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뽀뽀? 입맞춤? 혹시 이게 바로 키스인가?
전생에서 단 한 번도 키스를 해보지 못했던 나였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키스를 하면 눈을 감아야 한다는데, 그런 기본적인 과정조차 생각 못 할 만큼 놀라 있었다.
코끝이 자꾸 스치는 걸 보니 콧대가 아주 높구나.
속눈썹이 길고 풍성해.
가까이서 보아도 피부에서 윤기가 흐르는걸.
찰나의 순간에도 이런 감상들만이 줄줄 떠올랐다.
뼛속까지 덕후 아니랄까 봐, 키스를 하는 순간에도 눈은 시신경을 통해 최애의 정보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3, 4초쯤 흘렀을까?
입술이 떨어지면서 레이몬드의 얼굴이 도로 멀어졌다. 열이 오른 그의 얼굴은 볼에서부터 귀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에일린.”
내 이름을 담은 입술이 더 없이 관능적으로 보였다.
멍하니 그를 보고 있던 나는 뒤늦게 열이 올랐다. 볼이 불에 덴 듯 화끈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우리는 잔뜩 상기된 채 몇 초간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고요한 실내에는 서로의 숨소리만이 남았다. 조금 전의 밀착이 현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듯이 떨어지자마자 남처럼 어색해져 버렸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뚫어질 듯이 보고 있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어. 그… 늦었으니까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는 낮에 만나요.”
“그러지.”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몸을 일으키자 팔을 붙들고 있던 레이몬드의 손에서 힘이 스르륵 풀렸다.
그 틈에 나는 후다닥 방을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심장은 큰 북처럼 쿵쾅대며 리듬을 연주해대고 있었다.
***
“후….”
에일린이 나가고 나자, 혼자 남은 레이몬드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빨라진 심장박동을 원래대로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
달구경을 하려고 나란히 앉은 게 잘못이었을까.
가까이에 붙어 앉은 에일린에게서는 매혹적인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최근에 안 그래도 입술에 집착적으로 끌린 터라 더욱 참기가 어려웠다.
꽃내음에 취한 나비처럼 다가간 그는 에일린의 붉은 앵두에 제 입술을 맞추었다. 꿈에서도 그리던 촉촉하고 부드러운, 바로 그 감각이었다. 신데렐라가 발에 딱 맞는 유리구두를 찾은 것처럼 입술이 제자리를 찾은 듯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이 황홀하여 별이 반짝거렸다.
이윽고 키스가 끝나자, 어색해져 버린 분위기에 그녀는 곧장 공작 저로 떠났다.
마음 같아서는 가지 못하게 꼭 붙들어 안고서 밤새 끼고 있고 싶었지만 바람은 바람일 뿐. 많이 당황했을 그녀를 놓아줘야만 했다.
마음 한쪽이 텅 비어져 쓸쓸해진 레이몬드는 테이블에 올려진 책을 붙잡아 올렸다. 에일린이 그도 읽으라며 주고 간 선물이었다. 그런데 그만 날카로운 종이의 단면에 손끝이 베이고 말았다.
핏.
살결이 일직선으로 갈라지며 피가 맺혔다. 그러자 레이몬드는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예전에 피가 났을 때 에일린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행동이 생각나 무의식적으로 따라한 것이다.
그런데 손가락을 떼어내자 따가운 감각도, 상처의 흔적도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멀쩡해진 손가락 끝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별안간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
시일이 지나자, 황제는 사람을 시켜서 대공의 상태를 확인하도록 했다.
대공은 조심스러운 몸가짐으로 아지트의 구체적인 위치를 철저히 감추었다. 게다가 마을 곳곳에 숨어있는 그의 세력 때문에 미행은커녕 접근조차 불가능했다.
그래서 지시를 받은 남자는 며칠간 마을 주변만 서성이다가 결국 마을 밖으로 나온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저기, 실례지만 말씀 좀 묻겠습니다.”
“뭐요?”
때마침 인상 좋아 보이는 여인네들 세 명을 발견했다.
남자는 대공의 생김새에 대해 묘사와 설명을 곁들이며 그를 아는지 물었다. 황제와 같은 핏줄인 만큼 아무리 감추더라도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외모였기에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아아! 키가 아주 크고 잘 생기고 잘 웃는 그 청년 말이구만.”
역시나 알아차린 여인네들이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어딘가 이해가 가지 않는 표현이 있었다.
‘잘 웃는…?’
과연 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게 맞나?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여인들이 다음 말을 종용했다.
“누군지 아는데 그 사람은 왜요?”
“아. 혹시 최근에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럼요. 요즘도 마을에 잘 돌아다니는데.”
당연한 듯한 대답에 남자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네? 잘 다닌다고요? 그게 언제입니까?”
“어제요. 멀쩡히 돌아다니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지.”
“나도 봤어. 오랜만에 봤는데 얼굴이 아주 반질반질하더라고.”
여인들은 다 같이 떠들어대면서 대공의 외모에 대한 찬사를 쏟아내었다. 그 이야기는 들을수록 대공이 맞는다는 확신과 더불어 그의 상태가 아주 멀쩡하다는 믿기 힘든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남자는 인사를 한 후에 여인들의 무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이 소식은 곧장 황제에게 전해졌다. 황제의 호통이 소환령에 꽁지 빠지게 달려온 시종장에게 직격타로 떨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제국의 태양을 뵙….”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시종장이 잔뜩 움츠린 채로 알현실로 들어서자마자 카일은 짜증 가득한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불호령에 바닥에 엎드린 시종장의 몸이 벌벌 떨렸다.
“그… 그게… 신관들과 힐러들에게는 제대로 엄포를 놓았습니다. 다시 알아봤지만 그 누구도 대공에게로 간 흔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건재한 이유를 도통 모르겠습니다.”
시종장은 벌벌 떨면서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눈동자만 도륵도륵 굴렸다.
“모른다라?”
“예… 예.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과연, 내 명령을 이행하는 자가 입에서 낼 수 있는 말인가?”
채앵.
장검이 검집을 빠져나오면서 내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렸다. 시종장은 고막을 긁는 쇳소리에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모르는 것은 중죄지. 실패의 대가는 목숨으로 갚는 것이고.”
카일이 느른한 목소리로 말을 읊으며 걸음을 옮겼다. 검 끝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시종장에게로 점점 가까워져 갔다.
그는 심장이 쿵쾅거리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들어갔다. 머릿속에서는 경보음이 미친 듯이 울어 재끼고 있었다.
황제는 진짜로 돌아버렸구나. 이대로 있다간 개죽음을 당하고 만다.
그렇게 결론이 서자, 시종장은 살기 위한 발악을 시작했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삶에 대한 본능만이 온몸을 지배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폐하!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반드시 대공에게 치명타를 입히겠습니다!”
“네가? 무슨 수로?”
카일은 그 순간 제자리에 멈춰 섰다.
황제가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구나!
시종장은 이것이 목숨을 구할 기회다 싶어서 얼른 말을 이었다.
“제가 반드시 대공의 아지트를 찾아내어 불태우겠습니다.”
“허. 특임대도 못 찾는 레이몬드의 아지트를 뭔 수로 찾아? 이놈이 살려고 내 앞에서 잔꾀를 부리는구나.”
“마… 만약 못 찾는다면 마을 전체에 불이라도 지르겠습니다.”
“오호라. 그것 괜찮은데?”
카일은 그의 말에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방법이었다.
“좋다. 네게 만회할 마지막 기회를 주지.”
“가… 감사합니다. 폐하.”
시종장은 아래에 남은 공간이 없는데도 더욱 허리를 낮췄다. 구사일생의 기회를 반드시 성사시키리라고 다짐하면서.
***
“수고하셨습니다. 공녀님.”
“안녕히 가세요.”
수업을 마친 나는 방을 나서는 선생님께 인사를 드린 후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려운 숙제를 받은 터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었다. 잠시 후 클레어가 찻잔을 치우러 들어와서는 우려 섞인 목소리로 혀를 찼다. 범상치 않은 투로 중얼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우. 난리네 난리야.”
“클레어. 무슨 일인데?”
“아가씨 말도 마세요. 저쪽 힐스 마을에 큰불이 났다지 뭐예요. 지금 불 끄느라 한바탕 난리가 났어요.”
“뭐?”
나는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손에 쥐어져 있던 책과 필기도구가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힐스면 레이몬드의 아지트가 있는 곳이잖아!
잽싸게 유리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가 보았다. 멀리 피어오르는 연기가 맑은 하늘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다친 건 아닐까? 혹시나 하는 가정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 잠시 나갔다 올게!”
“네? 아가씨? 갑자기 어딜 가신다는 거예요? 설마 힐스 마을에요?”
나는 클레어의 절박한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복도를 뛰었다. 내 움직임을 포착한 코아가 옆으로 와 속도를 맞추었다.
“힐스로 가요. 마을에 불이 났대요. 말을 타는 게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우리는 당장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코아가 말을 꺼내어 올라탔고 나는 뒤에 타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따로 말하지 않아도 내 다급한 마음을 알았는지 코아는 말을 빠르게 몰아 내달렸다.
마을이 가까워질수록 대기를 찢는 사람들의 비명 또한 점점 가까워졌다.
화르륵. 화르르륵.
도착해서 본 마을은 붉은 화염에 의해 잡아먹힐 듯이 위협받고 있었다. 불은 한 곳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지, 여기저기 떨어진 집들이 동시에 타오르는 중이었다.
누군가 고의로 불을 지른 것이 분명해.
그것이 누구인지, 무엇이 목적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불길한 생각이 차올랐다.
“아지트로 가요.”
나의 부탁에 코아가 방향을 그쪽으로 틀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공의 아지트 또한 화염에 휩싸여있었다. 검은 연기가 승리를 자축하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랐다.
그 광경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코아의 도움으로 말에서 내린 나는, 이미 반쯤 다 타버린 건물을 보며 망연자실해졌다.
레… 레이몬드는 어디에 있는 거지? 설마 안에 있는 건 아니겠지?
목조건물은 이미 바닥이 다 무너져 내렸기에 구하러 들어간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그만 땅에 풀썩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