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에일린.”
나를 발견한 나비엔과 아드리엔이 환한 표정으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런 가에서도 이제 막 홀 안에 도착한 듯했다. 반겨주는 이들을 보자, 이글거리는 감정이 조금은 사그라드는 듯했다.
“오빠는 왜 친한 척이야? 좀 떨어지지?”
“내가 에일린이랑 친구거든?”
저… 저기요. 여러분. 지금 절 두고 다투고 계시나요…?
두 사람은 지극히 현실 남매인지 사소한 거로 투덕거리며 싸워 댔다.
나는 으르렁대는 둘 사이에 껴서 테이블에 앉았다. 서로 째려보다가도 나와 눈이 마주치면 싱긋 웃어버리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아드리엔과 나비엔은 내버려 두고서 나는 주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사교계 모임이 좋은 건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건국제는 수도와 지방의 귀족들이 한자리에 다 모이기 때문에 더욱 풍성한 이야기가 오갈 테지.
역시 단연 주목받는 주제는 카일 황제에 관한 것이었다.
행사 직전에 홀로 들어선 황제는, 시종이 건국제의 시작을 알리고 프라레스 제국의 역사를 읊는 동안 무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섰다가 끝나자마자 사라졌다. 단 한마디 말도 내뱉지 않고서 말이다.
모두가 궁금해했지만 화제의 주위만 빙빙 돌 뿐 누구도 총대를 메지 않았다. 그렇게 대화가 한창 오가고 자리가 무르익자, 결국 용기 있는 누군가가 기어코 말을 꺼냈다.
“건국제에 참석하기 위해서 퍼먼트까지 왔는데, 황제 폐하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 가는군요.”
지방에서 올라온 한 귀족이 귀족 특유의 간접적인 화법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대체 황제는 왜 그랬을까.
그 궁금증은 모두가 가진 것이었으나 아무도 정답을 알지 못했다. 자리에 내려앉은 침묵이 그 증거였다.
“혹 폐하께서 심기가 불편하셔서 그런 게 아닐까요.”
이윽고 두 번째로 용기 있는 자가 입을 열자, 그다음부터는 너도나도 한마디씩을 얹었다.
“아무래도 그 일 때문이겠죠.”
“왜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시종장님께서 큰 잘못을 저지르셨다는군요. 감옥에 갇혔다고 하네요.”
“어머. 세상에나.”
“시종장님이…!”
“혹시 아드님 때문일까요? 폐하와 시종장님 사이의 은밀한 이야기를 옮겼다고 소문이 파다하던데요.”
“정말이에요? 그런 일을 저지르다니.”
귀족들의 경악 섞인 탄식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그때 나는 그들의 뒤에서 들려온 이야기를 가만히 귀담아듣고 있었다. 황제의 심기가 불편하다면, 역시 그날 내가 거절했기 때문이겠지?
주원인은 잘 모르겠지만 일조를 했을 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황제가 없는 건국제는 흐지부지되고, 귀족들은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집으로 향해야 했다. 목적을 달성한 나는 부모님과 함께 날아갈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공작 저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밤, 레이몬드와 나는 아주 오랜만에 만났다. 장소는 지난날 만났던 동쪽 숲의 호수였다.
동그란 달이 떠오른 밤. 전에도 걸을 때마다 설레던 숲길이었지만 지금은 걸음걸음이 떨려 발을 내딛기조차 버거웠다. 그래서일까. 평소라면 거뜬히 넘었을 텐데, 땅에서 솟아난 나무뿌리에 걸려 몸이 앞으로 휘청하고 휘었다. 그 순간 어깨 쪽에 힘이 느껴지더니 코아가 넘어지려던 내 상체를 강하게 붙잡아주었다.
“고마워. 코아.”
“아가씨. 천천히 가시죠.”
“그래야겠네.”
나는 정신을 집중하면서 한 발씩 단단히 내디뎠다.
그렇게 몇백 번을 반복하고 나자, 레이몬드가 기다리고 있는 호수 근처에 다다랐다.
“에일린.”
호수에 반사된 달빛은 그의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손을 내미는 모습이 마치 광명의 천사 같아 일순 눈앞이 멍해졌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어딘가로 이끌었다.
호숫가에는 두 사람이 앉기 좋은 바위가 하나 있었다. 우리는 그 위에 나란히 앉아서는 잠잠한 수면을 지켜보았다. 잠시간 후 입술을 뗀 레이몬드에게서 이제야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서로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힐스를 갑자기 떠나기로 한 건 백성들 때문이었어.”
“백성들이요?”
“그래. 힐스 마을에 불을 지른 게 시종장이야.”
“헛. 정말요?”
“배후를 추적해보니 그렇더군. 내가 거주하고 있는 걸 알고서 일을 도모한 거겠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놀라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동시에 또 하나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다.
“시종장이 레이몬드를 노렸고 실패해서 감옥에 갇힌 거로군요.”
“그렇겠지.”
그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또다시 대공을 노리기 시작한 걸까.
그렇다면 가만히 앉아 당할 수만은 없지. 앞으로의 그의 행보에 대해서 궁금했다.
“그럼 퍼먼트에 있으면 더 위험하지 않나요? 왜 이곳에 있기로 한 거예요?”
“거기엔 이유가 있어.”
레이몬드는 내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말을 이었다.
“퍼먼트에 화이트 크로우라는 용병단이 들어왔어. 그런데 이들의 진짜 정체는 정보상이거든. 이들을 접선하여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야. 제국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비리들을 파헤치려고.”
“아, 나이트 워치!”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원작소설의 내용이 떠올라 외쳤다.
겉으로는 화이트 크로우 용병단, 실상은 정보상인 나이트 워치는 프라레스 제국을 통틀어 가장 촘촘하고 유능한 정보망을 보유했다. 이들의 중심세력은 건국제를 틈타 지방에서 수도로 이주하는데, 먼 훗날 찐 여주인 아멜리아가 카일을 갱생시킨 후에 이들을 이용하여 제국을 쥐락펴락하게 된다.
“에일린이 나이트 워치를 어떻게…? 아.”
레이몬드는 의문이 깃든 기색이었다가 곧바로 거두어들였다. 내가 예지력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것이다.
“그것에 관해서도 꿈을 꿨었나 보군. 그렇다면 혹 에일린이 아는 바가 있을까. 현재로서는 들어왔다는 소식만이 유일할 뿐 알려진 정보가 없어.”
“물론이죠.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들의 숨겨진 아지트를 알거든요.”
“정말이야? 하핫. 그것 참 행운이로군.”
내가 가슴을 쭉 펴고 주먹으로 탕탕 치자, 그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일이 이렇게 쉽게 풀려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모양이다.
이럴 때 쓸려고 제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호호호. 나는 오랜만에 도움이 될 생각에 마음이 한껏 들떴다.
“아, 그런데 옥희는 어디에 있어요?”
“옥희?”
“옥옥.”
어쩌면 물어볼 말들 중에 가장 중요한 차례였는데, 때마침 부름에 응답하듯이 옥희가 울었다.
푸드덕.
힘찬 날갯짓 소리와 함께 커다란 형체의 새가 레이몬드와 나 사이로 날아와 바위 위에 내려앉았다.
“옥희야!”
역시 오랜만에 보는 옥희가 반가웠다. 나는 총총 뛰어다니는 녀석을 무릎 위에 앉히고는 등을 조심스레 쓰다듬어주었다. 시원한지 얌전히 마사지를 받고 있는 옥희를 보면서 말했다.
“그동안 옥희가 연락이 안 되어서 걱정했거든요.”
“연락이 안 되었다고?”
무심코 말했는데 레이몬드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의 반응을 보아 나의 예측이 빗나간 듯했다.
“옥희는 레이몬드를 따라간 것 아니었어요?”
“아니야. 에일린의 연락을 받으려고 이곳에 두고 갔었어.”
“어, 그래요? 그동안 불러도 대답이 없더라고요.”
그의 말에 나 역시도 놀랐다. 레이몬드는 이마를 짚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래서 여태 연락이 없었던 거로군.”
내 연락을 많이 기다렸었던 건지, 그는 연유를 파악하자마자 힘이 쭉 빠진 듯했다. 그리고 우리 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옥희에게로 쏠렸다.
“어떻게 된 걸까요?”
“옥희 너.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지?”
레이몬드는 엄격한 낯빛으로 옥희에게 물었다. 그가 하도 진지하게 물어보는 통에 순간 옥희가 대답을 할 수 있으려나 기대했지만, 녀석은 고개만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레이몬드는 무슨 반응을 기대했던 걸까? 모르겠다는 듯 눈만 동그랗게 뜬 옥희를 그는 의구심 어린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
술집 ‘에드워드 경의 일탈’.
이곳은 나이트 워치가 퍼먼트에서 의뢰를 받기 위해 열어둔 장소로, 이 존재마저도 아는 사람만 알고 있는 일급 정보였다. 원래라면 대공의 부하들이 여기를 찾아내기 위해 오랜 시일이 걸렸을 터인데, 내가 알고 있는 덕분에 바로 일에 뛰어들 수 있었다. 이게 다 원작소설을 아는 힘이었다.
레이몬드와 나는 나이트 워치의 숨겨진 아지트를 찾아갔다. 물론 분장을 하고서 말이다. 돈 많은 귀족인 척하기 위해서 아주 화려한 옷차림에 보석이 박힌 값비싼 액세서리를 주렁주렁 달았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쓴 커다란 모자도 보석으로 휘황찬란했다.
정보상을 운영하는 목적은 돈이므로 지불할 능력이 되는 고객을 환영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으니까.
이 모든 준비과정과 정보상의 설득은 내가 주관하겠노라고 미리 레이몬드에게 말해둔 상태였다. 그는 나의 예지력을 철저히 믿고 있었기에 군말 없이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에드워드 경의 일탈’ 앞에서 서성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자니, 우리를 발견한 문지기가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고는 말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부채로 입마저 가린 채 새침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레이몬드도 미행이 없나 주위를 살피고는 내 뒤를 따랐다.
이곳은 이름만 술집일 뿐 안은 텅 비어있었다. 어차피 뒷골목의 허름한 가게라 찾아오는 이들도 없으니 상관없겠지. 문지기의 안내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방 안에는 유일한 테이블이 덩그러니 놓였고, 덩치가 왜소한 사내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어서 오십시오. 여기로 앉으시지요.”
그는 일어서면서 앞의 의자를 향해 손짓했다. 예상보다 더 상냥하고 매너 있는 태도였다.
“그래, 귀족 나으리들께서는 이 누추한 곳까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정보상의 기본 중의 기본. 자신을 드러내기 전에 상대를 살핀다.
예의 바른 척 굴고 있지만 먼저 정체와 목적을 밝히라는 뜻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들은 우리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있었다.
페이스를 주도하려는가 본데 내 앞에서는 어림도 없지!
내게는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짠 작전이 있었다.
연기 모드 On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