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그 주인공은 대공이었다.
“레이몬드?”
나는 서둘러 창가로 다가가 유리문을 열었다. 그러자 급히 달려온 모양인지 얼굴이 잔뜩 상기된 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에일린. 쪽지를 받고 바로 달려왔어.”
“헛. 내일 이야기해도 괜찮은데….”
괜히 야밤에 불러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일었는데 그는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었다.
“내 마음이 급해서 왔어.”
“…잘 오셨어요.”
안 그래도 보고 싶었는데.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의 방문이 무척이나 기뻤다.
요즘은 황제와의 접촉이 잦았기에 마음을 정화하고 항마력을 증진하기 위해서는 더욱 긴 대공과의 접촉이 간절했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소파 자리를 권하고는 서랍에서 초대장을 가지고 와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데 별안간 레이몬드가 벌떡 일어서더니 내 옆자리로 와 앉아버렸다.
어. 어라? 내가 황제랑 있었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했던가?
그가 황제와 똑같이 행동하는 것을 보자 순간 머릿속이 헷갈렸다.
내가 어안이 벙벙하여 있으려니 대공이 그런 나를 마주 보며 입술을 열었다.
“소파 사이가 멀어서. 초대장을 같이 보려고.”
“아하.”
그럼 그렇지. 레이몬드가 따로 뜻이 있어서 행동한 거였구나.
나는 봉투에서 초대장을 꺼내어 그에게로 내밀었다. 그러자 대공이 내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그 순간 청량한 향이 내 코를 덮쳐왔다. 황제의 것과는 종류가 다른 안정감을 주는 체향이었다. 그 싱그러움에 나도 모르게 코를 벌렁대며 킁킁거렸다.
아, 프레쉬한 이 향기. 더 깊이 맡고 싶다.
향기에 취한 나는 시나브로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땐 그의 얼굴이 바로 지척에 있었다.
다행히도 레이몬드는 초대장을 읽느라 나를 보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우연히 잡아낸 행운을 누리기 위해서 그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부드러운 선을 그린 듯 시원한 눈매 안에는 푸름으로 꽉 찬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누군가는 무섭다고 여기는 저 눈이 내게는 너무나 순하고 유하게 여겨졌다.
그렇게 하나씩 뜯어보며 감상하고 있는데 그만 눈을 들어 올린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 속에 내 모습이 비치자, 가슴이 두근두근 떨리고 간지러웠다.
“에일린.”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대기 중에 아득히 퍼졌다. 내공을 담은 것처럼 심장을 흔들어대고는 내 몸 구석구석으로 뻗어 나가는 중이었다.
우리의 코끝 거리가 한 뼘쯤은 될까.
내 귓속으로 들리는 심장의 쿵쾅거림이 그에게도 들릴까 염려될 만큼 가까웠다.
어쩐지 점점 더 사이가 가까워지는 듯한 기분에 휩싸여있을 때였다.
푸드덕 푸덕.
커다란 날개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관통했다.
낯선 소리의 등장에 어깨를 움찔거린 우리의 고개가 동시에 창가를 향했다. 열린 문틈으로 들어온 옥희가 테이블 위에 막 내려앉았다.
녀석은 자신의 등장을 뽐내며 의기양양한 포즈를 취했다. 제 할 일을 다한 자신을 칭찬해달라는 것처럼 보였다.
“옥희 왔니?”
“어서 와. 옥희야. 수고했어.”
“옥옥!”
옥희는 반기는 인사와 수고했다는 칭찬에 만족한 듯 짧게 울었다.
다시 마주친 대공과 나 사이에는 쑥스러운 기류가 흘렀다.
레이몬드는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목을 가다듬고서 나를 불렀다.
“크흠. 에일린. 이 파티 초대장 말인데.”
“네. 레이몬드.”
“이건 내게도 왔어.”
“레이몬드한테도요?”
“그래.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그는 다시 한번 더 초대장에 눈길을 주었다.
사실 초대장을 직접 보여주고 싶진 않았는데….
그 이유는 거기에 적힌 내용 때문이었다.
[에일린. 그대를 위해 성대한 파티를 열고 싶소.
나의 파트너로서 자리를 아름답게 빛내주시오. 그대의 카일로부터.]
다정하게 적힌 멘트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황제가 개최할 파티는 무려 내 이름을 건 행사였다.
대체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레이몬드와 의논을 하고 싶었던 거지만.
대공에게는 황제와 친한 모습을 단 한 톨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게 설령 전부 꾸며진 가짜라고 해도 말이다.
“별일 없을 거야. 나도 참석할 테고. 같이 가자.”
“네. 알았어요.”
대공은 마음을 달래듯이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나는 믿음직스러운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
파티 당일.
무려 황성에서 개최한 파티였다. 그것도 내 이름을 걸고서 말이다.
이는 가문의 영광이었고, 공작 저에서는 전쟁을 방불케 할 만큼 난리가 난 게 당연지사였다.
내가 그 어느 때보다도 힘주어 꾸며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목욕재계하고 향유를 몸과 머리칼에 바르며, 꽃잎의 색소를 이용하여 곱게 화장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늘 착용할 드레스와 보석은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 왜냐면 황제가 이번 파티용으로 미리 선별하여 보내왔기 때문이다. 아주 특별한 드레스라면서 말이다.
“와아아.”
“정말 예뻐요.”
디자이너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직접 가져온 드레스는 순백의 드레스였다.
상체는 하트 모양으로 가슴을 가리고 허리는 잘록하게 들어갔으며, 그 아래 치마가 A 모양으로 퍼진 디자인에다가 온통 다이아몬드가 박혀있었다. 걸어 다니면서 몇 개만 떨어져도 저게 다 얼마야? 싶을 만큼 보석이 은하수를 형성하고 있었다.
하얀 피부에 하얀 드레스, 그리고 머리카락 색깔에 맞춘 은은한 분홍빛 액세서리까지. 전신거울 앞에 선 에일린의 모습은 누가 봐도 시선을 떼기 힘들 만큼 눈이 부셨다.
과연 파티의 주인공다운 비주얼이라 할 만했다.
그런데 드레스를 고르느라 계속 입었다 벗었다 하지 않아서 편하긴 했지만, 이건 또 이것대로 부담스러웠다.
순백의 드레스는 모두가 알다시피 결혼식에서 신부가 입는 것이다. 고로 보통의 파티에서는 잘 선호하지 않는데, 왜 굳이 순백의 드레스를 입으라고 했을까? 당장 결혼식이라도 치를 셈인가? 그의 저의가 두려우면서도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다그닥 다그닥.
마차가 황성의 대문을 쉽게 통과했다.
대문에는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 온 귀족들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황성의 기사들이 초대장을 보며 하나하나 신분을 확인하는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신분이 확실한 나는 당연히 프리패스로 쉽게 통과했다. 오늘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말이다.
문지기들은 마차에서 내린 내 얼굴을 보자마자 파티장으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었다. 힘주어 꾸민 내 모습을 보고 놀라움과 경탄에 젖은 표정들이었다. 그리고 나를 발견한 홀 안의 귀족들의 얼굴에도 똑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곧 수군거리는 말소리와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와, 코웻 공녀 맞죠? 정말로 아름답네요.”
“황제께서 아끼신다는 게 사실인가 봐요. 저 드레스 좀 봐봐요.”
“저렇게 예쁘니 그럴 만도 하네요. 어후. 놀라워라.”
전생에서 평범녀로 평범한 삶을 살았던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의 관심과 시선을 한몸에 받으니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 싶은 걸 꾹 참고 오히려 턱을 높이 치켜들며 당당하게 걸었다.
“코웻 공녀님. 안녕하십니까.”
“파티 주인공의 행차로군요.”
내게로 쏟아지는 인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당차게 걸어 들어갔다.
황제는 이미 홀 안 상석에 앉아있었다. 나를 발견한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 역시 파티라 신경을 썼는지 화려한 백색 제복 차림에다가 평소보다 더 많은 장식이 달려있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나는 가슴에 손을 살짝 얹은 채로 인사를 드렸다. 이윽고 굽힌 허리를 세우자, 황제가 볼이 상기된 채 내게로 가까이 왔다.
“그대, 에일린. 정말로 아름답소.”
황제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이런 적극적인 스킨십은 처음이라 살짝 움찔했지만 카일의 파트너였기에 그에게 팔짱을 끼었다. 그러고선 주변을 훑으며 대공을 찾았다.
약혼녀의 신분이라 공식적으로 황제의 파트너일 수밖에 없지만, 마음만은 대공의 곁이었으니까.
그러나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지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옅은 한숨을 내쉰 나는 조금 더 기다리기로 마음먹으며 황제와 함께 홀을 거닐었다.
***
대공은 말이 아닌 마차를 타고 황성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직접 황성을 찾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황족으로서 신분이 확실한 그는 의례적인 확인 없이도 통과되는 게 맞았다. 하지만 황명을 받은 기사들은 분명 그에게 무안을 주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거부하리라 예상했다.
그래서 대공은 의도적으로 늦게 출발하였고, 귀족들의 마차 행렬이 끝날 즈음에야 나타났다.
거의 마지막 차례로 파티장 문을 통과한 대공은 드넓은 홀 안을 눈으로 쓸었다. 그를 마주치는 귀족마다 인사를 건네왔지만, 그는 간단하게 화답하며 다시 주변을 살피는 것에 몰두했다. 그가 찾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다.
‘에일린.’
드디어 목표지점을 발견했다. 대공은 황제와 나란히 서 있는 그녀를 찾았다. 카일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이미 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참을만했다.
하지만 백색의 드레스를 입은 에일린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만큼 아름답고 충격적이었다. 누구라도 그녀를 본다면 당장 청혼하고픈 충동에 휩싸이리라 믿어지는 미모였다.
사람은 가까운 곳보다는 멀리서 더 잘 보이는 경우가 있다. 지금의 에일린이 딱 그랬다. 곁에서 웃고 있을 때보다도 저기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웃고 있는 그녀는 꽃처럼 화사했다.
그녀는 한 떨기의 청초한 장미고,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은 그녀를 돋보이게 만드는 안개꽃이었다. 그만큼 대공의 눈에는 오로지 에일린만 돋보였다. 그녀뿐이었다.
그러자 참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곧 기만이라는 걸 깨달았다.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소중하고 어여쁜 이를 보자 대공의 손에 땀이 배었다. 꽉 쥔 주먹은 어느새 허리춤에 찬 검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고 있었다. 순간 모든 방해꾼을 베어버리고 그녀를 쟁취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베어버릴 것이다. 베어….’
주문을 외듯이 중얼거리던 그때 차가운 감촉이 손등에 닿았다. 꿈쩍 놀라 정면으로 향하고 있던 시선을 돌리자, 옆에 선 아드리엔이 그를 보며 싱긋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