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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54화 (54/125)

54화

코웻 공작이 원로 의장으로 선출된 이후, 카일은 이제나저제나 올까 에일린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부르지 않아도 고마움에 당장 달려올 줄 알았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어떠한 소식도 없었다.

혹 방해될까 봐 안 오나?

기다리다가 지루해진 황제는 시종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코웻 공녀에게 기별을 넣지. 저녁 식사 때 맞춰서 들어오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그러나 찾아오지 않아서 퉁명스러웠던 그의 마음은 그녀를 보자마자 곧바로 풀어져 버렸다. 눈앞에 선 에일린은 몸에 쫙 달라붙는 요염한 보랏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음에 쏙 든 것이다.

“오랜만이오. 에일린.”

인사를 올린 후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있는 에일린.

시선을 살짝 사선으로 피하는 모습이 수줍어하는 기색처럼 느껴졌다.

또한 눈동자에는 전과는 다른 어떤 감정이 깃들어있었는데, 분명 이 좋은 것들을 잃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마음이겠지.

‘좋아. 바로 이거지.’

카일은 만족스러워하며 입꼬리를 잔뜩 올렸다.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테라스 대신 실내에 머물렀다. 고전적인 분위기의 테이블이 방 한가운데에 있고 옆에는 커다란 침대도 있었다. 손님들이 머물면서 휴식도 취하고 잠도 자는 곳이었다.

황제와 에일린은 기다란 붉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시녀가 주전자에서 차를 따라주자 쪼로록 소리와 함께 찻잔에 김이 모락모락 올랐다. 에일린이 그걸 멍하니 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쩐지 몽롱하고도 야릇했다.

“오늘은 고혹미가 넘치는군. 내가 보낸 드레스인가?”

“예. 폐하께서 선물로 주신 거예요.”

옆에서 곁눈질로 내려다보니 가슴골도 보였다. 요정 같은 페이스와 어울리지 않는 콘셉트였지만 그게 호감을 더 부추겼다.

카일은 에일린을 그윽하게 바라보더니 등받이에 팔을 기대며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벌어져 있던 사이가 대뜸 가까워지자 에일린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대는 토끼 같단 말이야.”

“토… 끼요?”

“그래.”

카일이 반대편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쓸더니 턱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어린 여인의 살결은 푸딩처럼 부드러웠다.

이윽고 손가락은 목선을 타고 내려와 쇄골과 어깨선을 쓸었다. 긴장으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있던 에일린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저리로 가지.”

“앗.”

벌떡 일어선 카일은 에일린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그러고는 그녀를 이끌고 성큼성큼 걸어가 침대 위에 앉혔다.

에일린은 맹수 앞에 선 토끼처럼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그것이 제 예상과는 약간 달랐다. 저 떨림은 왜 설레는 게 아니라 두려워하는 것 같지? 처음이라 그런가.

카일은 그녀의 옆에 앉아 분홍빛 머리칼을 여러 번 쓸어 넘겨주었다. 그 동작이 아주 부드럽고 다정했다.

“에일린.”

“네… 네?”

“그대, 혹시 두렵소?”

그는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일부러 말을 걸었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사락사라락. 조용한 방 안에 천이 흐르는 소리가 나더니 카일이 늠름한 상체를 드러냈다. 운동으로 잘 다져진 조각 같은 몸매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는 에일린의 손을 가져다가 자신의 가슴 위에다 얹었다.

“내 그대에게만 특별히 허락하지. 내 머리칼에 얼굴을 비비고, 어깨를 붙잡아 신음을 내어도 좋소.”

“폐… 폐하.”

흔들리는 여린 눈동자가 황금빛 머리칼로 빛나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느른한 눈으로 그녀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더니 이윽고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코가 닿자 카일의 입술이 벌어지면서 앵두를 삼키려는 그 순간, 붉은색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폐… 폐하. 이러지 마세요.”

그녀가 고개를 완전히 돌려버린 것이다. 가슴 위에 억지로 붙잡혀있는 손도 벗어나려고 힘주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처음에는 설렘 혹은 기대라고 생각했던 감정이 사실은 ‘거부’였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것을 알자마자 수치심이 폭풍같이 일었다.

카일은 당연하게도 에일린이 자신에게 매달릴 줄 알았다. 이 프라레스 대제국의 황제가 이렇게까지 잘해주는데 그게 합당한 반응이 아닌가. 게다가 조각 같은 근사한 외모까지 겸비했으니 이 세상 어떤 여인이라도 자신을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도대체 뭐가 부족하단 말인가?’

화가 난 카일은 에일린의 손을 아프도록 꽉 쥐더니 내던지듯이 놓았다. 그러고는 뒤로 돌아 등만 보인 채 차갑게 명령했다.

“여기서 당장, 나가시오.”

일말의 여지도 없는 축객령이었다.

에일린은 이것이 유일한 탈출의 기회임을 깨닫고 어서 나가라는 머릿속의 경고를 따랐다.

그녀는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방에서 나갔다.

쿵.

문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나자 방안은 적막해졌다. 그러나 카일의 속은 용암을 품은 화산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제자리를 공고히 하려고 계획을 세웠더니 공들인 약혼녀가 방해할 줄이야.

그는 주먹을 꾹 말아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두 눈에서는 용암 같은 불길이 일고 있었다.

“시종장!! 시종장!!!”

“예… 예. 폐하.”

황제의 고함에 리빙스턴 백작이 깜짝 놀라며 다급히 들어왔다. 방금까지만 해도 코웻 공녀와 함께 있었는데…. 그가 혼자 상의를 벗은 채로 침대에 앉아있는 상황을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도 잠시, 떨어진 불호령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레이몬드를 잡는다. 특임대를 모조리 풀어!”

“예? 하지만 폐하께서 대공은 위험한 호위를 대동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내가 안다. 레이몬드가 온전히 혼자가 되는 때를 내가 알아.”

불바다가 된 카일의 동공 속에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그러니 무조건 성공하도록 해. 이번에도 실패하면 네 목숨도 없다.”

“예…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으르렁거리는 황제를 보자 시종장은 두려운 만큼 허리를 더욱 깊이 숙였다. 또다시 피바람이 불어닥치겠구나, 생각하면서.

***

황제의 축객령을 듣고 방에서 뛰쳐나온 나는 마차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빨라진 심장박동만큼이나 빠른 걸음으로 걷자, 황성의 풍경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황제는 과연 남주답게 얼굴도 몸도 조각상 그 자체였다. 세계관의 사랑을 받는 주인공은 아름답게 빛났다.

그래서일까. 그토록 다짐을 했건만 그의 유혹을 떨쳐내기까지 수십 번이나 고민했다. 여주와 수놓았던 은하수 같은 밤의 향연이 생각나면서 본능적인 궁금증이 인 것이다. 그만큼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나는 손을 펼쳤다가 주먹을 쥐어보았다. 여전히 떨리고 있는 손바닥에는 그의 가슴에 닿았던 감촉이 남아있었다.

티 하나 없이 보드라운 살결은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가늠하게 해주었다. 싸우기 위해 키운 근육이 아닌 그저 보기 좋게 다듬어진 몸.

반면 일전에 보았던 대공의 몸에는 잔 상처들이 많았는데…. 그 대조되는 모습에서 유혹을 이겨낼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사히 대공 방패를 소환하여 막은 것이다.

그나저나 황제는 어쩌려는 걸까.

아무리 정치를 위해서라지만 나를 유혹하다니, 정녕 자신의 취향을 내던질 셈인가?

어쩌면 이 옷 때문에 잠시 판단이 흐려진 건지도 모른다.

황제의 취향이 한껏 반영된 보라색 드레스는 클레어의 독촉에 의해 입게 된 거였다. 찐여주인 아멜리아에게 어울릴만한 스타일이었고,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결과는 참담했다.

아무쪼록 벗어나서 다행이야. 지금은 우선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

며칠 후, 대공의 초대로 우리는 낮에 아지트를 찾았다.

나는 황제 때문에 심적으로 굉장히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밖에 돌아다니기보다는 그와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말캉 버섯을 실컷 흡입한 식사를 마치고 나서 따뜻한 차를 호로록 마셨다. 찻잔을 들자 알싸한 향이 김과 함께 올라와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런 평화로운 한때를 지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있었다.

“레이몬드. 차향이 참 좋아요.”

“그래? 그대의 입맛에 잘 맞나 보군.”

나의 기운찬 칭찬에 레이몬드가 싱긋이 웃었다. 그는 내가 잘 먹을 때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유독 잘 웃는 것 같았다.

“그런데 에일린.”

레이몬드는 내 이름을 부르며 주의를 끌었다.

“황제랑 그 이후로 아무 일도 없었어?”

“네? 그… 그럼요.”

기습질문을 받은 나는 순간 어깨를 움찔 떨었다. 급히 정해진 답을 내뱉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거짓말을 하려니 양심이 찔린 것이다.

전부터 결심했지만 황제와의 일은 레이몬드에게 곧이곧대로 알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답도 없는 문제를 괜히 도마 위에 올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흐음.”

“왜… 왜요?”

그가 석연치 않은 듯 하자 조심스럽게 이유를 물었다.

혹시 어디서 들은 게 있는 걸까. 그래서 내 거짓말이 들통나는 건 아닐까.

꼭 바람피우는 걸 들켰을까 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대답을 기다리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아니야. 카일이 날뛴다는 얘기가 들려오던데 근래에 계속되던 일이니까 특별할 건 없지. 다만, 점점 더 선황제를 닮아가는 것 같아.”

“아.”

역시나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무엇이 계기였는지는 몰라도 조금은 정상적으로 구는가 싶더니 카일은 도로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원작에서도 점점 흑화가 되다가 결국 폭군이 되어버리니, 그것이 그의 운명 혹은 설정값이지 싶었다.

“그러고 보니 이 말을 전해야겠군. 내가 잠시 멀리 다녀올 거라서 당분간은 못 볼 것 같아.”

“정말요? 어디를 가는데요?”

당분간 레이몬드를 못 만난다니, 내 힐링은 어떻게 되는 거지?!

슬프고 안타까운 소식이었지만 감정을 꾹 억누른 채 물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이야. 화장한 후에 영지에 묻혀 계시거든.”

“아.”

레이몬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지만, 괜히 물어보는 바람에 마음이 무거워졌을까 싶어 미안했다. 그래도 황제가 흑화해가는 시점이라 조심스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가능하면 돌아다니지 않는 편이 안전할 테지만 그런 일이라면 말릴 방법이 없네.

다만, 조심하라는 당부만 건넬 수 있을 뿐이었다.

“부디 몸 조심히 다녀오세요. 꼭 온과 함께 다니시고요.”

“그래. 유념하지.”

그는 내 걱정 어린 표정을 보며 안심시켜주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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