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아니, 아가씨.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코아와 공작 저로 돌아온 나는 한참 동안 클레어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호위와 같이 갔으니 심하게 걱정을 한 건 아니지만, 내 갑작스러운 외출이 당황스러울 법도 했으니까. 이후 공부 스케줄이 모조리 펑크가 난 것도 한몫했다.
클레어가 알게 된 이상 부모님께 말이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힐스 마을에다가 지원금을 보낸다고 했다. 내 어머니지만 정말이지 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다음부터는 무작정 달려가기보다는 집사님께 지원을 요청하렴. 우리에게는 네 안전이 가장 중요하니까.”
“네. 명심할게요.”
걱정 어린 말씀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이 모든 일이 중요치 않았다. 다른 것들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어 모든 것을 튕겨내고 있었으니까.
키스.
아드리엔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며 놀렸을 땐 레이몬드는 결백을 주장하듯 내게 입을 맞추었고. 두 번째는 어떻게 알았는지 내 치유력이 담긴 침을 직접 빨아갔지.
이 두 번의 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역시 결론은 한 가지밖에 도출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원한다.
왜 원하지? 그야 좋아하니까? 세상에. 내 최애가 나를 좋아한다고?
이게 사실이야? 미쳤어, 미쳤어!!!
방안에 혼자 있던 나는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 급기야 호흡곤란을 일으켰다. 진정하려고 심호흡을 하며 이성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최애와의 사랑이라니….
물론 상상 속에서야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손주까지 다 봤지만 실제로 그러는 건 완전히 결이 다른 일이었다. 상상이 현실이 되면 고려해야 할 게 많으니까.
레이몬드와 연인이 된다면 당연히 좋다. 좋지. 너무너무 좋은데. 그런데 그래도 되는 걸까?
나는 아직 황제의 약혼녀인데. 어쩌면 영원히 그럴지도 모르는데….
기뻤던 마음 한편에서 씁쓸함이 배어 나왔다.
그런 생각이 드는 바람에 또다시 다가온 레이몬드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아버린 거였다.
어떤 이름으로도 확정되지 못한 사이니까.
하지만 그런 염려와는 별개로 가슴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빙의를 한 후 지금까지 그를 위하는 마음 하나로 달려온 시간이었다. 덕후인 나는 그를 향한 사랑이라면 그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화답한 레이몬드의 마음이 고맙고 소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와 나누었던 입맞춤은 자꾸만 머릿속에서 리플레이가 되었다.
어후. 오늘 잠은 다 잤네.
괜히 [황홀한 낙원의 밤] 책 내용까지 떠오르면서 얼굴이 후끈후끈했다.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올리고 눈을 꽉 감았다. 어서 잠들어라, 잠들어라 주문을 외면서….
그러나 결국 잠이 드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눈 밑에는 시커먼 그늘이 졌는데 워낙 피부가 새하얀 에일린이었기에 티가 좀 많이 났다.
“어머. 아가씨! 어째. 얼굴 좀 봐.”
아침에 방으로 들어와 커튼을 걷은 클레어는 내 얼굴을 보자 깜짝 놀랐다.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어제 힐스에 가서 돕느라 힘드셨나 보다.”
“아하하. 그런가.”
“오늘은 좀 쉬세요. 스케줄은 최소한으로 줄여놓을게요.”
“고마워. 클레어.”
꽤 심각해 보였는지 클레어는 좀처럼 건들지 않는 스케줄을 먼저 조정해주었다.
나는 잘되었다 싶어서 일어나려다 말고 도로 침대에 엎드렸다.
밤을 새우고 나면 이상하게도 밤새 죽어도 들지 않던 잠이 아침에야 쏟아졌다. 나는 볼을 이불에 붙인 채로 그제야 곯아떨어졌다.
***
눈을 뜨니 오후였다.
아주 늦은 식사를 하고 정신을 차리자 훌쩍 저녁이 되고 또 밤이 되었다.
원래 예정이었던 수업들은 다 취소했다고 클레어가 뒤늦게 전해주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그녀가 푹 쉬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떠났다.
나는 말 없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달빛이 밝아 정원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문득 달이 구름에 가려져 빛이 모조리 사라지고 어둠이 잠식하는 그때, 멀리서 맹금류의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옥, 옥, 옥.”
침대 맡에 멍하니 앉아 깊은 밤이 오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이 소리는, 옥희 아니야?
“옥, 옥, 옥.”
역시나 이번에는 아주 가까이서 들렸다. 이불을 거두고 테라스로 가보니 옥희가 동그란 눈을 빛내며 앉아있었다. 어서 유리문을 열어 방 안으로 들였다.
“어서 와. 옥희야. 무슨 일이야?”
“옥 옥.”
“그냥 놀러 온 거야?”
전령사인 옥희는 주로 중요한 일을 전해주러 오니까 녀석의 방문은 상당히 긴장이 되었다. 특히 레이몬드가 다쳤을 때 두 번이나 나를 부르러 왔던 터라 더 그랬다.
하지만 오늘의 옥희는 그저 여유로워 보였다. 그 태도에 안심을 하려는 찰나, 녀석의 다리에 묶인 쪽지가 보였다.
“어, 쪽지네? 이걸 전해주러 왔구나.”
“옥옥.”
나는 옥희에게 물과 해바라기 씨를 마련해준 후에 쪽지를 확인했다.
레이몬드의 메시지였다.
거기에는 시간과 장소가 적혀있었고,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날짜는 오늘이었다.
“헛. 30분 남았네.”
무슨 중요한 할 말이 있는 걸까?
나는 활동복으로 갈아입어 나갈 채비를 마친 후에 코아와 함께 공작 저를 빠져나갔다.
우리의 발길이 향한 곳은 동쪽 숲이었다. 달빛이 환했지만 구름 또한 많아서 숨어서 움직이기엔 더없이 알맞은 날이었다.
숲은 들어서면 다 비슷비슷해 보였는데 정확한 위치는 코아가 알았다. 이럴 때 보면 대공의 사람을 수족으로 둔 것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
약속장소에 다다르자 저 멀리 레이몬드의 모습이 보였다. 코아는 나를 바래다주고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처음 와본 그곳은 숲속에 자리한 호수였다. 투명한 물은 아주 고요했고 달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에일린. 어서 와.”
내 모습을 발견한 그가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나는 어쩐지 어색하여 괜스레 호수로 눈길을 주었다.
“와, 이런 장소가 다 있었네요. 근사해요!”
내가 호수를 향해 감탄할 때에도 레이몬드의 시선은 온전히 내게로 꽂혀있는 게 느껴졌다. 눈이 마주치기가 두려울 만큼 이글거리는 시선이었다. 옆얼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기에 잘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눈을 피하고 있었는데 그가 나의 의도를 눈치챈 것 같았다.
“잠깐 나 좀 볼까?”
레이몬드는 훌쩍 다가오더니 내 얼굴을 붙잡았다. 회피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우리는 서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게 되었다. 마주친 그의 푸른 눈동자는 시원할 것 같은 색감과는 달리 화염 같은 뜨거움을 담고 있었다.
아예 대놓고 잡히자 눈을 피할 길이 막혀버렸다. 타오르는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녹아버릴 것만 같은 감각이 전해졌다.
레이몬드는 일자로 다문 입술을 떼어냈다.
“에일린. 나는 이제.”
“….”
“그대가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
“…네?”
어후 깜짝이야.
이렇게 갑자기 치고 들어오다니 반칙이야.
그런 잘생긴 얼굴로 말을 하면 내가 흔들릴 수밖에 없잖아….
나는 레이몬드의 말에 긴장했는지 침을 대놓고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 매의 눈은 그것조차 놓치지 않았다.
“본인이 삼켜버리다니 이거 아까운걸. 무척 탐이 났는데.”
욕망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그 말에 나는 남아있는 침도 마저 삼켰다.
가까워진 우리 사이에는 잠시간 침묵이 감돌았다. 지치지 않고 타오르던 푸른 불꽃이 입술로 옮겨가 열렸다. 레이몬드는 푸른 태양과 같은 눈동자로 나에게 단단히 요구했다.
“나의 연인이 되어줘. 에일린.”
세상에서 가장 설레는 명령. 어쩌면 꿈에서 여러 번 꾸었을 듯한 그런 장면이었다.
숲에 부는 바람이 내 심장까지 파고들었나 보다. 그게 아니면 가슴이 이렇게 간질간질할 리가 없으니까.
홀린 듯이 멍하니 있던 나는 겨우 정신이 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이런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밤새도록 머릿속으로 연습했건만 다 헛방이었다. 막상 직접 듣자 혼란스러움이 훨씬 컸던 것이다.
나는 정돈되지 않은 말의 파편들만 겨우 뱉어내었다.
“새… 생각…할 시간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건가? 얼마나?”
“당분간요….”
“그렇군.”
당황하여 말을 더듬는 데도 그는 차분히 묻고 대답을 기다렸다. 명령조와는 상반되게 내 뜻을 충분히 기다려줄 모양이었다.
나는 그가 얼굴을 놓아주자마자 잽싸게 뒤돌아섰다. 그러자 등으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일린.”
“?”
“나는 힐스를 떠날 거다.”
“힐스를요?”
“그래. 옥희를 통해 연락을 줘. 기다릴 테니까.”
레이몬드의 말끝이 흐렸다. 간절함이 배어 나오는 듯한 그 음성에 나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그대로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서둘러 움직이던 다리는 어느새 숲길을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다행히도 코아가 따라붙는 기척만 느껴질 뿐 더 이상 레이몬드는 없었다.
그리고 나의 안심이 자책으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황스러움에 대답을 미루었건만 그건 정말이지 스스로에 대한 기만이었다.
문제를 일으킨 부분은 이거였다. ‘덕후가 최애 없이 어떻게 살아?’
이 당연한 진리를 간과하다니. 레이몬드를 안 보고 어찌 지내려고 시간을 요구했던 걸까. 너무나 터무니없는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왜 그랬니. 어리석은 나야.
거의 매일 보다시피 하던 레이몬드를 안 보니까 보고 싶어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굿즈로 가지고 있던 벚꽃 그림으로 때우는 것도 한두 번이지 실물에 비견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레이몬드가 그랬나. 안 보이면 미치겠다고.
사랑은 타이밍이고,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지.
나는 3일 만에 그에게 연락하기 위해 테라스로 나가 옥희를 불렀다. 그러나 이 깊은 밤 야속하게도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