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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46화 (46/125)

46화

런 아드리엔. 유명한 검술 명가의 맏아들.

그는 에일린과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문에서부터 서로 알고 가깝게 지냈다.

두 사람의 친밀함은 유년기에서 시작되었기에, 어딘가 달라진 듯한 에일린을 아드리엔은 눈치채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에일린을 좋아했으니까.

자신이 와줘서 기쁘다는 표현을 하거나, 달달한 디저트를 잘 먹는 건 이전의 그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분위기가 밝아졌다고만 느꼈는데, 명백한 증거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올랐다.

먼저 ‘하리네 디저트’가 런 가의 소유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야 했다. 언젠가 스치듯 이야기가 나왔지만, 똑똑한 그녀가 그 사실을 잊을 리가 없었다.

하나 더 있다.

공작 저를 오갈 때 아드리엔이 말을 타고 다니는 것.

이건 공작 저에서 지내는 그 누구라도 아는 사항이었다.

게다가 어렸을 때 아드리엔이 칸트에게서 떨어져서 발이 삐는 바람에 에일린이 치유해줬던 일이 있었다. 그녀는 마차를 타고 다니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기어코 말을 타고야 마는 아드리엔을 보자 자포자기했다. 대신 다치면 꼭 자신에게 말하라는 당부를 하면서 말이다.

이 증거들을 손에 넣고서도 아드리엔은 짐짓 모르는 척을 했다. 자신조차도 그녀가 변한 이유를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찰스가 런 가의 파티에 온 에일린에게 짖어대자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에일린은 에일린이 아니었어! 그래서 영혼이 바뀌었냐는 농담을 던졌는데 정색하는 에일린을 보자 기분이 묘했다. 추측은 진실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한 번쯤은 물어볼 심산이었다. 아니 추궁하려 했다.

너는 누구냐고.

대체 누구길래 에일린의 모습을 하고 에일린인 척하고 있는 거냐고.

그렇게 연기를 하면 모를 줄 알았냐고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막연히 그렇게 묻고 싶었다. 어쩌면 변해버린 그녀에 대한 화풀이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녀와 서점에 들른 후에 목을 축이자며 일부러 디저트 가게에 앉았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말을 꺼내기 전에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

아드리엔은 거울을 보며 잠시 예행연습을 했다. 근거들을 머릿속으로 다시금 정리해보면서 말이다. 깊은 심호흡과 함께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자리에 돌아왔을 때엔 에일린은 없었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는 쪽지도 흔적도 없이, 원래 없었던 것처럼 텅 비어있었다.

아드리엔은 덜컥 겁이 났다.

그는 당장 경비대를 부르고 길거리를 헤맸다. 그녀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을 돌아다녔다.

에일린. 어디에 있어?

내가 잘못했어.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제발. 무사하기만 해줘.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제발 돌아오기만 해달라고 그렇게 미친 듯이 되뇌었다.

그러다가 그녀를 찾았다.

아드리엔은 에일린이 눈앞에 멀쩡히 다시 나타나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에 휩싸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을 설득하려 들었다.

내가 나쁜 생각을 해서 벌을 받은 거야.

그래. 너도 사람인데 변할 수 있지. 알던 것을 잊어버렸을 수도 있지. 네가 겪었던 납치사건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거겠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는 거니까.

그렇게 이해하며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그랬는데….

서점 앞에서 에일린을, 그리고 그녀와 동행한 듯한 루슬로 대공과 마주쳤다.

납치사건의 여파로 변해버렸다고 믿은 그녀가, 사실은 사랑에 빠져서 변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아드리엔은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사랑이었구나…!

사랑인 게 맞았다. 사랑이 변하게 만든 거였다. 에일린이 대공을 보는 눈동자에는 명백히 사랑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감정이 깃들어있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빛을 아는 법이니까.

그는 말없이 뒤로 돌아섰다. 그렇게 그녀를 포기하려고 했는데.

그 순간 갑자기 남은 미련들은 오기로 변했다.

아드리엔. 고백도 한 번 못 해 보고 이대로 빼앗길 거야?

황제의 약혼녀가 되면서도 포기했는데 또 포기한다고? 대공한테 흔들릴 거였으면 나도 흔들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런 희망이 발목을 거세게 쥐었다.

“좋습니다. 결투를 신청하죠.”

그래서였다.

아드리엔은 겁도 없이, 감히 검호라 정평이 나 있는 레이몬드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

“에일린이 심판을 봐줘.”

그나저나 누구를 응원해야 하나? 내가 막 고민이 되려는 찰나, 대공의 말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나는 아무도 응원하지 않아도 되는 홀가분한 지위에 책봉이 되어버렸다. 왜냐면 심판은 공정해야 하니까.

나는 냉큼 말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에일린. 그래도 날 응원해 줄 거지?”

“아니. 당연히 나지.”

그런 내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챈 아드리엔이 선방을 날리자, 대공도 지지 않고 달려들었다. 또다시 투덕거리는 두 남자를 보자, 말다툼보다 차라리 검으로 겨루는 게 낫겠다 싶어졌다.

“그럼 시작!”

떠들어대는 말을 막으려고 다짜고짜 시작을 선언해버렸다. 그러자 과연 두 사람의 입술이 그 즉시 멈추었다.

대공과 아드리엔은 목검을 쥔 채 상대를 주시했다. 가만히 노려보며 빈틈을 살피는 모습에서 진지한 검사의 면모가 보였다. 분위기는 흡사 맹수들의 싸움 같았다.

“이야압!”

아드리엔은 목검을 꽉 움켜쥐더니 우렁찬 기합과 함께 대공에게로 달려들었다. 선공을 함으로써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그러나 아드리엔이 휘두른 목검은 곧장 대공의 목검에 막혔다. 대공은 어디로 공격이 들어올지 정확히 예측한 듯했다.

이에 당황한 아드리엔이 한 걸음 물러서려는데 그 순간 대공이 파고들었다. 아드리엔이 뒷걸음질을 칠 때 느슨해진 그의 목검을 자신의 목검으로 세게 쳐냈다.

“앗.”

그러자 아드리엔이 손에서 놓친 목검이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헙.

나는 충격을 받고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렇게 쉽게 끝났다고?

충격은 나만 받은 게 아닌 듯했다. 아드리엔은 좀 전까지 목검이 쥐어져 있었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대공의 목검이 가까이와 목을 겨누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두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져… 졌습니다.”

패배를 인정한 한마디에 목검은 즉시 거두어졌다.

대공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평소 생사를 넘나드는 치열한 삶을 살아온 그이기에 애초에 급이 달랐다. 그는 경험과 연륜, 그리고 힘까지 우세했다.

대공은 이겼지만 결코 거만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더없이 환상적으로 멋져 보였다.

레이몬드…. 머… 멋있어.

코피가 퐝 터질 만큼 멋진 장면이었다.

코아가 이래서 지켜 보랬구나.

고개를 들어 보았더니 눈이 마주친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완벽한 서열정리의 완성이었다.

아드리엔은 패배자의 지위를 인정하며 즉시 돌아가기로 정했다.

“한 수 잘 배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져서 완전히 포기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도저히 승복을 모르는 녀석이로군.”

두 사람은 악수를 하더니 옅은 미소를 교환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잡아먹겠다고 으르렁거리더니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람? 검사들의 세계에는 자기들만의 문화나 뭐 그런 게 있나 보다.

그나저나 아드리엔 쟤는 다음에 다시 도전하겠다는 건가. 또 얼마나 피곤한 상황이 지속할 지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해가 안 되는 사실이 한 가지가 있었다.

대체 두 사람은 왜 싸운 거야?

***

싱겁게 끝난 결투는 아무런 약조도 남기지 않았건만, 아드리엔은 더 이상 내 서점 나들이에 동행하지 않았다. 또한 대공과 나의 만남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았고 말이다.

그러기를 며칠째 잠잠하더니 오랜만에 공작 저에 들렀다.

“오랜만이네, 아드리엔.”

정원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는 나를 보며 아드리엔은 눈을 흘겼다. 맞은편 의자에 앉는 그는 어딘가 기운이 없어 보였다.

기운이 없는 건 없는 거고. 나는 그 틈에 혹시나 싶어 벼르고 있던 말을 꺼내었다.

“아드리엔.”

“왜.”

“대공님이랑 만나는 건 비밀로 부탁해.”

내 공손하지 않은 태도가 거슬렸던 걸까. 그가 나를 보며 발끈하더니 짧은 사이에 말을 다다다 쏟아내었다.

“나는 네가 황제 폐하랑 약혼하는 바람에 너를… 너를….”

“나를, 뭐?”

“너를….”

아드리엔은 뒷말을 잇지 못하더니 얼굴만 새빨개졌다.

“아, 그런 게 있어!”

그러더니 고함을 치듯이 내뱉고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이 녀석. 말도 안 해주고선 왜 성질만 내고 난리람?!

황당함에 젖은 내 표정을 발견했는지, 아드리엔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기사단장이 되어서 너를… 지켜주려고 했지.”

“오 그랬어? 멋진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니, 아드리엔은 정말이지 의리가 대단해.

내가 진심을 담아 칭찬을 했더니 그가 멋쩍어하며 양 볼을 붉혔다.

“그런데 말이지.”

“응?”

“미래의 기사단장께서 지셨구만.”

“우씨.”

이어진 내 말에 그가 다시 발끈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장난은 이쯤에서 접고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 아드리엔이 어렵사리 이야기를 하나 꺼냈다.

“최근에 루슬로 대공님과 나비엔 사이에 혼담이 오갔어.”

두근.

그 순간 잊고 싶었던 이야기가 도마 위에 오르자 심장이 움켜쥐듯이 아팠다.

따끔거리는 감각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몰랐던 것처럼 애써 덤덤하게 굴었다.

“그랬어?”

“응. 근데 대공님 쪽에서 깔끔하게 거절을 했다더라고.”

그래서 아드리엔이 레이몬드한테 감정이 있었구나…!

이야기를 듣고 나자 그가 왜 대공한테 덤볐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아 다행이다.

혼담 이야기로 잔뜩 마음을 졸이고 있던 난 이제야 짓누르던 바윗덩어리를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안심이 되어버린 나는 입술 사이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드리엔은 그런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뒤이어 “이유가 있었네.”라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얼핏 들려왔지만 그의 반응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대공이 혼담을 거절했으니까 그걸로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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