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다음 날, 아드리엔은 아침 일찍부터 공작 저를 찾아왔다.
이유야 불 보듯 뻔했다. 대공과 나의 관계가 궁금한 거겠지.
나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그가 앉아있는 정원 테이블로 갔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맞은편에 앉아서 하녀가 따라주는 차를 마셨다. 그때까지도 그에게 아무런 인사도 건네지 않았고, 아드리엔은 그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이윽고 하녀가 사라지고 차를 한 모금 목 안으로 넘기고 나자, 참다못한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어떻게 된 거야?”
“뭐가?”
태평한 내 대답에 기가 찼는지 아드리엔이 짧은 숨을 토해냈다. 분명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인데 쉽게 꺼내질 못하고 있었다.
알고 싶겠지, 왜 대공과 같이 있었는지를.
하지만 나는 대답해줄 의향도, 알려줄 이야기도 없었다. 여기에 올 때부터 그렇게 결심한 상태였다.
아드리엔은 침묵을 답답해하면서도 내 의도를 눈치챈 것 같았다.
대답을 듣고 말겠다며 기세등등하던 그는 어느새 잔뜩 움츠러들었다.
“힘은 여전히 세더군.”
“응?”
“그래도 힘만 믿고 어? 위험한 곳에 뛰어들고 그러면 안 된다? 싸움은 스킬이니까.”
아드리엔은 툴툴대면서도 걱정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기껏 용기 내어 꺼낸 말은 내 힘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중요한 정보였다.
헉. 아드리엔은 에일린이 원래 힘이 센 걸 알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거리낄 게 없겠군.
앞으로는 이 애 앞에서는 조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어색한 시간을 보낸 아드리엔을 돌려보내고서 오후에는 대공을 만났다.
내 입장은 오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평소와 똑같아 보이는 대공을 보자, 이번에는 내가 묻고 싶어서 안달이 났으니까.
내 무덤을 내가 파는 꼴일까 싶어 처음엔 참고 있었지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레이몬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눈짓으로 아는 척을 해왔다.
“레이몬드는 제힘에 관해서 안 물어보세요?”
“음? 에일린의 힘?”
그는 그제야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게 생각난 듯 말을 되새겼다.
“제힘, 안 신기하셨어요?”
“신기해.”
“그럼 안 물어보세요?”
“물어보면 대답해줄 수 있나?”
아, 그것도 그러네.
힘이 세면 센 거지, 특별히 말해 줄만 한 정보도 없었다.
내가 난감해져서는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이자, 여태 대답만 하던 레이몬드가 입을 열었다.
“에일린이 힘이 세든 아니든 상관없어. 내게 에일린은 에일린일 뿐이니까.”
“어, 헛, 네.”
우문현답이네.
나는 그의 발언에 쑥스러워져서 얼굴을 붉혔다. 볼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
그날 그렇게 순순히 돌아갔던 아드리엔은 웬일인지 다음 날부터 공작 저로 매일 출석 도장을 찍었다. 어째 단단히 벼르고 온 모양이었다.
“내가 네 보호자야.”
아드리엔은 허리춤에 손을 얹으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더니 서점으로 외출하려는 나와 동행하겠다고 자처했다.
대공이 무서우니까 지켜주려고 그러는 건가?
그렇다 해도 내겐 코아가 있는데.
“걱정 마. 대공님은 그런 분이 아니야.”
나는 오해를 덜어주기 위해 설명을 보탰다. 하지만 아드리엔은 그 말이 더욱 못마땅하다는 듯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너 그런 생각은 가족 외에는 하는 거 아니다?”
“그래? 그럼 너도 그렇겠네?”
“나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잖아.”
아, 예. 그러셔요?
이번에는 내 눈썹이 휘었다.
“흠, 크흠. 어서 가자.”
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얼른 앞장섰다.
나는 길거리로 나가 마중 나온 레이몬드와 만났다. 그는 내가 달고 온 꼬리를 말없이 쳐다보더니, 아드리엔의 마지못한 인사에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손짓했다.
들어선 곳은 지난번에 갔던 해산물 식당이었다. 오늘은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홀에 있는 자리를 선택했다. 아무래도 아드리엔을 의식한 탓인 듯했다.
대공은 세 사람이 먹을만한 요리를 몇 가지 시킨 후에 음식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서로를 모르는 척했다. 평소와 달리 말이 없는 시점부터가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었지만, 둘이 그걸 알 턱이 없겠지.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요리의 등장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해물탕은 전에도 그랬지만 너무나 먹음직스러웠다.
대공에게 한 번 호되게 혼난 적이 있는 종업원은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해주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 그래서 딱히 챙길 것도 없는데, 아드리엔이 잽싸게 내 앞접시를 가져가더니 국자로 음식을 떠주었다.
“자, 에일린. 맛있게 먹어.”
그러고는 앞에 놓아주면서 다정하게 웃었다. 뭔가 저 웃음에 가식적인 MSG가 한 스푼 들어간 것 같은데. 그렇다고 호의를 베푼 친구를 구박할 수는 없으니 순순히 배려를 받았다.
“고마워.”
그리 인사를 하고서 포크로 소라살을 콱 집었는데, 순간 뜨거운 국물이 내 얼굴로 튀었다.
“아얏.”
“에일린. 괜찮아?”
이를 본 아드리엔은 잽싸게 티슈를 가져다가 볼을 톡톡 두드려 닦아주었다.
“내… 내가 할게.”
“가만히 있어 봐.”
그는 내 얼굴 여기저기를 면밀히 살피며 꼼꼼히 닦아주고 나서야 손길을 거두어들였다. 한창 먹다가 배가 차오른 것을 느낀 나는, 마지막으로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어 삼키며 식사를 마무리했다.
“아, 정말 맛있었다. 잘 먹었어요.”
“자, 에일린. 물 마셔.”
기분 좋은 배부름에 취한 내게로 컵이 내밀어졌다. 아드리엔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얼른 물을 따라서 내민 것이다. 그는 내가 컵을 받아드는 순간까지 날 보며 싱글싱글 웃었다.
얘가 진짜 왜 이래? 부담스럽게.
하지만 그의 기행은 식당에서 끝이 아니었다. 끝까지 함께 다니겠다며 따라온 서점에서까지 이어졌다.
나는 볼만한 책을 살펴보다가 책장 높은 곳에 있는 분홍색 표지의 책을 발견했다. 제목은 [백작 부인의 하루].
오. 로맨스 소설의 냄새가 솔솔 풍기는구먼.
모래 속에서 동전을 찾는 심정으로 서점을 샅샅이 뒤지고 있던 나는, 위대한 발견 앞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까치발을 들고서 팔을 쭉 뻗어도 손이 책에 닿지 않았다.
낑낑대던 나를 발견한 걸까. 대공이 어느새 내 뒤로 다가와 책을 꺼내줄 심산으로 팔을 뻗어 올렸다. 그 순간 등에 닿은 그의 단단한 가슴팍의 감촉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로맨스 소설을 꺼내려다가 로맨스를 찍을 판이었는데…. 그 판은 방해꾼의 난입으로 인해 무참히 깨져버렸다.
“여기 있어, 에일린.”
아드리엔은 언제 왔는지 대공의 손이 닿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책을 꺼내고서 내게로 내밀었다. 날 향해 해맑게 웃던 표정은 내 등 너머를 보며 시큰둥해졌다.
그래. 보호자라더니 보호자 맞네. 과보호자.
피곤해진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결심을 세웠다. 앞으로는 결코 아드리엔과 동행하지 않으리.
하지만 인생이란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지.
그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달린 일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말이다.
다음 날, 공작 저로 어김없이 나타난 아드리엔은 또 내 앞을 막아섰으니까.
“가자.”
이제는 당연한 듯이 앞장서서 걷기에, 제자리에 서서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그가 우뚝 멈추어 뒤돌아서는, 따라오지 않는 나를 바라보았다.
“왜 안 가? 오늘은 안 가는 날이야?”
“아드리엔.”
나는 입속에 할 말을 잠시 머금은 후에 어렵사리 내뱉었다.
“미안하지만 이제부터는 나 혼자서 갈게.”
“왜? 누구랑 둘이서만 만나야 해서?”
얜 다 알면서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굳이 콕 집어서 말하는 걸 보고도 따돌리는 게 마음이 아파서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 고민은 길게 가지 못했다.
“너 대공님 만나는 거, 부모님도 아셔?”
아드리엔이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면서 이렇게 물어온 것이다.
제길. 데려가야겠군.
협박을 받은 이상 선택지는 없었다.
***
대공은 길거리에 모습을 드러낸 나를 반가워하다가 뒤에 따라붙은 아드리엔을 보자 인상부터 구겼다.
“오늘도 꽁무니에 붙이고 왔군.”
“협박을 당해서요.”
나는 솔직한 심정을 말하며 툴툴거렸다. 아드리엔이 경악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미안했던 감정은, 그가 부모님을 언급하는 순간 증발해버렸으니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고. 흥.
상한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대공이 자신의 턱을 느른하게 매만지며 이채를 띤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아드리엔은 그의 시선을 받으며 눈을 치켜 올렸다.
“협박이라. 그럼 가만둘 수 없지.”
“제가 하고픈 말입니다만?”
“그렇다면 한 수 가르쳐줘야겠군.”
“좋습니다.”
마주 선 두 사람은 눈에 담은 예기로 상대의 목을 겨누는 중이었다.
응? 두 사람 갑자기 왜 이래?
어째서 이야기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는 거야?
말리지 않으면 큰일이 나겠다 싶어서 다급히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또 싸울 거예요? 진짜 이러기야?”
“검사는 검으로 말하지.”
“검사는 검으로 말하거든.”
그러자 두 입에서 동시에 같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허. 기가 차서.
한마디 더 얹으려고 하는데 뒤에서 어깨를 붙잡는 게 느껴졌다. 돌아보니 가까이 다가온 코아가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채로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있었다.
대략 해석해보자면 저것들 그냥 둬요. 안 말려짐, 정도일까?
무언의 말이었지만 눈빛만으로도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한 번쯤은 서열정리가 필요하려나.
우선은 그녀의 뜻을 따라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근처의 공터로 이동했다. 사람들이 단체로 운동을 하거나 시합을 할 때 이용하는 장소 같았는데 때마침 아무도 없어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검술 대결을 위해 일정 거리를 벌리고 섰다. 무기는 평소에 소지하고 다니는 진검 대신에 코아가 근처에서 구해온 목검이었다. 상대를 노리는 눈빛에서 각자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듯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검호로 정평 난 레이몬드를 이겨보겠다고 대드는 꼴이 안타까웠다.
아드리엔 쟤는 겁도 없이 대공한테 덤비냐.
그가 어쩌려고 저럴까 걱정스럽다가도, 두 사람의 검술 실력이 조금은 궁금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