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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64화 (64/125)

64화

몇 주 후, 프라레스 제국에는 건국제가 열렸다. 이는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였으므로 수도에 거주하는 귀족뿐 아니라 지방의 귀족들도 대거 참석한다고 했다.

그동안 레이몬드를 보지 못한 나는 건국제만을 목이 빠지라 기다렸다. 황족인 그가 참석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전부터 레이몬드에게 연락하려고 옥희를 여러 번 불러봤지만 도통 응답이 없었다. 코아에게 물어봐도 그녀로서도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걱정됐지만 새를 찾아 하늘을 뒤져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아마도 레이몬드를 따라서 영지에 따라간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건국제에 가기 위해서 나는 짙은 푸른색 드레스를 입었다. 그의 눈동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직접 고른 옷이었다. 치마 부분이 품이 아주 넓고 여러 겹의 굴곡이 져서 바다처럼 넘실대는 느낌을 살린 디자인이었다.

“에일린. 가자꾸나.”

“네.”

부모님과 함께 마차에 오른 후 공작 저를 벗어났다. 황성에 가까워질수록 어마어마한 인파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황제의 공식 약혼녀인 나는 당연히 기다리지 않고 곧장 문을 통과했다. VIP의 등장에 지방 귀족들의 부러워하는 시선들이 몰렸지만, 별로 기쁘지가 않았다.

“어머. 코웻 공녀님이셔.”

“정말 아름다우세요!”

홀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아는 척을 해왔다. 형식적인 미소를 머금고 의례적인 대답을 했지만, 의미 없는 지겨운 행위에 내 속은 공허하기만 했다.

“에일린. 같이 갈 테냐?”

“저는 여기에 있을게요. 두 분이 다녀오세요.”

“그래. 쉬고 있으렴.”

부모님은 본인들의 사교활동을 위해 홀 중앙으로 가셨다. 두 분은 서로가 파트너였기에, 파트너가 없는 나를 구석에 버려두고 훌훌 떠나셨다. 가신 김에 춤도 추고 오시겠지. 안 그래도 오랜만에 리듬에 몸을 맡길 생각에 무척 신나 하셨다.

의자에 앉자 빈 황좌가 눈에 들어왔다. 웬일인지 황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만사 재미없다는 듯 쿠키를 우적우적 씹어대고 있는데, 별안간 입구에서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들렸다. 대형 인사가 들어서면 자동으로 나오는 반응이었다. 또 누가 왔구나 싶어서 무심코 고개를 돌렸는데 그 순간 내 눈이 크게 뜨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제복 차림의 레이몬드가 홀로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보는 그는 멋있고 번쩍거렸다. 너무 눈이 부신 탓인지 내 양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혔다. 주인공처럼 많은 사람의 중앙에 있어 나를 보진 못하겠지만, 내가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울렁거렸다.

레이몬드에게 다가갈 수가 없구나.

그가 보고 싶어서 왔는데 만나지를 못하네.

매일 만나 친근했던 그가 아득하니 멀게만 느껴졌다.

너무 강한 자극을 받은 탓일까. 호흡이 가빠지면서 가슴이 답답해져 바람을 쐬고 싶었다. 나는 몰려있는 사람들이 피해서 테라스로 이동했다.

문을 열고 나오자 바깥 공기가 폐 속으로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시원한 바람은 가슴에 창을 연 듯 조금은 갑갑함을 해소해 주었다. 많은 시선에서 벗어났다는 점만으로도 한숨을 돌리기엔 충분했다.

“후. 살겠다.”

키 큰 나무들이 발 언저리에 닿을 듯이 솟아있었다. 머리 위에는 청명한 하늘이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바다처럼 파란색을 보자 레이몬드가 또다시 그리워졌다.

그런데 별안간 기척이 나더니 어깨를 툭 건드는 감각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반듯한 제복을 입은 레이몬드가 서 있었다.

“레…!”

나는 이름을 크게 부르려다가 입을 막으며 급히 소리를 줄였다. 근처에는 사람이 없었지만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나를 보는 레이몬드는 입가에 근사한 미소를 걸었다. 여전히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레이몬드.”

이번에는 그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얼굴에는 막 떠오른 태양처럼 환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흐음. 당분간 만나지 말자 하던 것 치고는 아주 반가워하는걸?”

레이몬드는 혼자 팔짱을 끼면서 능글능글하게 말했다. 비꼬는 것 같으면서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떻게 여기 들어왔어요? 보는 눈이 많았을 텐데.”

“문제없어. 부하들로 인간 벽을 만들어 시선을 교란했거든.”

“아.”

머릿속으로 장면을 상상을 하니 우스우면서도 반가웠다. 그의 부하들과도 자주 보면서 정이 쌓였던 터라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

“오늘 퍼먼트로 온 거예요?”

“그래.”

“그렇구나. 끝나면 영지로 돌아가겠네요.”

나는 그와 또다시 헤어질 것을 생각하면 벌써 염려스러웠다. 레이몬드와 함께 있는 순간이 너무 소중해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 발을 동동 구르는 심정이었으니까.

그런데 한 번 더 “그래.”라는 대답이 들릴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그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아니, 퍼먼트의 저택으로 아예 들어왔어. 앞으로는 공식적으로 수도에 머무를 생각이거든.”

“에? 영지로 돌아간 것 아니었어요?”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어. 에일린이 묻지 않아서 말하지 못했을 뿐이야.”

“그런…!”

실실 웃는 그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속았다는 생각에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생각해보니 내게는 따질 자격이 없었다. 대화를 회피한 건 바로 나였으니까.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시큰거리는 가슴에서 올라온 눈물을 끝에 매단 채 글썽거렸다. 붉어지는 내 눈가를 보자 레이몬드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에…일린.”

“미안해요. 엉엉.”

그는 내 눈물에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러더니 어찌 된 까닭인지 처연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에는 슬픔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역시 그런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레이몬드. 끄윽끄윽.”

“뭣?”

그리고 이어지는 내 말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별안간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핫하하하하.”

“……? 왜… 왜 웃어요?”

이번에는 내가 당황할 차례였다. 나는 눈물로 볼을 적시며 울고 있는데 저는 웃느라고 고개까지 뒤로 젖히다니 아주 얄미웠다. 양 볼을 부풀리며 뚱한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까 그가 웃음을 털어내며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에일린은 정말 귀엽군.”

레이몬드는 그렇게 말하며 내 옆 머리카락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다가 놓았다. 느릿한 그 행동이 꼭 팔을 매만지는 것 같이 간지러웠다.

“그럼 내게 줄 대답은 긍정이 되는 건가.”

그의 말에 내 얼굴은 더할 수 없이 빨개졌다. 자신의 연인이 되어달라는 명령이 상기되면서 쑥스럽고 낯간지러웠다. 차마 “네.”라고 말하지 못하고, 입을 여는 대신에 위로 올려다보며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고갯짓을 확인한 그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당장이라도 안아주고 싶지만 적진이니 이걸로 대신하지.”

레이몬드는 내게 손수건을 꺼내어 내밀었다. 이 세계에서는 여전히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문화가 건재한가 보다. 나는 한껏 추해졌을 내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얼른 그것을 받아들고서 눈물을 닦았다.

“고마워요.”

“천만에.”

감사 인사에 그가 씨익 웃었다.

어느 정도 진정하고 나자 우리는 차례로 테라스를 벗어났다. 레이몬드가 들어간 후 조금 있다가 내가 그 뒤를 따랐다. 홀에 도로 들어가자 구석 부근에 멜라스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눈이 딱 마주친 바람에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멜라스.”

“공녀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그는 따스한 눈길로 내게 목례를 했다. 그러더니 의아한 낯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조금 전에 웃음소리가 들리던데 혹시 대공 전하였나요?”

“아, 맞아요.”

짓궂었던 레이몬드의 행동이 떠오른 나는 또다시 부루퉁해졌다. 하지만 멜라스는 내 대답에 놀라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곧 평상시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렇군요. 그럼 공녀님, 나중에 또 뵙죠.”

“네. 잘 가요.”

대공의 부하와 친밀한 모습을 보이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으므로, 우리는 대화를 짧게 끝내고서 서둘러 멀어졌다.

나는 홀 내에 부모님의 행방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저 멀리서 짙은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한 여식이 레이몬드에게로 다가가는 게 보였다. 그 낯익은 얼굴은 헤레나 키튼이었다.

키튼 영애가 왜 대공한테 다가가는 거지?

거리가 있기에 또렷이 들리지는 않을 테지만, 최대한 귀를 쫑긋 세웠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에 뵈니 반가워요.”

옷자락을 붙잡고 허리를 숙이는 헤레나의 모습이 한 마리의 우아한 홍학 같았다. 항상 분홍색 드레스를 즐겨 입는 그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같은 계열로 멋을 부렸다.

“누구지?”

“저는 키튼 백작 가의 여식 헤레나 키튼입니다. 부모님께서도 대공 전하의 강경하신 모습에 기뻐하고 계세요. 제복 차림이 정말 멋있으시네요.”

헤레나는 입가를 가리며 수줍게 웃었다. 그러나 레이몬드는 시종일관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군. 그럼.”

“앗, 저기.”

그가 빠르게 지나치려 하자 헤레나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뭐지?”

경로를 방해받은 레이몬드의 미간이 한껏 구겨졌다. 그는 이 순간 악역다운 카리스마를 숨기지 않고 발산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차가운 눈빛에 헤레나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누가 봐도 맹수 앞의 초식동물 같아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대공 전하께서는 춤을 추지 않으시나요?”

“허. 귀족 가의 영애가 먼저 춤 신청을 하다니 별일이로군.”

용기를 짜낸 물음에 레이몬드는 헛웃음을 뱉어버렸다.

“춤은 추지 않아. 거절하지.”

그러고는 끝까지 냉담한 목소리를 내며 돌아섰다.

많은 사람의 시선이 쏠려있었기에 부끄러울 만도 했지만, 헤레나는 조금 당황했을 뿐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주먹을 꾹 쥔 채로 자리를 떴다.

키튼 영애는 무엇을 결심한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눈에 티가 들어간 것처럼 내게 거슬렸다. 또 가슴은 불이 인 듯이 뜨거워졌다.

모두 다 태워버릴 것 같은 이 감정은 대체 뭐람?

어쩐지 거절당한 상대보다 더 당혹스러워진 나는 아랫입술을 꾹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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