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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55화 (55/125)

55화

대공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 이날은 프라레스 제국의 역사적인 날이기도 했다.

선황제가 병력을 일으켜 레이몬드의 부모님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날이기 때문이다.

폭군에게 잃은 가족을 추모하고자 하는 이들은 많았다.

다만, 제아무리 폭군이라도 선황제의 핏줄이 황제로 등극해있으니 공식적인 날은 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각자 조용히 추모의 길을 떠날 뿐이었다.

선 루슬로 대공 부부가 묻힌 곳은 루슬로 영지의 어느 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그들은 미리 작성해둔 유언장대로 따로 떨어진 독립된 공간 대신에 다른 이들과 함께 묻혔다.

레이몬드는 에일린의 당부를 기억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어떠한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다. 일 년에 단 하루, 단 20분이니까. 그렇기에 부하들을 비롯하여 온까지 입구에서 대기하라고 명령한 후 저 혼자 발걸음을 했다.

장소는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의 풀밭.

넓은 잔디공원에 수십 개의 십자가가 규칙적인 간격으로 바닥에 박혀있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말없이 와서 떠난 가족들을 기린 후에 조용히 자리를 떴다.

레이몬드도 풀밭을 가르며 걸어 들어와 부모님의 자리에 섰다. 준비해둔 꽃 몇 송이를 십자가 앞에 내려다 놓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날 일어난 사건은 어른들의 배려로 현장을 보지 못했다. 상황을 예감한 부모님이 미리 레이몬드를 다른 곳에 보내두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가 본 것은 꽃들 사이에 누워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부모님의 얼굴이 전부였다.

울부짖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던 그는 루슬로 가문에서 절제를 미덕으로 배우며 자랐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상 그때부터 가문의 주인은 자신이었으니까.

멀리서 유학하던 동생들이 돌아와 집안이 눈물바다가 되었을 때도 레이몬드 만큼은 마른 눈동자였다. 다만 죄 없는 아랫입술만이 찢어져 피를 흘렸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이 추모의 시간을 가질 때마다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과거에 흘리지 못했던 아픔이 이제야 한 줄기의 맑은 액체가 되어 새어 나오는 것이다. 이 모습을 측근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에 늘 홀로 이곳에 왔다.

그렇게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며 가슴이 먹먹해지려는데, 갑자기 방해하는 이들이 생겼다. 촉촉하던 대공의 눈망울이 돌연 날카로워지더니 옆을 돌아보았다. 공원은 테두리가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곳에 잠복해있던 자들이 살기를 띠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특임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전신이 까만 복장이었지만, 벌써 몇 번이나 상대를 해봤던 터라 그들의 움직임만 봐도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열 명의 특임대는 손에 무기를 쥔 채 빠르게 내달렸다.

“꺄아아악!”

“어헉. 저게 뭐야?”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묘지공원을 빠져나갔다. 다행히도 복면들은 도망가는 사람들은 그대로 보내주었다.

대공도 허리춤에 찬 장검을 뽑아 들었다. 제국에서 손꼽히는 검호는 여러 명의 특수 부대원들을 상대하면서도 침착했다. 휘둘러지는 무기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여 검으로 막고 쳐냈다.

레이몬드는 속도와 기술도 훌륭하지만 힘 또한 굉장했다. 그가 무기를 쳐낼 때마다 특임대원들은 중심이 흔들리며 몸이 밀려났다.

단 한 사람을 두고 생각보다 고전하게 되자, 그때까지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단장이 큰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어차피 쪽수는 우리 쪽이 월등히 우세해. 한꺼번에 밀어붙여라!”

“예!!”

챙챙챙.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텅 빈 공원 안에 요란하게 울렸다.

아무리 뛰어난 검사라도 체력이 부쳐 혼자서 여러 명을 장시간 상대하기란 곤란했다. 특히 특임대는 고도로 훈련된 자들이라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 지체하였다가는 더 불리할 수밖에 없는데도 도망치거나 적의 대열을 무너뜨릴 만한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큰일인걸. 이대로는 당하겠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옆구리에 날카로운 감각이 몸속 깊이 파고들었다.

혼자 고군분투하다가 적에게 빈틈을 내어 줘버린 것이다.

“크윽.”

레이몬드는 짧게 신음을 내뱉으면서도 검으로 적을 쳐냈다. 옆구리를 찌른 특임대원은 “으악.”하는 비명을 내지르며 칼과 함께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아직 여섯 명이나 남아있었다. 지치고 부상까지 당한 상황에서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대공이 다쳤으니 더 몰아붙여라!”

“예!!”

특임대는 유리한 지점을 선점하고서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바로 그때였다.

푸드덕 푸드덕. 어디선가 들리기 시작한 날갯짓 소리가 요란하게 주위를 덮었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놀란 특임대가 두리번거렸다.

“숲에 새들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

기이하리만치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이 나갈 지경인데, 특임대 중 한 명이 하늘을 가리켰다.

“저게 뭐지?”

공중에는 까만색 줄이 그려져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거대해지고 있었다. 곧 가까워진 그것의 정체는 엄청난 숫자의 새 떼였다.

이윽고 몰려온 새들은 특임대에게로 달려들었다. 숲의 초입에 몰려와 앉아있던 새들까지 합세하자, 공원 안은 온통 날갯짓 소리로 꽉 찼다.

새들은 특임대원들한테로 덤벼들어 날카로운 부리로 쪼아댔다.

“으아악!”

“아… 아파!!”

그것을 아는가. 싸움하면 쌈닭이 최고고, 전쟁에서도 전투기가 승패를 좌우할 만큼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걸.

새들의 가차 없는 공격에 제아무리 날고 기는 특임대라도 힘을 쓰지 못했다. 공격하는 새들을 치우려고 칼을 휘두르면, 다른 새들이 확보된 검과 몸 사이의 공간을 채워 얼굴과 목을 물어뜯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피범벅으로 만들어버렸다.

“옥, 옥, 옥!”

“옥희야.”

그렇게 새들이 적들을 교란하는 동안, 대공에게로 다가온 옥희가 재촉하며 날개를 퍼덕거렸다. 그러고는 입구가 아닌 다른 길로 그를 안내했다. 레이몬드는 상처 부위에 손을 얹은 채로 녀석을 꾸역꾸역 따라갔다. 하필이면 옆구리라 걷기가 상당히 힘들었지만, 저만한 실력자들을 상대로는 시간 끌기에 불과할 테니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옥희가 안내한 길은 지름길이었다. 1분쯤 걷자, 곧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거리가 드러났다.

“크흑.”

레이몬드는 한계를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상흔이 깊은 옆구리에서는 피가 울컥울컥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득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그는 안심하며 정신을 놓았다. 아른거리는 눈동자 너머로 깜짝 놀라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부하들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옥희야. 고마워.’

의식이 아스라이 멀어지는 중에 대공은 그리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

산짐승조차 잠자리에 들었을 어두운 밤 시간.

나는 숲길을 돌파하며 빠르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피부가 풀과 나뭇잎에 스쳐 따가웠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레이몬드가 다쳤다…!

머릿속에는 이 한 가지 생각만이 꽉 들어차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다.

지난번에는 공작 저 내에서 호위들에게 들켜버렸지만, 이번엔 코아의 도움으로 그늘 속에 완벽히 숨어서 재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다.

레이몬드가 다친 걸 알려준 것은 바로 옥희였다.

녀석은 공작 저로 날아와 나에게 처절한 몸 연기를 선보였다. 날개 끝을 허리춤에 얹은 채로 늠름하고 멋있는 척 눈을 빛내더니, 자신의 옆구리를 콕 찌르며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처음에는 그 행동이 너무 귀여워서 웃었다가, 그다음에는 무슨 말일까 가만히 집중해보았다. 아하, 저건 레이몬드 흉내를 내는 거구나. 그리고 옆구리를 푹 찔리고… 찔려?!

“설마 레이몬드가 다친 거야?”

“옥옥!!”

자신의 연기를 알아봐 주자 옥희가 큰 날개를 퍼덕이며 긍정했다. 그 길로 난 옷만 부리나케 갈아입은 채 저택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옥희야. 가자!”

“옥옥!”

공작 저를 수월하게 빠져나온 만큼 시간과 에너지를 벌었으니, 코아와 함께 달리기에 박차를 가했다.

아지트 술집에 도착한 나는 뒷문을 세게 열어젖혔다.

쾅! 심하게 흥분한 나머지 힘 조절에 실패했다. 그 바람에 사람들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었다.

문의 위쪽 경첩이 빠져서 덜렁거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얼이 빠져있는 멜라스에게로 다가갔다. 내 뒤를 따라 들어온 옥희는 자신의 자리인 듯 2층 벽에 설치된 선반 위에 내려앉았다.

“멜라스. 대공님은요?”

내가 다급히 묻자, 그제야 문에 가 있던 그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졌다.

“대공 전하께서는 침대에 누워 계십니다.”

“몸 상태는 어때요?”

“내상이 깊어 아직까지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의사는요? 힐러는 없나요?”

“의사들은 다녀갔지만 외상만 처치했을 뿐 별다른 수를 내지 못했고, 힐러들은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황제가 주변의 사제 힐러들을 모조리 매수해놓은 듯합니다.”

“아.”

그는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역시 같은 심정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그때 멜라스가 아래로 깔린 내 시선을 도로 사로잡았다.

“코웻 공녀님. 혹시 포션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포션이요?”

절망에 빠졌던 표정은 두 눈 가득 기대를 담으며 빛났다.

그러고 보니 너무 급하게 서두르는 바람에 병에 물을 담아온다는 걸 깜빡 잊어버렸다. 이 일을 어떻게 하지 고민하고 있는데, 내 표정을 읽은 멜라스가 먼저 기대 어린 시선을 거두었다.

“제가 무리한 바람을 내비쳤네요.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대공님을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예. 2층으로 가시죠.”

우리 둘은 계단을 저벅저벅 올라갔다.

멜라스를 뒤따르면서 언뜻 아래를 보자, 부하들 몇 명이 술집 뒷문을 고치기 위해 달라붙어 있었다.

늘 시작을 알리던 노크는 오늘은 생략되었다. 멜라스는 조용히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환한 빛 대신에 마법으로 만들어진 침대 등이 대공의 얼굴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레이몬드는 잠을 자면서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게 보이자, 다가가 그의 땀을 훔치며 이마를 쓸었다. 서둘러 치료가 필요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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