손으로 내 손을 덥석 붙들었다.
도와달라니 대체 뭘 말이야?
안 그래도 부담스럽던 그녀의 얼굴이 내게로 바짝 밀착했다.
“어떤…?”
“제가 대공 전하와 친해질 수 있게 말이에요!”
헤레나의 부탁에 나는 매우 난감해졌다.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카일 황제와 레이몬드는 사촌이니까, 내가 황후가 되고 자신이 대공비가 되어서 다 같이 잘 지내고픈 마음이겠지. 정치에 관심이 지대한 그녀에게 최고의 목표가 대공비인 것도 알만했다.
하지만 헤레나로서는 상상도 못하겠지. 레이몬드와 내가 손을 잡고 황제에 반대하는 세력이라는 것을.
저 부탁에는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거절하려니 마음이 껄끄럽고 그렇다고 허락하는 건 말도 안 된다. 언뜻 지난번에도 느꼈던 불같은 감정이 또 한 번 가슴 속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게….”
망설이면서 뜸을 들이고 있는데 때마침 문이 열리더니 파티장으로 대공이 들어왔다. 그 순간 레이디들의 작고 낮은 감탄이 내부를 바람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어머, 저기 대공 전하세요. 절 도와주시는 거죠?”
“네?”
“어서 가요!”
헤레나는 내 팔을 다짜고짜 잡아끌더니 대공 앞으로 뽀르르 나아갔다. 어쩌다 보니 나도 그녀에게 이끌려 레이몬드의 앞에 서게 되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대…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헤레나가 드레스 끝을 잡고 우아하게 인사를 올리고 나자, 그제야 나도 부랴부랴 그녀를 따라 했다. 허둥지둥하는 꼴이 우스웠던 걸까. 고개를 들어보니 레이몬드가 주먹으로 입을 가린 채 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미… 미워!!
똑 부러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자괴감이 썰물처럼 밀려들고 있을 때, 인사를 마친 헤레나가 대공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대공 전하.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오늘도 멋있으시네요.”
“음? 누구지?”
“저는 키튼 백작 가의 여식 헤레나 키튼입니다. 오늘까지 다섯 번째로 인사드려요.”
소개를 다섯 번이나 듣고도 잊어버린 레이몬드도 레이몬드였지만, 그걸 세었다가 콕 집어서 언급한 헤레나도 대단했다. 나는 속으로 헉 소리가 나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아.”
레이몬드는 뭔가 생각이 난 듯이 감탄했다. 그러자 헤레나의 눈동자에 희망이 샘솟는 것이 보였다.
“꼭 주최자처럼 말하기에 하이른 가의 여식인가 했군.”
“하이른 가에는… 영애가 없답니다.”
존재감을 완전히 무시당한 헤레나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웃는 낯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하이른 가는 아들만 다섯이지.”
레이몬드는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든지 관심도 없었다. 뭔가 떠올랐는지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 상황에 난감해진 나는 대공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는데, 날 보자마자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영민한 키튼 영애가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헤레나는 얼른 내게 팔짱을 끼더니 살갑게 굴기 시작했다.
“어머, 맞다. 대공 전하와 코웻 공녀님도 친분이 있으시다지요? 저와 공녀님은 아주 친한 사이랍니다.”
“음. 그런가?”
“물론이죠. 저희가 얼마나 가까운데요.”
그녀는 거의 나를 껴안다시피 하며 몸을 밀착했다.
언제 우리가 이렇게 친했던가요?
어쩜 연기를 이리도 천연덕스럽게 잘하는지 오스카상을 딴 카프리오 씨도 울고 가겠다.
하지만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을 변화가 있긴 했다.
나와 친하다는 말에 레이몬드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관심이 깃들었으니까. 그러니까 그전까지는 -100이었다면 이제는 +2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