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사용인들이 쌓여 있던 선물들을 다 정리하고 나자, 방으로 돌아와 있던 내게 어머니가 찾아오셨다.
똑똑.
“에일린. 들어가도 되겠니?”
“네. 어머니.”
우아한 몸짓으로 들어온 그녀는 내가 앉아있는 침대 끝으로 다가와 나란히 앉았다.
“폐하께서 귀한 선물들을 주셨더구나.”
“보셨어요?”
“그래. 마음 씀씀이가 참 고맙기도 해라.”
“뭐, 드레스나 보석은 제 것도 이미 많은걸요.”
에일린의 집안은 높은 신분인 것 치고는 그리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국에서 손꼽히는 귀족이었다. 적어도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내 반응에 어머니는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단순히 물질의 값어치를 뜻하는 게 아닌 듯했다.
“네 아버지께서 이번에 승진을 하셨어.”
“승진이요?”
“그래. 원로원의 의장이 자리에서 내려오셨거든. 새 의장 후보가 총 세 명이었는데, 그중에서 네 아버지가 선발되셨어. 투표로 뽑히긴 했지만 폐하께서 적극적으로 밀어주셨단다. 네 덕에 폐하께 은혜를 크게 입는구나.”
어머니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환한 미소를 띠었다.
“무엇보다 우리 소중한 에일린이 사랑받고 있어서 엄마는 기쁘단다.”
그녀는 두 팔을 벌려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진심이 담긴 따뜻한 손길이었다.
어머니의 사랑은 고마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바로 집안의 명예보다 딸을 더 귀하게 생각하는 어머니가 보기에도 만족스러울 만큼 황제의 계획은 성공적이라는 것.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따스하게 웃었다.
“그럼 쉬고 있으렴. 나중에 식사 시간 때 보자.”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들어올 때처럼 나갈 때도 가볍고 우아한 발걸음이었다.
이윽고 문이 쿵, 하고 닫히자마자, 내 입에서는 허탈한 한숨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하아.”
상황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것 봐봐. 아버지를 원로원 의장으로 승진시키다니. 확실히 꿍꿍이가 있잖아?
뭔가 노리는 바가 확실한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단 말이지.
나는 한쪽 다리를 꼬아 팔꿈치를 대고 손바닥 위에 턱을 괴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기 위한 자세였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원작과는 전혀 다른 흐름이었기에 별로 똑똑하지 않은 내가 유추를 해봤자 한계만 느낄 뿐이었다.
에일린아. 너 원래 명철했다며. 머리 좀 굴려봐.
이 몸의 본 주인을 소환하고 싶었으나 바람뿐이었다. 그저 머릿속 맷돌을 최선을 다해 돌려봐야 했다.
역사적으로도 황제의 장인이 권력의 핵심이 되는 건 흔한 일.
그러나 내 처지에 적용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무엇보다 내가 빙의하고 나서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게 가장 마음에 걸렸다. 원작에서 그랬으면 당연하다 여겼을 텐데, 상황이 거꾸로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지? 내가 세운 계획은 실행이나 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답도 나오지 않는 걸 혼자서 골머리를 싸매며 끙끙거리다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때마침 다음 날 오전 아드리엔이 공작 저로 찾아왔다.
아드리엔을 보자 잘 되었다 싶어서 그의 팔을 끌어다가 정원 테이블로 데리고 왔다. 서두르는 동작에 끌어 당겨진 그가 당황하여 “어어. 에일린, 왜 그래?”를 연발했지만, 대꾸 없이 어깨를 눌러 의자에 앉혔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올려 턱을 괴고서, 아드리엔 쪽으로 고개를 쭉 내밀었다.
이제 질문을 던질 차례였다.
“아드리엔. 네가 보기엔 폐하가 나한테 왜 그러시는 것 같아?”
“뭐? 무슨 얘기야? 선물?”
“응. 그것도 그렇고 날 위해 파티도 여시고 또….”
리빙스턴 백작의 복수를 했다는 걸 아드리엔한테 말해도 될까?
잠깐 망설이며 고민하는 사이, 화자는 저쪽으로 넘어갔다.
“네가 볼 땐 뭐 같은데?”
“아니, 질문은 내가 했는데 네가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황당함에 물든 내 눈빛을 보자, 아드리엔은 그제야 한 번 생각해보는 듯 턱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글쎄. 정황만 봤을 땐 누구나 같은 생각을 할걸?”
“그게 뭔데?”
“네가 좋으니까 그러는 거지.”
“허.”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비웃음 혹은 허탈한 한숨이 터졌다.
그럴 리가. 그게 사랑일 리가….
부정의 말을 곱씹으며 중얼거리다가 문득 중요한 점을 깨달았다.
솔직히 나도 이쯤 되니 황제의 진심이 헷갈렸다.
원래라면 쳐내야 할 에일린을 쳐내지 않고 도리어 엄청 잘해주고 있으니까.
황제의 애정 공세가 물질과 정신 양쪽 모두를 채우자, 마음에 충족감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드리엔의 대답을 들으니 머릿속에 번개가 번쩍 치는 기분이었다.
중요한 건 사랑한다는 진심이 아니라, 사랑하는 걸로 보인다는 점이야!
진짜 사랑에 빠졌을 때의 카일 황제가 어떤지는 내가 잘 알았다. 원작소설에서 황제가 여주한테 빠져 허우적대는 꼴을 낱낱이 봤으니까.
아멜리아에게 반한 카일은 평소의 계산적이던 성정을 모조리 버리고, 그저 그녀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이행하기만 했다. 원래부터 자의적인 생각이라고는 한 톨도 할 줄 모르던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황제를 ‘사랑에 디버프를 당한 상태’라고 불렀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 나를 향한 황제의 행동이 지극히 정상적인 사랑의 형태로 보인다면?
평소처럼 계산을 한 결과라는 거지.
사랑에 빠지지 않은 황제는 위험하다. 그가 머리를 팽팽 돌리는 한, 대공을 위협할 요소들은 무수히 많았으니까.
이제부터는 그의 작전에 휘말리지 말아야겠구나! 다시 한번 더 결심을 굳게 세워야 했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논리적으로 정리를 해나가고 있는데, 이번엔 아드리엔이 내게 질문을 해왔다.
“에일린 너, 대공님 좋아하지?”
기습적인 질문이었기에 대답도 즉흥적이었다.
“응. 응?”
무심코 대답했다가 깜짝 놀라 되물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아드리엔은 날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알았어?”
“내 눈에는 다 보여. 내가 너를 안 세월이 얼만데.”
“그… 그런 거야?”
그나마 다행이었다.
너 빼고 다 안다고 하면 어쩌나 살짝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질문이 하나 더 이어졌다.
“대공님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아?”
그는 관심 없는 척 퉁명스럽게 물어왔지만, 흘긋흘긋 쳐다보는 시선이 본심과는 정반대라는 걸 알려주었다.
녀석, 대결에서 졌다고 라이벌 의식을 느끼나 본데?
그런 아드리엔이 귀엽게 느껴졌다. 레이몬드를 칭찬할 말이야 차고도 넘쳤지만, 나는 절제된 대답을 골라 꺼냈다.
“멋있으시잖아. 카리스마 넘치고. 거기다가 따뜻하다는 반전미도 있어.”
“음? 그게 다야?”
예상보다 대답이 간결했는지 그가 의아한 낯빛을 띠었다. 나 역시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서 물었다.
“그럼 뭐가 더 있어야 하는데?”
“하긴 뭐. 사랑하는데 달리 이유가 뭐가 있겠어.”
아드리엔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이내 달관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얘가 대체 뭐라는 거야? 누가 들으면 대공이랑 내가 사랑하는 사이인 줄 알겠네.
나는 그의 착각이 더 심해지지 않도록 얼른 지적했다.
“너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내가 가진 건 그런 감정이랑은 달라. 숭상하는 거라고.”
친절하게 정정해주었는데도, 오히려 아드리엔은 자기 이마를 짚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혀. 얘도 자기 마음을 모르는구먼.”
그리고는 뜻 모를 소리를 낮게 중얼거렸다. 무슨 말인지 또렷이 들리진 않았지만, 분명히 내 욕을 한 것 같은데? 나는 그리 확신하며 그를 살짝 흘겨봐주었다.
그렇게 햇살이 닿는 평범한 길 같은 시간은 나를 지나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두운 터널 속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모두의 처지를 뒤바꿀 만한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
카일 황제는 대공을 노리던 시도가 연이어 실패하자, 가면이 벗겨지면서 완전히 기분이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
기분이 좋으면 웃고 화가 날 때면 난폭해졌다.
처음에는 물건에만 하던 화풀이는 언제부턴가 시녀와 시중들한테까지 뻗쳤다.
“세숫물의 온도가 이게 무어냐. 차갑잖아!”
찰싹.
“꺅!”
어린 시녀의 뺨을 커다란 손으로 우악스럽게 때리자, 그녀가 힘에 밀려 바닥에 널브러졌다. 뺨이 얼얼해 정신을 못 차리는 와중에도 어린 시녀는 곧바로 엎드려 목숨을 구걸했다.
“잘못했습니다. 사… 살려주시어요, 황제 폐하.”
그녀가 손을 모아 비비자, 카일이 다가와 손으로 턱을 붙잡아 억지로 들어 올렸다. 뺨을 내리쳤던 그 손으로 말이다.
“네 이름이 뭐지?”
“히… 힐레 테라미입니다.”
방금 때린 사람의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힐레는 테라미 자작 가에서 입양한 평민 출신의 고아로, 귀족 가에 입양될 만큼 명철하고 외모가 단정했다. 갓 스무 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앳되어 두 볼엔 젖살이 올라있었다.
그녀는 황성에 들어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선배 시녀들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두려워 자신들 대신에 어린 시녀를 보낸 것이다.
“제법 미색이 있군. 발육도 좋고 말이야. 그러니 용서해주도록 하지.”
“가… 감사합니다. 폐하.”
엉뚱한 말들이 섞여 있었지만 용서라는 단어를 듣자 급히 감사를 입에 담았다. 카일은 힐레의 몸을 야릇한 시선으로 훑더니, 옆에 서 있는 시종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아이를 당장 몸단장을 시켜서 데려오도록 해.”
“예? 폐하. 그럼 다음 일정은….”
“취소인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아… 알겠습니다.”
그의 표독스러운 눈초리에 시종은 당장 힐레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급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당황스럽고 두려워 눈동자를 떨었다. 한쪽 볼이 잔뜩 부어오른 채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말없이 눈물을 지어야 했다.
이 일이 일어난 후, 테라미 자작은 귀족 회의로 초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