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나는 멜라스를 찾았다. 그에게 긴히 전할 아주 중요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밖에 선 부하를 통해 뜻을 전하자, 방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그가 복도로 나왔다.
“공녀님. 저를 찾으셨다고요.”
“멜라스, 있잖아요.”
멜라스가 의문이 깃든 눈동자로 묻자, 조금은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황홀한 낙원의 밤]이요. 다 보려면 얼마나 남으셨어요?
“예? 그게 무엇이죠?”
“레이몬드의 방 책장에 있던 책이요. 멜라스 거라고 하더라고요. 다 보고 나면 빌리고 싶어서요.”
“아….”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면서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그리고는 “아!”하는 깨달음과 함께 탄성을 내뱉었다.
“혹시 그 빨간 표지?”
“네. 그거요!”
“그 책은 대공 전하의 것인데요. 저희는 손도 못 대게 하십니다.”
“네?”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한참 동안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거 아무래도 내가 레이몬드한테 속은 것 같지?
자기 것이면서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거구나.
“그렇군요. 알겠어요.”
그렇게 나온다면 내게도 다 방법이 있지.
오늘은 여기까지. 나는 일단은 순순히 물러나는 쪽을 택했다.
***
에일린과 코아를 배웅하고 나서 집무실로 돌아온 멜라스가 책상에 앉자,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그의 화답에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부하들이었다. 무슨 일이길래 단체로 우르르 온 걸까. 모두의 굳어진 표정으로 보아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멜라스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드류가 먼저 나서서 말문을 열었다. 멜라스는 의자에 앉아 그들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말을 해도 좋다는 허락의 의미였다.
“대공 전하는 이대로 괜찮으신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드류의 말에 멜라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부하들이 나서서 말을 보탰다.
“코웻 공녀님은 황제의 약혼녀잖아요. 수시로 황성에 불려간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전하께서 가까이 두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잘못된 길을 가시는 게 아닌가 염려가 됩니다.”
“멜라스 님도 보셔서 아시지 않습니까. 공녀님과 함께하면서 전하께서 변하신 것을요.”
안다. 알고말고.
대공은 처음엔 코웻 공녀와 협력 관계였지만 서서히 그녀에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자신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그런 모습이 부하들도 눈치챌 만큼 두드러졌다.
특히나 아까는 깜짝 놀랐다. 공녀를 보자마자 태양처럼 환해지는 대공의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대공과 함께한 세월이 벌써 8년, 그런 그에게서 난생처음 보는 미소였다. 성인이 된 후로는 늘 붙어 지냈으니 적지 않은 기간임이 분명했다.
그러니 확신할 수 있었다. 대공이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아직 본인은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멜라스는 입을 닫았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부하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섣부른 판단은 말아라. 공녀께도 사정이 있으실 테니.”
“그 사정이 무엇입니까.”
“그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봐라. 전하를 이렇게 돕고 있잖느냐. 예전에 간자였던 카르고의 일도 그렇고, 이번에도 공녀님이 가져오신 포션이 아니었으면 전하께서는 깨어나지 못하셨을 거다.”
쉽게 먹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부하들의 반박이 거세었다.
“포션 말입니까. 그건 고맙긴 하지만 미끼일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 귀한 걸 어디서 계속 구해오는 걸까요. 출처가 황제일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일리가 있는 추측이었다.
실제로 포션의 존재란 귀족 가에 한 병 있을까 말까 한 것이니까. 마탑과 연이 닿아있지 않는 한 말이다. 당연하게도 마탑과의 연줄은 황제 정도는 되어야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것이었다.
에일린과의 약속 때문에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멜라스는 말문이 막혔다. 여기서 무엇을 확언하기보다는 겉으로나마 달래는 쪽을 택해야 했다.
“그래. 너희들의 말이 맞다. 하지만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 당분간은 경계하면서 지켜보도록 하지. 대공 전하께는 기회를 봐서 말씀드려보겠다.”
“…알겠습니다.”
그의 말에 부하들은 마지못해 납득하며 돌아서 나갔다.
다시 혼자가 되자 멜라스는 책상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그 역시도 처음에는 의문투성이였다. 도움을 받는 순간에도 공녀의 의도를 의심했으니까. 하지만 도움이 쌓여가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태도와 눈빛이 그에겐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도 여인을 사랑해본 적이 있는 남자다. 상대를 아끼는 마음이 깃든 눈빛, 그것이 대공을 바라보는 공녀의 눈동자에 선명히 새겨져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를 믿어보았노라고 말한다면 너무 무르다고 비난받을까?
그러나 불안정한 신뢰도 어제부로 끝이었다. 치유의 포션, 그것의 원천이 공녀의 몸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또한 그녀는 대공을 고치기 위해서 애를 썼고, 인공호흡을 가장한 키스까지 했다. 부하들이 이 모든 사실을 안다면 의심을 거둘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들었다.
하지만 부하들의 염려도 염려였다. 공녀의 진심이야 어찌 되었든 그녀의 대외적인 위치가 황제의 약혼녀인 건 사실이니까.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대공 전하.
어려운 과제를 떠안은 멜라스의 가슴이 닻을 단 듯 무거워졌다.
***
나에게는 원대한 작전이 있었다.
이 작전의 목적은 바로 [황홀한 낙원의 밤]을 빌려내는 것!
아지트에 도착한 나는 노크와 함께 방문을 열고 들어갔고, 때마침 대공은 그 책을 보고 있었다. 어찌나 빠져들었는지 사람이 방에 들어온 줄도 몰랐다.
책을 읽던 그는 붉어진 얼굴로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책 읽을 때의 버릇인가? 나는 놀라게 해 줄 심산으로 가까이 다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레이몬드!”
“에… 에일린.”
예상대로 레이몬드는 깜짝 놀라며 책을 덮었다.
“책을 읽고 있었나 봐요?”
“그… 그래.”
그는 어찌나 당황했던지 식은땀까지 흘렸다. 조금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런 모습마저 귀여웠다.
“어떤 책인지… 어? 이건 멜라스 거네요?”
나는 천연덕스럽게 아는 척을 했다.
“멜라스가 보고 있다더니 레이몬드도 보고 있네. 멜라스는 다 봤나 봐요?”
“마… 맞아. 그렇다는군.”
“와, 잘됐다. 레이몬드 다 보면 나한테도 빌려달라고 해야지.”
이제 그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것이다.
왜냐면 내가 멜라스에게 빌려달라고 말했다가는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 날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가 수습하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나도 다 봤으니 그냥 빌려 가면 돼.”
“아녜요. 직접 물어볼게요.”
“괜찮아. 에일린이 그런 수고를 할 필요는 없어. 게다가 멜라스가 최근에 바빠져서 만나기 어려울 테니 그냥 가져가도 돼.”
“아, 그렇다면 뭐. 저야 좋죠.”
나는 그가 건네어 주는 책을 기쁘게 받아들었다.
그러자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레이몬드가 시선을 돌렸다.
“책 때문인가? 그만 보든가 해야지 원.”
“응? 뭐라고 했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가 하도 작게 말하는 바람에 제대로 들리지 않아 물었지만 그는 다시 말해주지 않았다.
아무렴 어때. 득템했으니 이걸로 됐지. 오늘은 밤새도록 이걸 읽어야지!
신이 난 나는 싱글벙글 웃었다.
***
어느 날, 술집으로 들어선 내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다소 격하게 들리던 대화 소리를 따라 가보니 이든과 드류, 클로이가 멜라스에게로 몰려들어 있었다.
“멜라스 님. 그거 아십니까?”
“대공 전하께서 [황낙밤]을 코웻 공녀님께 빌려주셨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죠?”
세 사람은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차례대로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멜라스가 눈썹을 휘며 물었다.
“황낙밤? 그게 뭐지?”
“[황홀한 낙원의 밤]이요. 그 빨간색 표지 책 있잖습니까.”
“아….”
그는 눈동자를 굴려 드류가 말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냈다. 그러고는 “아!”하며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내가 말했을 때와 토시 하나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리고 별안간 이든과 드류, 클로이는 말다툼을 시작했다.
“내가 제일 먼저 빌려달라고 했는데!”
“아니야. 나였거든?”
“내가 1번이라고!”
부하들이 투덕거리는 꼴을 보자, 어이가 없어진 멜라스는 “허.”하고 한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배에다가 힘을 주고 위엄 있는 목소리를 내었다.
“너희들. 그만하지 못해?”
상사의 호통에 부하들은 일순 잠잠해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말에 복도는 도로 시장통으로 돌아갔다.
“원래는 내가 먼저였다!”
“말도 안 돼요. 멜라스 님. 여태 조용히 계시더니 왜 그래요?”
“이제 와서 슬그머니 끼어드시는 거죠? 어림없어!”
“맞아요. 맞아. 순서를 지켜라!”
“아니, 이것들이?”
그 야단법석에서 드디어 내가 왔다는 사실을 인지한 사람이 있었다. 저들을 말리기 위해 뒤늦게 복도로 튀어나온 에반이었다.
“어? 코웻 공녀님 오셨네요.”
“아, 안녕하세요.”
내 이름이 언급되자 떠들썩하던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지금 저들이 다투고 있는 저 상황에서는 내가 빌런인 거지? 어쩐지 환영받지 못할 것 같아 어색한 미소로 인사했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로 기죽을 내가 아니지. 나는 그들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내게는 이 논란을 잠재울 훌륭한 방안이 있었으니까.
“여러분. 진정하시고요. 혹시 [황낙밤] 때문에 다투는 건가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해결안을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말을 들은 모두가 미심쩍은 눈초리를 모았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뒷말을 이었다.
“다 같이 사이좋게 서점으로 가서 한 명 당 한 권씩 책을 사는 거예요.”
“[황낙밤]은 절판되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데요?”
“후후. [황낙밤]은 재입고가 되었어요. 제가 조금 전에 확인하고 오는 길이랍니다.”
나는 검지를 앞으로 내밀어 해결책을 술술 풀어놓았다. 그러자 표정이 구겨져 있던 이든, 드류, 클로이의 얼굴이 점차 환해지는 것이 보였다.
“그게 정말인가요?”
“당장 가서 사야겠다!”
내가 제시한 방법이 마음에 들었는지 세 사람이 환호하며 기뻐했다. 뒤늦게 끼어들었던 멜라스도 덩달아 좋아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일한 관찰자인 에반은 나와 네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작게 감탄을 터트렸다.
이곳에서도 이런 소설이 아주 인기가 많네. 작가는 돈 많이 벌겠다.
총 다섯 사람의 납득을 끌어낸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매출을 올린 [황홀한 낙원의 밤] 작가를 포함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