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로건 백작 가의 파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레이몬드의 말대로 과연 로건 백작은 중립세력이었다. 대문을 통과하는 손님 중에는 황제 쪽 인사와 대공 쪽 인사가 양쪽 다 보였다. 좀처럼 같이 있을 일이 없는 자들이라 그런지, 파티장에는 어색한 기류가 덩달아 흐르기도 했다.
나는 대공과 함께 파티장에 간다는 설렘 때문에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그래서 제법 이른 시간에 백작 가에 도착했고, 좋은 자리를 선점해 앉은 채로 사람들을 하나씩 관찰했다. 물론 내 뒤에는 코아가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로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문지기와 집사였다.
로건 백작은 입구 근처에 서 있다가 지위가 높은 귀족들만 골라서 다가갔다.
주최자 한 명이 모든 사람을 맞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당연했다. 나중에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되면 그때는 돌아가며 인사를 나누겠지.
백작보다 높은 건 후작이려나.
음? 저 사람은 후작인가 보군.
누가 누군지 아직 잘 모르는 나로서는 그저 그렇게 추측을 할 뿐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끼익.
곧 번쩍번쩍한 마차 하나가 저택 앞에 당도했다.
주변이 순식간에 정적이 감돌더니 다시 시끌시끌해졌다. 누군가 대단한 사람이 나오려나 보다.
나는 사람 구경을 좋아하기보다는 레이몬드를 기다리는 중이었기에 그저 턱을 괴고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대공은 저런 금칠한 마차를 타고 다니지 않으니까.
“여기가 로건 백작 가인가?”
이윽고 금색 마차에서 문이 열리더니 한 인영이 튀어나왔다. 반들반들한 하얀색 턱시도 차림의 남자는 내리자마자 옷에서 먼지를 털어내며 턱을 치켜든 채로 파티장을 휘 둘러보았다. 그를 보려고 몰려온 사람들의 등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동작이 퍽 거만하게 느껴졌다.
대체 누구길래 저 난리람?
인사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지더니 남자는 무수한 인파를 헤치고 나오며 얼굴을 드러냈다. 그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재수 없는 인간이었다.
허. 디엘 리빙스턴.
꼴도 보기 싫은 면상이 눈앞에 나타나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디엘은 아버지인 리빙스턴 백작과 같이 이곳을 찾은 모양이었다. 그의 뒤에 선 중년의 남자는 간신의 상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약삭빠르게 생겼다.
저자가 바로 재수 없는 인간들의 중심이로군?
리빙스턴 백작을 비롯하여 그의 집사, 같이 왔던 조사관, 아들 그리고 황제까지 예쁜 구석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이들이었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이 딱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시종장님. 누추한 곳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반갑군.”
누가 보면 본인이 황제인 줄 알겠네.
일종의 대행인 건 맞지만, 권력을 등에 업고 거만하게 구는 꼴은 썩 보기 좋지 않았다.
그나저나 로건 백작이 중립인 게 확실하네. 황제의 시종장과 대공을 함께 파티에 초대하다니.
아닌 게 아니라 황제의 시종장은 귀족들의 중심일 테니 초대는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물론 초대에 응하느냐의 여부는 그의 마음일 테고.
나는 최대한 시선의 영역에서 멀어지기 위해 앉아있던 몸의 방향을 돌렸다.
어차피 저쪽과 이쪽은 인싸와 아싸의 영역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만 말이다.
리빙스턴 백작과 디엘은 사람들의 중심으로 등극했다. 귀족들은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판도는 곧 뒤집혔다.
“루슬로 대공 전하 드십니다.”
문지기의 목청 좋은 외침은 파티장 전체를 관통했다. 그 목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입구로 집중되었다.
이윽고 화려하진 않지만 우아한 고전미가 흐르는 마차가 문 앞에 당도했다. 마차 문이 벌컥, 하고 열리더니 키가 큰 인영이 고개를 숙이며 나왔다. 레이몬드였다.
과연 대공은 모든 이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거기에는 내 시선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눈에서 꿀이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그의 턱시도 자태는 예상대로 환상적이었으니까.
아아아. 사진. 동영상….
현기증이 일어날 만큼 눈부신 장면을 간직할 수 없는 아쉬움에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사람들 안에는 황제의 세력도 있어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가 섞여 있긴 했지만 단연코 그의 존재감만은 확실했다.
경외하는 시선들이 압도적이었다. 잘 나타나지 않아 보지 못한 사이에 더욱 늠름해진 모습에 모두 눈을 떼지 못했다. 특히 레이디들은 그를 보자 쑥스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뭔가 변화가 있긴 있나 보다. 원작의 소설 속에서는 악역이라고 무서워하며 기피하기만 하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황제와 대공의 정치 구도가 바뀐 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대공의 세력이 우위를 점하는 상황은 소설 속 분위기마저 바꾸어놓았다.
“이게 누구신가. 루슬로 대공님 아니십니까.”
그때 여태껏 중심이었던 리빙스턴 백작이 큰소리로 외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흐름을 도로 자신에게로 끌어오려는 시도인 듯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리빙스턴 백작.”
리빙스턴 백작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원래라면 최소 30도로 허리를 꺾는 것이 원칙에 맞으나, 그는 그것을 어겼다. 부르는 호칭도 ‘전하’가 아닌 ‘님’이었다.
상대 세력을 경계하는 지극히 정치적인 태도였지만 또한 명백히 하극상이었다. 이에 루슬로 대공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대공의 미약한 반응에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걸까. 리빙스턴 백작은 뻔뻔하게 말을 이어갔다.
“사교장에는 좀처럼 잘 나오지 않는 분이 행차하시다니 놀랐습니다.”
“특별히 나들이 삼아 나와 보았지. 그런데 그사이에 기강이 엉망진창이 되어있군.”
“…네?”
한 박자 늦게 반격이 들어와서일까. 리빙스턴 백작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일개 귀족 나부랭이가 황족에게 예를 다하지 않다니. 황족의 지위가 그것밖에 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황족과 동격으로 여기는 것인가.”
“그…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감히 황제 폐하와 동격이라니.”
그는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었다.
대공은 허리춤에 매달린 장검을 칼집 채로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칼집 끝으로 리빙스턴 백작의 얼굴 아래에 갖다 대어 턱을 추켜세웠다. 백작은 식은땀을 흘리며 몸이 굳어버렸다.
“그것이 아니면서 어째서 아직도 고개가 빳빳한 거지? 황족에게 말이야.”
“죄… 죄…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백작은 반항할 생각도 못 하고서 벌게진 눈으로 잘못을 고했다. 긴장 때문에 입안이 바짝 말라 마른 침이라도 삼키고 싶었지만, 목젖을 꿀렁였다가는 칼집에 짓눌릴 것 같아 꾹 참아내었다.
“이번 한 번은 용서해주지.”
대공은 칼집을 거두어 다시 허리춤에 꽂았다. 그러자 콜록거리며 목을 가다듬은 백작은 지적받은 동작을 고쳐 바로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인사를 잘하는지 냉기 서린 눈으로 지켜보던 대공은 이제야 흡족했는지 살기를 거두었다. 그리고는 반쯤 뒤돌아서면서 더 강한 한방으로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듣자 하니 자네의 아들이 시종장과 황제 폐하와의 사담을 사람들에게 실어 나른다는군. 들은 귀들이 아주 많아.”
“예… 예?”
“시종장의 입이 가벼우면 바람 한 줄기에도 목숨이 날아가는 법이지.”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긴 다리를 이용해 안쪽으로 저벅저벅 들어왔다.
그 얘기를 들은 디엘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버지의 칼날 같은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거의 실신할 듯 몸을 떨었다.
“따라와라. 디엘.”
“예. 아… 아버지.”
곧 디엘은 아버지의 손에 끌려가다시피 하며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꽁무니를 빼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내 쪽으로 걸어오는 레이몬드를 보고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친 그는, 조금 전의 행동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상냥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치 ‘에일린.’하며 부르는 그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우리가 다정하게 눈인사를 나누는 것과는 반대로, 파티장의 분위기는 한겨울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곧 모습을 감춘 리빙스턴 일행으로 인해 한결 나아지긴 했지만 말이다.
나 역시 대공의 악역다운 면모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날이 선 칼을 빼 들지 않고 칼집으로만 노리는데도 살이 떨리는 기분이었으니까. 그의 날카로운 카리스마는 자신이 상대가 아님에도 어깨를 움츠릴 만큼 기세가 대단했다.
그 점이 바로 대공의 멋진 모습이라고요!
그저 열렬한 대공 바라기인 나는 희열을 느꼈다.
그나저나 내 마음에서는 한 가지 의문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혹시 대공이 들은 걸까? 디엘이 나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려고 내뱉었던 말들을 말이다.
하지만 조금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뭐, 설마 그것 때문에 그러겠어?
시종장이 하도 건방지니까 교육시킨 거겠지.
아무쪼록 레이몬드가 리빙스턴 백작을 혼낸 것이 겸사겸사 나의 복수도 되었으니까 기분은 좋았다. 나를 보는 그를 향해 ‘고마워요.’라며 입 모양을 전했다.
그리고 파티가 끝난 날 밤, 퍼먼트에는 간만에 장대비가 시원하게 쏟아져 내렸다. 사교계에서는 디엘이 아버지에게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처맞았다는 소문이 돌았고 말이다.
***
대공과 나는 친분이 있다는 사실이 비밀이었으므로 파티장에서는 서로를 모르는 척했다. 공식적으로 황제의 사람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대신에 내가 요리를 먹으며 조금씩 자리를 이동할 때마다, 대공은 몇 걸음 떨어진 채로 나를 따라다녔다. 그러고는 내가 먹었던 걸 맛보며 웃기도 하고 이마를 찡그리기도 했다.
저 귀여운 자를 어찌할꼬.
마음 같아서는 곁에 딱 붙어서 재잘대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저 눈으로만 힐끔거려야 했다.
에라이. 배나 채우자!
신나게 먹고 있는 틈에 어느덧 음악이 한 차례 바뀌었다.
부드러운 왈츠의 선율은 어느 정도 배를 채운 사람들을 춤의 자리로 이끌었다.
“코웻 공녀.”
그때였다. 대공이 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