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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57화 (57/125)

57화

“깼어요!”

“깨어나셨습니다.”

눈을 뜬 대공을 보자마자 나와 멜라스는 마주 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그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우리를 한 사람씩 돌아보았다.

“멜라스. 에일린?”

“대공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레이몬드. 괜찮아요?”

멜라스는 얼른 다가가 그의 상체를 일으켜주었다. 도움을 받아 침대 등받이에 기댄 레이몬드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그래. 내가 공격을 받고 쓰러졌었지.”

그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검이 박혔었는데….”

그러고는 자신의 옆구리를 더듬어보았다. 통증이고 뭐고 아무런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아 이상했는지 옷을 들추었다. 원래 상처가 있던 곳에는 상처는커녕 티 하나 없이 피부가 매끈하기만 했다. 깜짝 놀란 레이몬드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힐러를 구한 건가?”

“아. 그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멜라스가 대신 나서서 대답해주었다.

“공녀께서 포션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걸 마시고 깨어나신 겁니다.”

“그렇군. 에일린이 포션을…. 또다시 큰 신세를 지게 되었군.”

“아니에요. 레이몬드가 나았으니 그걸로 된 걸요.”

미안한 표정을 짓는 레이몬드를 향해 나는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그는 모르겠지만, 실은 이 동작은 내가 조금 전 그에게 했던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을 잊고자 하는 발버둥이었다.

레이몬드가 깨어났다는 소식은 곧 온 아지트 내에 퍼졌다.

부하들은 그를 보려고 방으로 우르르 몰려들어 왔고, 1층에서는 “축제다!”를 외치며 술 파티가 벌어졌다.

“대공 전하!”

모두가 레이몬드를 부르며 절절한 안도감과 반가움을 표하자, 그가 조용히 미소를 걸었다.

“걱정들 많았지. 내가 쓰러지고 나서 뒷일을 처리해줘서 고맙군.”

“대공 즈언하아!!”

감동을 받은 이든이 대성통곡을 하자, 옆에서 다른 부하들이 킥킥대고 웃었다. 동료들은 그의 등을 찰싹찰싹 때리며 위로와 구박을 동시에 건넸다.

좁은 방 안이 많은 인원으로 북적거렸다. 소란스러움이 도가 지나치다 느꼈는지 멜라스는 대공께 안정이 필요하다며 부하들을 몽땅 데리고 나갔다.

썰물처럼 모조리 빠져나가고 나자 갑자기 고요한 적막이 찾아들었다.

“이제 다시 조용해졌군.”

“레이몬드. 좀 더 누워서 쉬세요.”

내가 이불을 덮어주려고 다가가려는 그때, 날갯짓 소리와 함께 열린 문으로 옥희가 날아들어 왔다. 푸드덕 푸덕. 녀석은 테이블에 내려앉아 큰 날개를 펼치며 펄럭거렸다.

“옥희야!”

나는 반가움에 녀석을 돌아보며 외쳤다. 레이몬드 역시 옥희를 반겼다.

“내가 깨어난 소식을 듣고 찾아왔구나. 옥희 네가 날 두 번이나 살려주었어. 고맙다. 네가 내 은인이야.”

“옥옥옥!”

옥희는 그 말에 화답하듯이 다시 한번 더 힘차게 날개를 펄럭거렸다.

“옥희가 레이몬드를 두 번 살렸다고요?”

“그래 맞아.”

놀란 내게 대공은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부모님의 묘가 있는 공원에 혼자 들어가 잠복해있던 특임대원들에게 공격받았을 때, 새떼들을 몰고 와 시선을 끌어줌으로써 도망갈 틈을 마련해준 것이 첫 번째.

힐러를 구하지 못해 위험한 상황에서 내게 포션이 있는 것을 알고 데려와 준 것이 두 번째라고 했다. 이 사실은 방금 대화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지만 말이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놀라우면서도 옥희가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였다.

“아이, 요 예쁜 것!”

“옥요요옥.”

나는 녀석에게 다가가서는 두 손으로 얼굴을 붙잡아 눌렀다. 그러자 부리가 뭉개진 옥희가 이상한 소리로 울어댔다.

사랑은 원래 고통을 동반하는 거란다. 괴상한 핑계를 대며 옥희의 깃털을 한참동안 조몰락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녀석을 그만 놓아주고서 레이몬드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허리에 양손을 올리며 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러운 분위기의 변화에 그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왜 그래 에일린?”

“그런데요. 레이몬드?”

“응?”

“제가 절대로 혼자 있지 말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어. 해… 했지?”

레이몬드는 내 추궁을 받자, 시선을 피하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런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지. 나는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얼굴을 잡고서 시선을 원위치시켰다.

“그런데 왜 제 말 안 들었어요?”

“미… 미안. 항상 그러던 거라.”

“지금이 얼마나 위험한 시기인데요. 목 바로 앞에 칼날을 들이대고 있는 걸 왜 몰라. 옥희가 아니었으면 아주 큰 일 날 뻔했잖아요!”

내가 아무리 호위를 구해주고 경고를 하면 뭐하나. 본인이 방심하면 끝장인 것을. 목숨이 달린 중요한 약속을 이렇게나 쉽게 깨버리다니. 나는 아주 날 잡았다는 듯 작정하고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그는 눈썹 끝이 아래로 쳐져서는 이 모든 이야기를 얌전히 들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그렇다면 좋아요.”

레이몬드는 손을 들어 올리며 맹세를 했다. 그제야 만족스러워진 내가 물처럼 콸콸 쏟아내던 말을 걸어 잠그며 웃었다.

“에일린, 그런데. 우리 거리가 좀 가까운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 레이몬드는 자신의 볼 위에 얹어진 내 손을 붙잡았다. 내가 아차,싶어서 서둘러 떼어내려 했지만, 이미 잡힌 후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 역시 영롱한 푸른 눈동자를 보며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렇게 가까이서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다시금 내가 한 행동이 떠올랐다. 인공호흡과 같이 지극히 의학적인 행위였지만 키스처럼 보이는 그것 말이다.

화악.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열이 얼굴로 모여들었다. 지금쯤 내 볼은 홍당무처럼 붉어져 있겠지. 하지만 부끄러우면서도 이 순간이 영원하기만을 바라게 되는 건 왜일까? 눈동자 가득 나의 최애를 담고 있는 건 정말이지 행복 그 자체였다.

조각상인 것처럼 가만히 굳어있던 레이몬드는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였다. 아주 조심스럽고도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에일린.”

“….”

이름을 담은 입술이 우아하게 움직였다. 저 입술이 참 보드랍고 촉촉했지. 나도 모르게 맞닿은 기억을 떠올리며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기분 탓일까. 거리가 점점 좁혀지는 것 같이 느껴지는 바로 그때였다.

똑똑.

“대공 전하.”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목소리로 보아 멜라스인 것 같았다.

하필이면 딱 이 타이밍에 끼어들다니…. 나는 레이몬드와 계속 이대로 있기를 바랐지만, 그는 즉각 손을 내리며 들어오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자유롭게 놓인 나의 두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 느낌은 정말이지, 소름이 끼치도록 싫었다.

레이몬드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 언제나 꼭 붙어 있고 싶어.

한 번 안으면 떨어지기 싫어하는 코알라가 된 것처럼 과한 거부반응이 일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그래. 그렇군.”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멜라스를 멍하니 시선으로 따라가다가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바로 테이블 위에 옥희가 앉아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녀석은 어떠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같은 공간 안에 있다는 걸 잊어버릴 만큼 조용했다.

“옥희야.”

“옥?”

내가 부르자 그제야 옥희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 녀석, 왠지 일부러 시선을 돌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왜? 뭣 때문에? 우리는 그런 므흣한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저런 행동을 하는 걸 보니 과연 옥희는 올빼미의 탈을 쓴 사람이거나, 마법사가 변신한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다시 한번 솟구쳤다.

“그럼 공녀님을 배웅해드리고 오겠습니다.”

나는 멜라스와 함께 나가기 전에 작별 인사를 했다.

“레이몬드. 몸조리 잘하세요.”

“그래. 에일린. 조심히 들어가.”

레이몬드는 침대에 앉은 채로 손을 흔들었다. 평소처럼 배웅해주지 못한 걸 아쉬워하는 얼굴이었다.

딸칵.

나와 멜라스는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자 그가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내었다.

“공녀님. 오늘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대공 전하를 야단쳐주셔서 고맙습니다.”

“뭐… 뭘요. 하하.”

아앗. 그 소리가 바깥에 다 들렸구나.

나는 민망함에 뒤통수를 매만지며 웃었다. 하지만 멜라스의 표정을 보니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았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전하께서는 저희에게 늘 엄격하십니다. 하지만 공녀님과 계실 때만큼은 부드러우시네요. 아까 고맙다는 인사를 하시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이곳의 악역인 레이몬드는 누구에게나 엄격하고 철저한 사람이었지.

내게 다정하게 대해주어서 자꾸만 그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예지력과 포션으로 전적인 도움을 주는 나의 존재가 그에게는 그만큼 중요할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게 문제가 아니었다.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휘휘 휘감던 나는 쭈뼛쭈뼛하다가 멜라스를 슬쩍 불렀다.

“그런데요, 저기. 멜라스.”

“예. 말씀하십시오.”

“그, 아까 전에요. 키… 키스를 한 건 비밀로 해줄래요? 당분간 만이라도요.”

차마 부끄러운 단어를 입에 시원하게 올리지 못하는 날 보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내 붉어진 뺨을 보았을까? 그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고 수긍해주었다.

비밀의 공유.

그 사실이 오늘 멜라스와 나의 유대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주었다.

***

에일린이 공작 저로 돌아가고 나자, 혼자 남은 대공은 창가에 붙어 섰다.

포션을 먹고 잠에서 깬 후로 그는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몸 상태가 좋았고 다만 아주 약간의 피로감만 남은 상태였는데, 부하들의 성화에 못 이겨 방에 머물러야 했다.

그는 에일린과 코아가 건물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러고는 두 사람의 등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런데….’

문득 야릇한 기분에 휩싸인 그는 자신의 입술에다가 손가락 끝을 갖다 대었다.

의식을 잃고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 때, 천사의 깃털이 입술에 닿았고 입안 가득히 어루만져 주었다. 그 부드럽고 평화로운 감촉이 무척이나 좋았는데, 그게 대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궁금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뭐라고 물어보기도 곤란했다.

‘역시 꿈이었나.’

아무래도 포션이 입안에 머금어져 치유되면서 그런 편안함을 느꼈겠지. 대공은 그렇게 결론을 내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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