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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62화 (62/125)

62화

치솟는 불길 속에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건물을 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코… 코아. 어쩌지….”

“이미 빠져나오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와 주변을 둘러보며 찾아보시죠.”

“그…렇겠지?”

그 말에 희망을 품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코아가 내민 손을 붙잡고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강한 힘이 몸을 한 번에 쑥 끌어 올렸다. 고개를 돌려보자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레이몬드!”

“에일린. 불타는 건물 가까이에 있으면 위험해.”

그가 완전히 일으켜주고 나자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무사했군요!”

“물론이지. 뭐야? 그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을 본 것 같은 반응은?”

농담을 던지며 웃는 레이몬드는 그을음이 얼굴에 약간 묻어있을 뿐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 순간 코가 시큰해졌다. 마음이 지옥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온 탓이었다.

“레이몬드가 어떻게 된 줄 알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크헝엉엉.”

불타고 있는 아지트를 가리킨 나는 울음을 터트리며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돌진한 내 몸에 상체가 흔들린 레이몬드는 “어이쿠.” 소리를 내더니 팔로 내 어깨를 감싸주었다.

“에일린이 많이 놀랐구나.”

“맞아. 많이 놀랐어. 으허어엉.”

다 큰 처자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 덕에 레이몬드의 상의가 축축이 젖어 들어갔다. 그는 귀찮을 텐데도 내 어깨를 두드리며 울음이 그칠 때까지 나를 위로했다.

“좀 괜찮나?”

“네. 훌쩍.”

눈물이 잦아들자 레이몬드는 내 턱을 들고 얼굴 상태를 살폈다.

“괜찮은 것 같네. 그럼 어서 나랑 가지. 할 일이 아주 많으니까.”

“네. 알겠어요.”

그의 말대로다. 힐스에는 당장 도움의 손길이 시급했기에 눈물을 닦고 서둘러 움직이기로 했다.

마을 중앙으로 이동하자, 사람들은 우물에서부터 불이 난 건물까지 한 줄로 쭉 늘어서 있었다. 한 사람이 양동이로 우물물을 가득 퍼 올리면 옆 사람에게 전달하고 또 전달해서 건물에 물을 쏟아부었다.

아주 효율적이진 않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레이몬드가 말한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적어도 불이 더 퍼져나가지 않게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레이몬드도 그 대열에 끼여서 몸을 움직였다. 한참을 돕고 있으려니 잠시 후 마을 저쪽에서부터 환호성이 들려왔다. 콸콸콸 물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드디어 도움의 손길이 당도했나 보다.

이윽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로브를 입은 여섯 명의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은 불타고 있는 건물 앞으로 몰려가더니 다 같이 손을 들어 올렸다. 입으로 뭐라고 중얼거리자, 마른하늘에서 폭포가 쏟아지더니 건물을 흠뻑 적셨다. 시커멓게 그을린 형체만 남긴 채 넘실대던 화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와! 됐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곳에서도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소방시설이 없는 곳에서는 불이 나면 아주 위험천만했다. 특히나 목조건물이 대부분이라 불에 더욱 잘 타 돌이키기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이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지고하신 마법사들은 높은 사람들과만 소통을 하니까.

과연 그들을 부른 것은 대공이었는지, 에반이 마법사들을 이끌고 레이몬드에게로 걸어왔다.

“대공 전하.”

마법사들은 그를 보며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그 깍듯한 모습에 주변의 시선들이 모조리 쏠렸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뭣. 대공 전하라니?”

“참말인가?”

마을을 구한 영웅들이 고개를 숙이는 것도 모자라, 대공 전하라고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모양이었다. 평민들은 평생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든 황족이 같은 마을에서 말을 섞고 살았던 청년이라니. 사람들은 그 사실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들이었다.

“때맞춰 잘 와주었군. 수고했어.”

“예? 예.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을요.”

대공이 다정한 목소리로 노고에 감사를 표하자, 마법사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대공과 거리가 멀어지자마자, “저분이 그 무서운 대공 전하 맞아?”, “나도 깜짝 놀랐어. 감사 인사를 하다니.”라며 자기네들끼리 숙덕거렸다.

레이몬드는 원래 상냥하지 않나?

그러고 보니 원작소설에서는 악역인 만큼 주로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글로만 보던 대공을 항상 직접 마주하다 보니 원작에서의 기억도, 이미지도 많이 흐려졌다.

두 시간을 고생한 끝에 불이 다 꺼졌고, 소란하던 마을은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하지만 다친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대부분이 가벼운 화상과 찰과상이었지만, 걔 중에는 많이 다친 경우도 있었다. 마을 의사들이 치료를 했음에도 한계가 있었다.

“황제가 손을 써둔 바람에 사제와 힐러들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바깥에서 알아보고 왔던 에반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 세계에서는 일반 마법사보다 훨씬 귀한 것이 치유 마법사였다. 치유력이 있는 자들은 대부분이 신전소속이고, 신전은 프라레스 제국의 황실에서 꽉 잡고 있었다. 아주 소수의 인원만이 떠돌이 힐러로 남아 있었지만 그들은 찾아내는 게 더 어려웠다.

이제는 내가 나설 차례라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저기, 멜라스는 어디에 있어요?”

“전 여기에 있습니다. 공녀님.”

내 목소리가 들렸는지 멜라스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듯했다. 우리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레이몬드. 저 잠깐만 다녀올게요.”

나는 멜라스의 팔을 붙잡고서 그가 안내하는 장소로 이동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등이 데일 것 같이 뜨거웠다. 아직 꺼지지 않은 불이 남아있나?

의아하여 뒤를 돌아보니 레이몬드가 웃는 낯으로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후미진 위치의 우물가로 간 나는 멜라스가 구해온 빈 병을 잔뜩 모아서 포션을 만들었다. 그 과정을 지켜보던 멜라스는 “호오. 이렇게 하다니.” 하며 연신 감탄을 해댔다. 상당히 민망했지만, 그가 하도 대단하다며 띄워주는 바람에 끝까지 꿋꿋이 해내었다. 그 결과 포션은 서른 병 정도가 완성되었다.

“이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예?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포션이다.”

“헉. 어찌 이리도 많나요?”

멜라스는 그것을 가져다가 부하들을 시켜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대공 무리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은인으로 등극했다.

전신에 화상을 입은 사람에게 포션을 뿌리자, 당장 아기 같은 새살이 돋아난 것이다.

“기… 기적이다!”

“아이고.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는 감동으로 인해 마을 곳곳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집이 다 타버린 사람들도 있었지만 건강한 몸만 있다면 건물쯤이야 다시 지을 수 있으니까.

기뻐하는 사람들의 함성을 들으며 나는 뿌듯한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염려스러운 마음도 함께 피어올랐다. 레이몬드에게는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여태까지 그는 이 광경들을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 많은 포션이 다 어디서 났냐며 묻지 않아서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조용한 반응이 더 두렵기도 했다.

“에일린. 이제 갈까.”

마을이 얼추 다 정리되고 나자, 레이몬드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기존에 있던 아지트가 모조리 불에 탔으니 또 다른 아지트로 향해야 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비슷한 형태의 술집이 또 하나 있었다.

우리는 한 작은 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미니 테이블과 2인용 소파만 덩그러니 있었기에 나란히 앉아야 했다.

“고생했어. 모두 에일린 덕이야. 덕분에 마을이 안정을 되찾았어.”

“아녜요. 레이몬드 덕분이죠. 마법사들을 불러와서 불을 껐잖아요.”

“아니야. 그대의 ‘치유력’ 덕분이지.”

그 순간 레이몬드의 입술에서 나온 말에 내 눈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는 이미 확신을 하고서 말을 꺼낸 듯했다. 마주친 눈동자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으니까.

“어…떻게 알았어요? 멜라스가 말하던가요?”

물러설 곳이 없으니 진실을 담아야 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그가 조용히 되물었다.

“멜라스는 이미 알고 있나?”

반응을 보아하니 출처가 멜라스가 아니라는 건데 그럼 대체 어떻게 알아챈 거지? 그러다 문득 짚이는 게 하나 있었다.

“앗, 설마 그때 의식을 차렸나요? 제가 레이몬드를 직접 치료할 때요.”

“직접 치료라. 에일린이 날 어떻게 치료한 거지?”

“그… 그야….”

어쩐지 내 입장이 아주 곤란해졌다. 내 무덤을 내가 판 것 같은데.

그 일이 아니면 알아챌 경로가 없으니 맞을 듯한데, 어째서 대답을 추궁당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내게는 비장의 단어가 있다. 내가 한 것은 스킨십이 아니라 치료 행위였으니까!

“인공호흡?”

“키스로군.”

나의 에두른 대답을 레이몬드는 굳이 정확하게 콕 짚었다.

아니야, 키스가 아니라 인공호흡이라고!

물론 혀로 입안을 헤집으며 조금 문지르기는 했지만….

“에일린이 날 고친 게 맞았군. 그 입술로 말이야.”

“아.”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지난번에 레이몬드의 기습키스로 어색하게 헤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기억의 소환으로 인해 내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

거기다가 레이몬드가 내 팔을 잡아당겨 품에 끌어안는 바람에, 양 볼이 더욱 뜨거워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의식에서 깨고 나서 그 감촉이 어찌나 그립던지. 애가 닳아 미치는 줄 알았어.”

“아….”

“그래. 그렇게 가만히 있으라고. 나도 치료가 필요하니까 말이야.”

내 뒷머리를 쓰다듬듯이 붙잡은 그는 벌어진 입술 틈을 노렸다. 부드럽게 닿은 감촉에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그는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당기고 또 당겨서 멀어지지 못하게 꽉 붙들었다.

숨을 내쉴 여유를 찾지 못할 만큼 몰아치자 호흡이 절로 가빠졌다. 허둥거리는 나를 인지했는지,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레이몬드의 입술이 멀어졌다.

“괜찮나?”

“하아하아. 네.”

나는 천금과 같이 얻은 틈으로 숨을 가누었다. 그러자 그는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리며 내 옆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그 손길이 아주 다정하고 상냥했다.

“과연 에일린의 치유력이 대단한데.”

“네?”

“아까 연기를 꽤 마셔서 말이야. 가슴이 답답했는데 아주 시원해졌어.”

“그랬구나. 다행이에요.”

“그럼 조금 더 시원해져 볼까.”

레이몬드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바짝 붙였다. 하지만 나는 재차 다가온 입술을 잽싸게 손으로 막았다.

“치료는 여기까지만요.”

“….”

그의 푸른 눈동자에 못마땅한 빛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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