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테라미 자작은 원래라면 귀족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황제의 특별 허락이 있었다. 힐레가 황성에 들어온 후 한 번도 보지 못한 딸과 오랜만에 만나보라며 황제가 편지로 뜻을 전한 것이다.
회의 참석을 위해 황성으로 들어온 자작은, 먼저 자신의 딸을 보러 그녀의 방으로 찾아갔다. 힐레는 황제의 은혜를 입은 후로 황성 내에 따로 방을 배정받아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딸아.”
자작은 기쁘게 외치며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나 자신의 입양 딸을 마주하자 흡족했던 마음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몰골은 눈 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였다. 자작은 힐레가 황제에게 마냥 사랑을 받는 줄 알고 좋아했으나 실상은 달랐던 것이다.
방에서 마주한 힐레의 모습은 처참했다. 젖살로 탱탱했던 볼은 빨갛게 부풀어 올라있었고, 몸 여기저기는 시커먼 멍으로 가득했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 힐레.”
“아… 아버지. 흑흑흑.”
그녀는 자작을 보자 그동안 쌓였던 설움이 복받쳐 눈물을 터트렸다.
테라미 자작은 힐레를 안고 등을 토닥여주면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비록 피가 이어지진 않지만 어여쁘게 여기며 귀하게 키운 제 딸이었다. 그런 딸을 한낱 놀잇감으로 취급한 황제에게 분노가 인 것이다.
“힐레야. 내가 폐하께 잘 얘기해보마. 너무 걱정 말거라.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마음을 굳게 하고 이겨내야 한다.”
“네. 흑흑. 아버지.”
힐레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야무지게 끄덕였다.
귀족 회의가 시작되기 전, 자작은 황제의 알현을 요청했고 카일은 흔쾌히 허락을 내렸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테라미 자작.”
자작은 예의를 차리며 허리를 숙였지만 화를 주체하지 못해 목소리가 덜덜 떨려왔다. 이윽고 고개를 든 그는 황좌에 거만하게 앉아있는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딸을 만나보았소?”
“예.”
“오랜만에 만나서 좋았겠구만.”
자작은 태연한 안부 인사에 순간 토기가 쏠렸으나 가까스로 참아내며 말했다.
“애지중지 키운 딸이라 더없이 기쁘지요. 그런데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보시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부름에 카일은 썩 내키지 않으면서도 발언을 허락했다. 하지만 역시나 이어진 테라미 자작의 말은 도로 입에 집어 넣어버리고 싶을 만큼 듣기 싫었다.
“제 딸을 어여삐 여겨주십시오.”
“뭐? 이미 그러고 있소만. 혹 내가 충분히 찾아주지 않는다고 불만이던가?”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힐레의 몸에 맞은 듯한 상처가 많던데….”
“자작. 지금 내게 항의를 하는 것이오?”
그 순간 황제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얼음을 와르르 끼얹은 듯 차갑고 살기 어린 목소리였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혼나는 게 당연한 것 아니오? 애초에 자작이 교육을 잘 시켰으면 맞을 일이 없었을 것을.”
“폐하. 히… 힐레가 무얼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까.”
“감히 황제의 손길을 거부한 것이지. 평민 출신이면서 주제도 모르고!”
쾅쾅.
황제는 주먹으로 황좌를 세게 내리치면서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작은 어깨를 움찔 떨 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황제 옆에 있는 시종장을 비롯한 시종들이 흔히 있는 일인 양 무표정한 얼굴들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이것이 황제의 민낯이로구나.’
세간에는 제 아비와는 다른 성군이라는 칭송이 간혹 들려왔지만, 소문이 거짓임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야 말았다. 선황제 때의 공포를 아는 자작은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할 말이 다 끝났으면 나가보시오.”
황제의 축객령이 떨어지자, 자작은 하는 수 없이 뒤돌아섰다.
생전에 이토록 자신의 등이 초라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을까? 아버지라는 이름의 무게가 자신을 짓눌렀다. 어깨가 한없이 무거웠다.
테라미 자작은 딸과 자존심까지 모조리 버렸건만, 황제는 이대로 넘어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감히 자신에게 항의의 말을 한 건방진 자는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귀족 회의에서 굳이 자작을 지목해서 말을 걸었다.
“테라미 자작은 이번에 첫 귀족 회의 참석이지?”
“예, 폐하.”
“앞으로 자작의 영지에서는 상납금을 두 배로 올려 받겠소.”
“예…?”
깜짝 놀란 자작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자신을 깔보듯 노려보고 있는 황제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어째서….”
“자작의 여식이 내게 은혜를 입었으니 보답을 해야 마땅한 것 아니겠소?”
‘은혜… 은혜라니….’
아비된 마음으로는 정말로 힐레가 사랑을 받고 있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은혜를 갚고픈 마음이 있었다. 실제로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값진 선물들을 보낼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힐레를 그토록 처참하게 만들어 놓고서 느닷없이 상납금이 두 배라니… 뻔뻔함이 도가 넘었다.
“다음 달부터 바로 적용하지.”
“그건 말도 안 됩니다. 폐하. 두 배라니요. 게다가 이렇게 빨리는 무리….”
“자작. 혹 지금 내 명을 거역하는 것이오?”
자작의 말꼬리를 자른 카일의 한쪽 눈썹이 휘었다. 그런 말은 세상에 나고 처음 들어본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장내는 잠시간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곧 황좌에서 벌떡 일어선 카일은 테라미 자작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고는 팔을 천천히 들어 올리더니 그의 뺨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짜악! 앉아있던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강력한 한 방이었다.
‘힐레.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었구나.’
그 순간 자작은 딸이 매일 느끼는 아픔을 똑같이 느낄 수 있었다. 부당한 폭행을 당하면서도 제대로 된 항의조차 할 수 없는 것까지 그녀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어쩐 일인지 그는 뺨보다 심장이 더 아팠다.
“아비나 딸이나 말 안 듣는 건 똑같구만.”
그리 중얼대는 카일은 테라미 자작을 내려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세상에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는 안하무인의 눈빛으로.
***
그렇게 폭군이 되어가던 카일은 또 다른 결정적인 사건을 맞이했다.
평소에 그는 셰일 왕의 네버레스트 암살단을 탐내고 있었다. 실력이 워낙 출중하다는 소문이 자자했기에 대놓고 암살단을 영입하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셰일이 평화체제에 돌입하게 되자, 셰일 왕은 프라레스 제국에서 그들을 사가기를 바란다는 뜻을 내비쳤다.
옳다구나 하며 실력자들로 병력을 충당할 생각에 어깨가 들썩였던 카일은 돌연 네버레스트 단원들이 도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마저도 단원들은 이미 증발하듯이 사라지고 없으며, 온 단장과 그의 가족들만 행방을 안다고 했다.
‘온이라도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
그가 네버레스트의 핵심이니까.
이마에 핏대가 선 카일 황제는 당장 지원을 위해 병력을 출격시켰다.
하지만 지원 병력으로부터 일에 무사히 성공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 모든 소식이 끊겨버렸다. 이후로 사람을 보내어 조사해보니 국경 지에서 전투의 흔적만 발견했을 뿐, 셰일 왕의 사람도, 자신의 사람도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
필시 네버레스트의 도주를 도운 세력이 있고, 그 세력에 의해 모조리 처리당했다는 것.
허탈함이 밀려온 황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하게 폭주했다.
“이… 이런! 제기랄!!”
황제는 업무보고를 받자, 집무실 안에 있던 손에 잡히는 것들을 부수고 집어던졌다. 근처에 대기 중이던 시녀들의 머리채를 잡아채기도 했다. 모든 것을 파괴해대다가 더는 멀쩡한 것이 없자 별안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분수같이 분출되던 감정은 심장을 오히려 딱딱하게 만들었다. 카일은 문득 이성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레이몬드는 바퀴벌레처럼 죽이기 힘들다지만, 지금은 엄연히 내가 프라레스 제국의 황제인 것을. 내 자리가 공고하다면 그 누구도 넘볼 수 없겠지.
‘그렇다면 결혼을 해서 후세를 만들자. 때마침 정부를 데리고 노는 것도 지겨워졌으니 잘 되었군. 그러면 흐음, 우선 성군이 되어야겠지?’
카일은 급작스레 마음을 선회했다. 이 모든 결심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그는 자신이 감정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상태라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자기 아버지가 똑같이 그랬는데도 말이다. 카일에게 선황제는, 기분이 좋을 때면 좋은 아버지 노릇을 잠깐 하다가도 기분이 나빠져 버리자마자 소리를 질러대거나 손찌검을 하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토록 증오했으면서도 자신도 똑같다는 사실을 모른 것이다.
카일은 그저 목적을 실행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다음 계획을 세울 뿐이었다.
***
황성에서 파티를 개최한 날.
얇은 잠옷 가운을 걸친 황제는 침대 맡에 상체를 세운 채로 앉아있었다. 그는 낮에 연 파티에서 본 에일린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자신을 위해 열어준 파티에서 휘황찬란한 선물을 무수히 받은 그녀는 감격하여 거의 눈물을 짓다시피 했다. 계획했던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자 흐뭇한 마음이 일었다.
에일린 코웻. 이 황제의 자리를 공고히 만들어줄 자.
집안의 지위나 평판은 알맞게 훌륭했다.
외모는 자신이 선호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황후로 나쁘지 않다.
그녀 자체도 예전과는 다르게 갑갑하게 굴지 않으니 그걸로 되었다. 아니, 오히려 괜찮았다. 깜짝 놀랄 때 동그래지는 눈이라든가 아기자기한 행동이 토끼같이 귀여웠으니까.
그러나 그가 준비한 이벤트는 파티에서 끝이 아니었다.
‘내일이면 소식이 들어갈 터. 분명 깜짝 놀라 까무러치겠지?’
무려 그녀의 아버지를 원로회의 의장으로 만들어주었으니 말이다.
원래 원로원의 의장은 투표로 선정한다지만 그건 형식상 그런 거고. 황제가 밀어준다는데 감히 다른 후보를 찍을 수 있는 원로는 없었다. 다른 후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침실에서 함께할 날이 조만간이겠어.’
자신의 계획대로 되리라 굳게 믿는 카일은 옆자리를 손으로 스르륵 쓸었다. 그러고는 달빛 아래에서 금빛 머리칼을 흔들며 가운 사이로 드러난 제 다리를 요염하게 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