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다음 날 나는 대공의 병문안을 목적으로 아지트에 들렀다.
멜라스의 안내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서자, 창가에 서 있던 레이몬드가 멀쩡한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에일린 왔어?”
순간 눈이 부셔서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야 했다. 이 빛의 근원이 태양인지 레이몬드인지 알 수가 없을 만큼 그는 햇살 같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 찬란했던 걸까? 곁에 있던 멜라스는 움찔 놀라는 기색까지 보였다.
“몸은 이제 괜찮으세요?”
“아주 멀쩡해졌어. 포션의 효과가 대단해.”
우리가 안부를 묻는 사이에 멜라스는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졌다. 대공은 내게 창가에 있는 테이블 의자 쪽으로 자리를 권했다.
“멜라스가 나가지 말고 안에 더 머물라더군. 황제에게 멀쩡한 모습을 일찍 보여주는 건 좋지 못하다고 말이야. 그래서 에일린을 이곳으로 불렀어.”
“일리가 있는 말이에요. 잘하셨어요.”
나는 준비되어있는 찻잔을 손에 그러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멜라스는 충직하고 지혜로운 부하라 대공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 여러모로 믿음직했다.
“식사를 할 거지?”
“네. 좋아요.”
“잠시 후에 준비하도록 얘기해두지. 그나저나 책을 사 가야 할 텐데 어쩌나. 오늘도 부하를 시켜서 사 오라고 할까?”
“아니요, 아니에요.”
그가 누군가를 부르려는 몸짓을 하기에 나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거부했다. 지난번처럼 묵직한 책들만 골라오면 내가 매우 곤란해져.
어머니가 독후감을 쓰도록 시키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다 읽지 않고 줄거리 요약만 했는데도 족히 서른 번 넘게 졸았을 거다. 다시는 그런 후폭풍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책이 있긴 있어야 하는데….
잠시 방법을 고민해보고 있는데 방구석에 서 있는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오. 저거면 쉽게 해결할 수 있겠는데?
“레이몬드. 혹시 저기서 책 두 권 정도만 골라 가도 될까요?”
“흠.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
레이몬드가 허락의 의미로 끄덕이자 즉시 일어나 책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책 취향은 나에게 지대한 관심사였으므로 두 눈을 반짝이며 제목들을 훑었다.
프라레스 제국의 역사, 제국의 역대 황제들, 제국 상단의 흥망성쇠 등등 보기만 해도 지루하고 잠 올 것 같은 책들이 즐비했다.
저 때 대공의 부하들이 괜히 묵직한 책들만 골라온 게 아니었구나.
다 레이몬드의 취향이었어.
나는 지뢰밭을 피하기 위해 책장을 샅샅이 뒤졌다. 그중에서도 쉽고 재밌는 책을 발견하기 위해 눈동자에 불을 켰다. 그런데 어딘가 낯익은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어? 이건 그때 그 책 아니야?
지난번에 레이몬드와 같이 서점에 갔을 때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책이었다. 내가 보려고 했더니 그가 빼앗아서 책장 높은 곳에 도로 꽂아두었던 그것 말이다. 칙칙한 표지들 사이에서 원색의 표지가 무척 인상 깊어서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사람을 당기는 진한 빨간색의 표지를 보며 궁금함에 입맛을 다셨었는데. 잘 되었다 싶어진 나는 당장 책을 꺼내어 펼쳐보았다.
제목은 [황홀한 낙원의 밤]이었다. 나는 책의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뜨거운 숨결이 서로의 맞댄 코로 오고 갔다.
숨쉬기를 포기한 것처럼 상대의 입술을 거침없이 탐했다. 혀끝에서 전해져 오는 자극이 온몸으로 퍼지며 전기가 통하듯 찌릿찌릿했다.
한참을 비벼대던 입술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그의 얼굴이 더욱 밑으로 내려갔다. 은밀한 부위에 다다른 그가 입을 갖다 대려 하자 그녀가 잽싸게 손으로 막았다.
“아앗. 거긴 안 돼요.”
“가만히 있어 봐. 내가 천국을 맛보게 해줄 테니까.”
“안 되는데….”
그녀의 거부는 거부가 아니었다. 부끄러움에 한 번 튕겨본 것이었을까. 그는 당장 입으로 속옷을….]
여기까지 글씨를 읽어 내린 나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니, 이… 이건! 완전 내 취향이잖아?!
지금 내가 빙의해 있는 이 소설 [미친 황제를 길들였다]에서도 뜨거운 밤의 광경을 즐겨 보았던 만큼, 이 소설도 읽고 싶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나는 다음 글을 이어서 읽기 위해 재빨리 눈동자를 굴렸으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더 이상 허락되지 못했다.
휙.
내 손 안에서 또 한 번 책이 사라졌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 상황. 번개처럼 다가온 레이몬드가 책을 낚아챈 것이다.
“레이몬드!”
나는 조급한 마음에 버럭 외쳤다.
“이건 에일린이 보면 안 돼.”
“엑! 왜 안 돼요?”
그를 향해 항의를 가득 담은 눈빛을 쏘았다. 아무리 내 최애라도 뜨거움에 대한 열정을 방해할 순 없어.
내놔요, 내놓으라고! 이건 정말이지 진심이었다.
그는 얼굴이 잔뜩 상기된 채로 씩씩거리는 내 시선을 회피해버렸다.
“이건… 그래, 멜라스 거야. 한창 읽는 중이라고 하더군.”
“멜라스요?”
“맞아.”
하아. 그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 보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렇다면 할 수 없죠. 다른 걸로 고를게요.”
“그러는 게 좋겠군.”
내가 쉽게 포기하자 안심했는지 레이몬드의 표정이 다시금 편안해졌다. 그는 그 책을 내 손이 닿지 않는 높이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나는 먹지 못하는 포도를 바라보는 여우처럼 멀어진 책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나도 저 책을 사고 싶은데. 하지만 저런 걸 구매했다간 어머니께서 쓰러지시겠지?
역시 빌려 갔다가 돌려주는 게 안전할 텐데. 나중에 멜라스한테 꼭 물어봐야지.
나는 포기하는 대신에 마음속으로 계획을 수립했다.
식사가 다 준비되었다는 소식에 레이몬드와 나는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평상시처럼 단둘이 마주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데, 오늘따라 그가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특히 내가 입을 아, 벌리고 음식을 집어넣을 때면 뚫어질 듯이 보는 게 아닌가.
왜 쳐다보는 걸까? 포즈가 조금 민망한데.
나는 포크로 집은 말캉 버섯을 입으로 가져갔다가 도로 내려놓으며 물었다.
“레이몬드. 왜요?”
“으응?”
“빤히 쳐다보시길래요. 할 말이 있나 싶어서요.”
“아니야. 에일린이 잘 먹는 게 보기 좋아서.”
내 물음에 그는 당황해하며 얼른 시선을 돌렸다. 어딜 봐도 변명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크게 곤란한 건 아니었으니 일단은 그 설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식사 도중에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의 시선은 내게로 꽂혀있었다. 정확히는 내 눈이 아니라 약간 아래쪽을 보는 듯한데. 코를 보고 있나? 코딱지라도 붙은 건가?
“레이몬드. 혹시 제 얼굴이 뭐 묻었어요?”
“아니.”
그는 이번에도 지적을 받자마자 다급히 시선을 피했다.
흐음. 그런데 왜 자꾸 보실까?
나는 괜히 신경이 쓰여서 티슈로 코랑 입 주변을 슬쩍 닦아내었다.
식사를 물리고 잠시 후 하녀가 디저트와 차를 내어왔다. 디저트는 한눈에 봐도 알록달록한 색상에 아기자기한 디자인이 하리네 디저트 출신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오. 이건 하리네 디저트네요!”
“에일린이 좋아해서 사 왔어.”
“오와! 고마워요.”
나는 포크로 무지개색 마카롱의 몸통을 꾸욱 눌렀다. 그러자 크림이 옆으로 퍼지면서 아몬드 꼬끄가 지진이 일어나듯이 쩌억 갈라졌다. 그렇게 사 등분으로 나눈 후에 입으로 가져가 물었다. 바삭하면서도 쫀득한 식감이 혀를 만족시켰다.
레이몬드는 또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군침을 흘리듯이 침을 꿀꺽 삼키는 게 이번에는 메시지를 확실히 전달받은 것 같다. 먹고 싶은 거로구나! 그래서 얼른 한 조각을 쿡 집어다가 그에게로 내밀었다.
“레이몬드도 드세요.”
“….”
짐짓 당황한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것을 그의 입에다가 직접 넣어주었다.
흐음. 그러고 보니 내 침이 묻어서 몸에 좋으려나.
그 전에는 간접키스에 의의를 뒀다면 이제는 치유력이 있다는 걸 아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맛있어요?”
“맛있군.”
그리 대답하는 레이몬드의 두 볼이 복숭아처럼 분홍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아니, 레이몬드도 참. 먹고 싶으면 진작 얘기하지.
달달한 거 좋아하는 게 부끄러웠나 봐?
나는 곧잘 받아먹는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내 입에 한 번, 그의 입에 한 번 번갈아가며 부지런히 디저트를 날랐다.
***
왜 그런지 모르겠다. 자꾸만 에일린의 입술에 집착적으로 시선이 달라붙는 건.
아무런 증거도 근거도 없는데 그저 본능이 말을 하고 있었다. 내 입술과 입안에 새겨진 부드러운 감촉은 살결이라고. 막연하지만 그런 확신이 들었다.
말캉 버섯이 들어가는 그녀의 입안 동굴은 완전히 딴 세상처럼 보였다.
입술이 벌어지고 그것이 포크를 훑을 때마다 가슴이 간질거렸다.
저곳의 정체는 무엇인가.
눈을 돌리려고 했으나 계속해서 시선이 꽂혔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어느 순간에는 아예 대놓고 보고 있었다.
귀엽고 핏기 가득한 붉은빛 앵두는 아기자기하니 귀여우면서도 탐스러웠다.
하리네 디저트를 사왔을 때는 더했다.
에일린이 옆 입술에 묻은 크림을 핥아 먹으려고 혀를 날름거렸을 땐, 심장이 터질 듯이 빨라졌다.
제 눈엔 혀의 움직임이 슬로 모션으로 보였고, 그녀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저 포크가 부러워 거의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저 입술은 얼마나 맛있을까…?’
꿀꺽.
입속에 고인 침이 목울대를 울렁이며 넘어갔다. 그러자 내 시선을 발견한 에일린이 내게로 마카롱을 집은 포크를 내밀었다. 그녀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포크를.
그것을 보자 간접키스에 대한 욕구가 불쑥 치솟았다.
“레이몬드도 드세요.”
에일린은 내게 포크를 내민 채로 웃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밝고 환한 웃음이었다. 그녀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상상이나 할까?
순수한 웃음 앞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기회를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포크를 덥석 물어 그녀의 향기를 느꼈다. 에일린이 늘 풍기는 청량하고도 매혹적인 향이었다. 혀끝을 적시는 마카롱의 크림보다도 더 달았다.
나는 에일린이 주는 대로 디저트를 받아먹으며, 입술 사이로 살결 대신에 포크를 훑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