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무엇을 그리 중얼거리고 계십니까.”
“아드리엔.”
대공은 긴 한숨과 함께 그의 이름을 토해냈다. 발작적으로 휘몰아쳤던 거친 감정이 가라앉으며 도로 평상심을 되찾았다.
대공은 아드리엔 덕분에 끊어진 이성의 끈을 다시 연결할 수 있었다. 처음 마주친 낯선 감정에 통제력을 잃고 날뛸 뻔했다는 사실에 놀라 서둘러 심호흡을 이어갔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시면 사람들이 눈치챌지도 모릅니다.”
아드리엔은 남들한테 들릴세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엇을 말이지?”
“예?”
그는 자신의 감정을 외려 남한테 묻는 대공을 보며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설마 아직 자기 마음도 모르는 거야?
황당했지만 굳이 집어 줄 만큼 친절하게 굴고 싶진 않았다. 그도 아직은 에일린을 완전히 포기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대충 농담 식으로 둘러대야 했다.
“아, 그야 뻔하죠. 폐하에 대한 적개심이요.”
“그건 이미 다들 알지 않나.”
“아니죠. 그래도 대놓고 드러내는 거랑은 다르거든요?”
두 사람은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아웅다웅했다.
그때 에일린은 대공과 아드리엔의 높아진 목소리로 그들의 존재를 눈치챘다. 그녀뿐만 아니라 주위에서도 마찬가지였는지 사람들은 두 사람에 대해 입을 모았다.
“어머. 저기 대공 전하와 런 경이로군요.”
“같이 서 있는 걸 보니, 런 가와 혼담이 오갔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봐요.”
“양쪽 다 늠름한 기사라 보기 좋은 한 쌍이네요.”
부인들은 뺨을 붉히며 너도나도 한마디씩을 보탰다.
미남 옆의 미남은 확실히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지 자연스레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누가 들으면 저 둘이 혼담이 오간 줄 알겠네.’
대공이 미남이라는 사실은 더 말하면 입만 아플 뿐이고, 아드리엔도 제법 이목구비가 조화롭긴 했다. 미남보다는 훈남에 더 가까웠지만 취향에 따라 의견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
‘그나저나 소문 한번 빠르구나.’
에일린은 나비엔과 대공 사이에 혼담이 오갔다는 자체만으로도 신경이 쓰였다. 여태 정체되지 않은 채 품고 있던 감정의 정체가 ‘질투’라는 것을 최근에서야 분명히 깨달아가고 있었다.
대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렬한 ‘질투’에 사로잡힌 검호는 순간적으로 앞뒤 분간을 하지 못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의 감정을 완벽하게 눈치채고 있는 사람은 아드리엔 뿐이었다.
‘쳇. 피곤하구만.’
사랑은 감출 수 없다는데, 본인이 깨닫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먼저 눈치챌 가능성이 농후했다. 황제의 약혼녀를 제 2황위권자가 사모한다는 게 알려진다면? 그건 곧바로 내전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사안이었다.
‘이건 다 에일린을 위해서야.’
아드리엔은 일부러 대공의 옆에 딱 붙어서 보호 겸 감시를 했다.
특히 빛을 발한 순간은 황제와 에일린이 춤을 출 때였다.
그때 아드리엔은 거의 10초마다 대공을 말렸다. 그의 손이 자꾸만 검집을 향했던 것이다. 그래서 손을 잡는다던가 말을 걸고 심지어는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기도 했다.
주위로부터 이상한 시선을 받았지만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렇게 긴박한 5분이 지나고 나서야 아드리엔은 겨우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나도 에일린에게 춤을 신청하겠어.”
“대공 전하. 그러지 말고 참으시죠.”
“어째서지?”
‘해방된 줄 알았는데….’
난관은 하나 더 남아있었다.
이마를 짚은 아드리엔은 대공의 팔을 강하게 붙잡으며 그를 사람들이 없는 구석으로 억지로 밀어 넣었다.
“런 경, 나를 왜 자꾸 방해하는 거지?”
“아니, 알만한 분이 그러십니까. 까딱하다가 에일린이 표정 관리라도 잘못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폐하 성격 잘 아시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옳은 아드리엔의 말에 대공의 들끓던 반항심이 쏙 들어갔다.
그의 말대로 카일 황제는 예리하고 간사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에일린의 작은 변화에도 금세 눈치를 챌 것이고, 한 번 튼 의심의 싹은 제 성이 찰 때까지 상대방을 집요하게 괴롭히겠지.
대공은 불도저처럼 밀어붙이고픈 마음을 꾹 눌러 삼켰다. 다 에일린을 위해서였다. 속에 가득 찼던 흥분을 심호흡으로나마 뱉어냈다.
“알겠어.”
“잘 생각하셨어요.”
아드리엔은 대공을 위로하기 위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주 오랜 기간 짝사랑을 해온 그는, 사랑의 선배로서 대공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우정을 오해하는 시선들이 스멀스멀 피어나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레이디들이었다.
한 레이디가 대공을 몰아세우는 아드리엔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대폭 낮추며 옆의 레이디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저기, 저기 좀 봐봐.”
“응? 뭔데?”
“저 둘이 뭔가 있는 것 같지 않아?”
두 레이디는 고개를 돌려 두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신분이 한참 높은 대공은 아드리엔의 무례한 행동에 화를 내기는커녕,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뭔가 분위기가 뜨거운데?”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나비엔과의 혼담을 거절했다던데, 알고 보면 그녀의 오빠를 사랑하는 거 아닐까?”
“어머머머.”
때마침 아드리엔이 대공의 어깨를 토닥이고 있었다. 아주 다정해 보이는 스킨십이었다.
“진짜 그런 거 아냐? 저 쓰다듬는 손짓 좀 봐.”
“사실인가 봐. 미남은 미친놈 아니면 게이라더니.”
레이디들은 그렇게 숙덕거렸다.
이윽고 음악이 멈추자 춤을 추고 있던 귀족들이 중앙에서 가장자리로 싹 물러났다. 시종장의 말에 따라 황제의 발표가 있을 예정이었다.
에일린은 대체 무슨 발표일까 궁금해하며 카일의 옆에 서서 얌전히 기다렸다. 홀 안이 정리되자 곧 시종장인 리빙스턴 백작이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 이 파티는 고귀하신 황제 폐하께서 약혼녀이신 코웻 공녀님을 위해 여신 자리입니다. 이 행사의 마지막 순서로 공녀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함께 보십시다.”
시종장의 눈짓에 문지기들이 홀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자 시녀 시종들이 각자의 손에 선물들을 들고서 퍼레이드를 하듯이 줄지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와아.”
“정말 대단한 선물들이에요!”
그들은 운반해 온 보석과 드레스, 각종 귀한 옷감과 값진 물건들을 홀 중앙에 쌓아두었다. 귀족들은 그 화려함과 눈부심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전혀 예상 못 한 이벤트에 에일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반짝이는 낯선 것들을 바라보았다.
“폐하. 이게 다 무엇인가요.”
“에일린에게 주고 싶어서 준비한 거라오. 나의 정성이지.”
황제는 그녀의 눈동자에 선물들이 비치는 것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 세상에 반짝이는 걸 싫어하는 여자가 있을까.
고로 물질 공세를 한다면 그 어떤 귀족이라도 열망하며 매달릴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 많은 걸 어찌….”
부담을 느낀 에일린이 말을 잇지 못하자, 황제는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귓가에다가 붙이며 속삭였다.
“실은 이중의 절반은 리빙스턴 백작의 주머니에서 나왔소.”
“예? 어째서요?”
“시종장의 아들이 그대에게 무례하기 굴었다지. 그 아들놈의 혀를 잘라버리려다가 하도 사정사정하기에 그대를 위한 선물 준비에 동참하는 걸로 합의했다오.”
“아.”
에일린이 놀라 입이 열린 채로 올려다보자, 황제가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표정이 마치 나 잘했지? 라며 묻는 듯했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천천히 내뱉었다.
“고맙습니다. 황제 폐하.”
“뭘 이 정도로.”
이때 에일린의 머릿속에는 이 두 가지 문장만이 떠올랐다.
‘황제도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구나.’와 ‘나를 위한 복수를 해주었다.’
이 남주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 아닌 환심을 사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자신조차도 이토록 흔들어 댈 수 있는 것이다. 가려운 곳을 명확히 찾아내어 긁어주는 기분이었고, 한편으로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소름 끼쳤다.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군.’
대공은 멀리서 못마땅한 눈으로 이 사태를 관람하고 있었다. 굳이 성대한 파티를 열고 공개적으로 선물증정식까지 한다는 건, 황제가 작정한 목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결혼식을 치를 생각은 하지 않고 겉만 번지르르하게 칠해대는 걸 보면 역시 최종목적은 ‘여론조성’이겠지.
사람들은 황제의 작전에 휘말려 그의 다정함을 칭송해댈 것이다. 제 연인에게 지고지순하게 굴고 아낌없이 베푸는 걸 보면서, 뭇 여인들의 이상형으로 자리매김할 테지.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성군의 이미지로 세탁하려는 것이다.
노림수가 뻔했다.
결국 황제가 원하는 것은 에일린 자체가 아니라 약혼녀인 코웻 공녀였다.
그런데 대공은 그 사실이 화가 남과 동시에 묘하게 안도가 되었다.
에일린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 같아 분이 일면서도, 반드시 그 자리를 에일린이 지킬 이유가 없다면? 하는 생각에까지 미친 것이다.
대공은 머릿속을 복잡하게 채운 채로 파티의 남은 시간을 조용히 보냈다. 그러고는 에일린이 공작 저에 무사히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 역시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
파티 다음 날, 나는 의자에 앉아 방 한쪽 구석을 빛이 없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황제가 파티에서 준 선물들을 오늘 오전에 공작 저로 배달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각종 보석과 드레스, 옷감, 값비싼 장식품 등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세상에. 이 많은 선물들 좀 봐요.”
“어머. 우리 아가씨. 정말 좋으시겠어요!”
공작 저의 사용인들은 그저 좋아하며 박수를 쳐댔다. 약혼자의 사랑을 받는 약혼녀는 행복한 법이니까. 하지만 복잡한 사연을 가진 나로서는 이 상황이 상당히 꺼림칙했다.
어제 황제는 나에게 두 가지 선물을 주었다.
하나는 물질이고 다른 하나는 복수. 재수 없는 리빙스턴 백작이 울면서 재산을 토해내게 만들었다니 실로 사이다 같은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황제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그가 나를 작정하고 꾀어내려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어째서 원작과는 다르게 나를 쳐내지 않고 도리어 가까이하려는 것인지, 그 의중을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직감에 근거를 보태는 일이 한 가지가 더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