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레이몬드는 내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나와 춤을 추겠소?”
아아. 맞아. 파티에서는 춤추는 게 있었지?
그리고 대공이 혈육인 황제의 약혼녀에게 춤을 신청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고 말이지.
나는 승천하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억누르며 그의 손 위에다가 손을 겹쳐 올렸다.
하지만 내게는 간과하고 있던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내가 춤을 못 춘다는 것!!
어… 어쩌지?
지난번에 황제랑 파티에 갔을 때는 생각해놓고 그새 잊어버리다니.
사교계에 데뷔한 지가 꽤 된 에일린은 기본 춤은 익히고 있을 터. 평소 발레수업을 받고 있긴 했지만, 내가 빙의한 후에 사교댄스를 배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긴장으로 등과 목이 뻣뻣해지자 변화를 눈치챈 레이몬드가 속삭이듯이 물어왔다.
“왜 그래, 에일린. 어디 불편한가?”
“제가 춤을 잘 못 춰서요.”
내가 믿을 건 원래의 에일린이 사교장에는 잘 나오지 않고, 나왔다 해도 금방 돌아간다는 사실이었다. 경험이 적으면 서투를 수 있다는 건 좋은 핑곗거리였다.
살짝 눈이 커진 레이몬드는 뭐가 우스운지 내 말에 큭큭거렸다.
우씨, 난 심각한데. 놀리지 말라고요.
“에일린, 괜찮아. 내가 도와주지. 이끄는 대로만 따라오면 돼.”
“알…겠어요.”
그래. 레이몬드를 믿자.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발을 움직여보자.
나는 그렇게 단단히 다짐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겠다는 나의 다짐은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왜냐면 대공이 손을 마주 잡은 쪽 말고 반대편 손을 들어 팔로 내 허리를 감았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바짝 당겨 자신의 몸에 밀착시켰다.
그 순간 내 시야에 레이몬드의 가슴이 꽉 차면서 코에는 그의 체향이 훅 끼쳐왔다.
혹시 이건 환각제인가?!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 상태로 춤을 추기 시작한 나는 솔직히 말하면 스텝을 어떻게 밟았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직 레이몬드의 근육의 움직임과 숨결, 체향에 빠져있느라 그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음악이 바뀌고 춤이 끝나자, 대공은 한쪽 손을 잡은 채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본능이 다급하게 속에서 빽 외쳤다.
떠… 떨어지기 싫어, 싫다!! 정녕 이대로 끝인 거야?
하지만 보는 눈이 많은 파티장에서 언제까지 그와 붙어있을 순 없었다. 우리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된 것처럼 아련하게 멀어졌다.
그리고 레이몬드와 떨어진 그때 한 젊은 남성이 내게로 다가왔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며 신사답게 허리를 우아하게 굽혔다.
“안녕하십니까. 코웻 공녀님. 저는 길힌 후작 가의 영식 패트로입니다. 제게도 함께 스텝을 밟아볼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대공과 춤을 추고 났더니 기다렸다는 듯 춤을 신청하는 자가 있었다.
내가 황제의 약혼녀인 만큼 함부로 다가오긴 힘들지만, 영광스러운 기회임은 분명하니까 용기를 낸 듯했다.
“어… 네.”
향내 좋은 커피를 마시고 나서 남은 여운을 느끼고 있는데, 난데없이 청량음료가 나타나 청량감을 주겠다고 나선 꼴이었다. 입안을 따갑게 헤집는 기분이 썩 좋지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이유도 없는지라 마지못해 승낙했다.
대공은 어디에…?
나는 반사적으로 레이몬드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 춤도 못 추는데 끌려가고 있는 내 신세에 한탄하며 동감을 얻고 싶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레이몬드는 화가 나 있었다. 그는 두 팔을 꼰 채 아주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아드리엔과 마주쳤을 때의 대공의 태도가 다시금 떠올랐다.
왜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지? 혹시 패트로 기린이랑도 사이가 안 좋나?
악역이라서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이 많은 걸까?
그런 의문이 들었으나 달려가서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눈앞의 상황에 집중해야 했다.
우리는 한 손은 마주 잡았고, 패트로의 다른 손은 내 허리춤에 살짝 얹혔다. 내 허리를 강하게 휘감은 대공과는 사뭇 다른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아마도 내 춤 실력을 굳게 믿고 있나 본데 그러다가 큰코다치지.
역시나 춤이 시작되고 나자, 나는 패트로의 발을 번갈아 가며 사정없이 밟아댔다.
“윽.”
“어머 또. 정말 미안해요.”
“괜… 괜찮습니다. 공녀님.”
아휴. 이것으로 벌써 여섯 번째. 미안해 죽겠네.
나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닌데.
패트로처럼 겨우 기본만 뗀 춤 실력으로는 초보인 나를 리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김없이 발을 밟아대며, 춤인지 공격인지 모를 시간이 지속되었다.
대공이 얼마나 나를 잘 이끌어주었는지 비교가 되는 순간이었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하하. 그럼 전 이만.”
음악이 끝나고, 패트로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부리나케 멀어졌다. 약 5분간 이 순간을 간절히 기다렸겠지.
그 후로는 다행히 춤 신청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원래 에일린의 성격 덕분인 듯했다. 도도하고 고고한 그녀는 아무나와 춤을 추지 않았을 테니까.
맞아 그럴 거야. 내가 저 영식의 발을 난도질해놨기 때문이 아니라고.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서 대공 쪽을 보았다.
레이몬드는 나와 패트로가 떨어지고 나서야 눈에 깃든 살벌함을 거두었다. 분명히 패트로 길힌과 사이가 좋지 않은 거다.
***
파티장에서 돌아오고 나자, 나는 한동안 파티 후유증에 시달렸다.
어떤 후유증이냐면 자꾸만 대공이 생각나는 거였다. 원래도 그렇긴 하지만 거의 상사병이 재발한 느낌이었다.
대공과 춤을 춘 이후로는 그와 춤을 추는 동안에 느낀 촉각과 후각, 그리고 그와 함께 합을 맞춰 움직였던 감각만이 머릿속에서 계속 상기되고 있었다.
코알라처럼 레이몬드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 욕망이었다.
내가 이렇게나 변태였다니….
소설 속에 존재하는 최애라 그런 거겠지. 2D를 대상으로는 소유욕을 품어도 도덕적인 제재가 가해지지 않으니까.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대공과 애인이 되고 싶었던 걸까?
감히 어찌…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바라게 되는 마음이 한쪽 구석에서 피어나고 있음을 부정할 순 없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
처음에는 얼굴만 보면 좋겠다 싶다가도, 얼굴을 보다 보면 옆에 있고 싶고, 옆에 있다 보면 손도 잡고 싶고 그다음으로는 안고 싶고, 결국 키스도 하고 싶은 거겠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던 최애가 나만의 것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다니, 대체 언제 이렇게 마음이 자랐지?
여태 스스로를 속이려고 애써 외면해왔던 걸지도 모르겠다.
***
며칠째 심란함에 잠겨있을 때 황제로부터 호출이 왔다.
그래서 나의 혼란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현재 내가 집중해야 할 목표는 ‘황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그가 나를 내치게 만들지를 틈틈이 고민해왔다. 아무쪼록 약혼녀의 자리에서 내쳐져야만 내 모든 계획이 원만하게 돌아갈 테니까.
그래서 연구해봤는데, 매력을 떨어뜨릴 만한 모습을 보여주면 어떨까?
예를 들면 지저분한 행동을 하는 거지.
가장 원초적이면서 확실한 방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흐흐. 황제야, 어서 나를 떠나주렴!
나의 완벽한 계획을 곱씹으며 속으로 황제와 이른 작별인사를 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에일린.”
황성에 도착한 나는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후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가능하면 그에게 잘 보이는 지점으로 의자의 위치를 살짝 틀면서 말이다.
내가 자리에 앉자, 시녀들이 내 몫의 디저트와 차를 내온 후 물러갔다. 그러니 이제 행동을 개시할 때였다.
마음속으로 작은 각오를 다진 나는 손가락으로 코를 비비다가 코를 파듯이 매만졌다. 황제가 은근히 눈여겨볼 수 있도록 코로 킁킁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말이다.
원래 이런 더러운 행동은 감출 듯 말 듯 해야 밥맛이 떨어지는 법이다. 나는 그의 시선이 내게로 머무는 걸 느끼면서도 모르는 척 행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원래라면 보기 싫어서 얼굴을 찡그리거나 고개를 돌리는 게 일반적인 반응인데. 황제는 웬일인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점차 움츠리게 되었다.
“에일린. 콧속이 불편한가?”
급기야 대놓고 물어보기까지 하자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아, 네. 하하.”
민망함은 오로지 나의 몫이었다. 얼굴에 열이 홧홧하게 올라 새빨개진 게 느껴졌다.
“잘 안 되면 내가 해주지.”
“네? 아, 아니에요.”
황제가 내 얼굴로 손을 뻗을 때는 하마터면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나는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이… 이제 다 했어요. 괜찮아요, 폐하.”
“그렇다면 다행이군.”
황제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듯 안심하며 도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내 눈동자는 마구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럴 수가. 어째서 통하지 않는 거지.
그는 보통 사람보다, 그리고 나의 예상보다 훨씬 비위가 좋은 모양이었다.
그 사실은 나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코를 벌렁대는 모습이 꼭 토끼 같군.”
“….”
그 마지막 한마디는 내게 제대로 쐐기를 박았다.
그래. 얼마나 비위가 좋나 두고 보자.
나는 이번 일로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다음번에는 장기간 준비를 했다. 황제가 부를 날짜를 예상하여 며칠 동안 아예 씻지를 않았다. 스스로가 찝찝했지만 목표를 위해서 이 정도는 참고 견뎌야 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황제의 부름을 간절히 기다리던 나는, 시종이 말을 전하러 오자마자 부리나케 황성으로 달려갔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황제가 잘 보일만 한 곳에 앉은 나는 이내 몸을 긁기 시작했다. 상체 위주로 가슴과 배, 등을 집중적으로 긁다가 머리까지 긁었다.
“요즘은 별 탈 없소?”
“폐하께서 돌보아주시는 덕분에요.”
나는 입에 발린 말을 하면서도 긁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긁는 행위가 점차 황제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