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그 순간 나는 동작을 멈추고 머릿속의 맷돌을 미친 듯이 굴렸다.
아드리엔에게 레이몬드랑 만나는 걸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두 사람은 마주쳐도 되나? 둘의 사이는 어떻지?
나는 이대로 괜찮을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이미 들켜버렸고 마주쳐 버렸으니, 예측할 수 없는 결과만이 눈앞의 현실로 기다리고 있었다.
온갖 상념이 폭풍처럼 휘몰아치자 내 표정은 절로 울상이 되었다. 그대로 레이몬드를 올려다보았더니 그의 시선은 아드리엔과 나 사이에 머물러있었다. 정확히 아드리엔이 내 손목을 붙들고 있는 지점으로.
“그것부터 놓지?”
레이몬드는 아주 못마땅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누가 들어도 언짢은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자 아드리엔은 꽉 붙든 손을 발견하고는 얼른 놓아주었다.
명령 때문이라기보다는 아플까 봐 염려됐기 때문인 듯했다.
“미안해. 에일린. 내가 너무 세게 잡았다.”
“괜찮아.”
나는 반대편 손으로 손목을 문지르며 억지로 웃었다. 하지만 그는 약간 넋이 나간 상태였다. 왜 에일린은 루슬로 대공과 동행하고 있는 거지? 와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 있겠지.
알만했다. 그리고 나는 너무 곤란했고.
“런 경.”
레이몬드가 부르는 말소리에 아드리엔은 퍼뜩 정신이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중요한 볼일이 있는데 그만 가보는 게 어때?”
“….”
하지만 대공의 말은 왠지 모르게 아드리엔의 신경을 건드린 듯했다. 다소 멍하던 그는 검같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자신보다 약간 높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루슬로 대공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그래.”
“저도 볼일이 있어서 이곳에 왔지만, 더 중요한 볼일이 생겨버렸군요.”
“그게 뭐지?”
“이 낯선 거리에서 소중한 친구를 발견해서요. 그냥 둘 수는 없죠.”
“경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내가 충분히 신경 쓰고 있으니까.”
“아니요. 대공님이라서 더 신경 쓰이는 겁니다.”
저… 저기요. 두 분. 여기서 왜 이러시는 겁니까?
나는 레이몬드와 아드리엔의 신경전에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아드리엔 쟤는 겁도 없이 대공한테 덤비는 거야.
혹시 사이가 안 좋은가? 둘 다 검사니까 어디서 악연으로 얽혔나?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불꽃이 팍팍 튀었다. 눈빛으로는 이미 결투를 벌이고 있었다. 사이에 끼어버린 나는 마음이 불편해서 죽을 맛이었고.
“저기….”
“왜 나라서 신경 쓰인다는 거지?”
“그건 대공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봐요?”
“글쎄. 전혀 모르겠군. 나와 함께 있으면 걱정할 일이 전혀 없으니 말이야.”
“가장 위험한 존재가 곁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레이몬드와 아드리엔은 나라는 존재는 까맣게 잊은 채, 둘 사이의 신경전에 몰두했다.
순식간에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 나는 그냥 가만히 있는 쪽을 택했다. 아무리 불러도 듣질 않는데 말해서 뭐해.
이쯤 되니 서로 아는 듯한 두 사람은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구나 하는 확신까지 다다랐다.
그렇게 남 일처럼 뒷짐 진 채로 길거리나 구경하던 나는, 우연히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을 한 가지 목격했다. 어떤 남자에게 입이 막힌 채 억지로 골목 안으로 끌려가는 여자를 발견한 것이다.
앗. 저런!!!
그 순간 여자의 직감이 울렸다. 서둘러 그녀를 돕지 않으면 큰일을 당하고 말 거라고.
나는 투덕거리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둔 채로 다짜고짜 뛰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라 다른 사람을 부르고 말하고 설득하는데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큰길을 건너 골목 안으로 꺾어 들어가자, 바깥과는 확연히 다른 어두컴컴한 전경이 펼쳐졌다. 발걸음을 서두르면서도 최대한 소리를 죽여 인기척을 따라 걸었다. 남자는 그 잠깐 사이에 제법 골목 안쪽까지 들어가 있었다.
“읍, 읍.”
곧 입이 막힌 채로 소리를 지르는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남자는 여자가 반항하는 통에 힘겹게 걸음을 옮기다가 기절을 시킬 요량으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소리를 쳤다.
“그만두지 못해! 이 나쁜 놈아.”
“응?”
갑작스러운 큰소리에 움찔 놀란 남자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복면이나 마스크 같은 것으로 조금도 가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얼굴 생김새는 범죄자니까 범죄형일 테고, 옷이 번쩍이는 실크 재질로 되어있어 아주 비싸 보였다.
그 옆에는 구원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눈물로 범벅이 되어 울고 있음에도 눈에 띄는 미인이었고 특히 몸매가 끝내주게 좋았다.
상황이 돌아가는 꼴로 보아하니 남자는 최소 부자 아니면 귀족, 여자는 평민인 것 같았다. 그러므로 이 상황은 전형적인 돈과 권력의 행패인 것이다.
“넌 뭐야? 저리 썩 꺼져!”
남자는 거칠게 내뱉어놓고서는 자세히 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선으로 쭉 훑었다.
“오호. 엄청난 미인인데?”
“뭐?”
“그런데 얼굴은 예쁘고 귀엽다만, 몸이 애기로군. 아쉽네.”
아놔, 이 미췬 놈이? 누가 너한테 외모 품평해달래?!!
나는 더 이상 일그러뜨릴 수 없을 만큼 얼굴을 찌푸리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더 듣고 있다간 귀가 썩어버릴 테니까.
나의 거침없는 동작에 남자는 움찔 놀라더니, 붙잡고 있던 여자를 옆으로 내팽개쳤다. 그녀는 오면서 몇 번 구타를 당했는지 힘없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남자는 두 팔을 벌려 나를 잡을 듯한 동작을 취했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거기에 순순히 잡힐 거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거든?
이런 어여쁜 모습으로 겁도 없이 골목 안을 헤집은 건 내게 철석같이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바로 천하장사 같은 나의 ‘힘’이었다.
내가 멧돼지같이 전속력으로 돌진한다면 가속을 받아 저 남자를 날려버릴 수 있으리라.
그렇게 계산을 마치자마자 나는 달렸다.
다다다다다.
남자는 연약한 레이디 쯤은 안아서 바닥에 눌러버리리라는 계획을 세운 듯했지만, 내 앞에서 그것은 망상에 불과했다.
퍽!
곧 엄청난 타격음과 함께 남자의 몸이 벽으로 날아갔다.
“으윽.”
됐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헐떡이는 숨을 골랐다. 에일린은 타고난 힘은 세지만 체력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쓰러뜨릴 적은 하나고 온 힘을 다해도 다음 타자가 없으니까.
대신에 확실히 해둘 필요성이 있었다. 영화나 만화에서처럼 뒤통수 맞는 건 딱 질색이었다.
나는 확인 사살을 위해 벽으로 걸어가 신음하고 있는 남자에게로 주먹을 휘둘렀다.
쾅.
그러나 주먹질이 처음인지라 실수를 했다. 내 주먹은 남자의 볼 바로 옆에 있는 벽을 박아 버렸다.
그러자 벽면은 박살이 나 움푹 팼고, 곧 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남자는 그 장면을 곁눈질로 훔치더니 눈동자와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에일린!!”
그때, 뒤에서 겹쳐지는 두 남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 이런. 제길. 하필 지금 나타날 게 뭐람.
레이몬드와 아드리엔이 뒤늦게 나의 부재를 눈치채고 따라온 모양이었다.
말다툼하느라 바쁘시더니 용케도 알아챘네.
두 사람은 벽에 기댄 남자를 보더니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 동작은 마치 쌍둥이같이 똑같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와 상황을 살피더니 놀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서둘러 주먹을 거두었다. 그러자 내 주먹에 의해 박살 난 벽이 더욱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에일린. 괜…찮아?”
“난 괜찮아.”
아드리엔이 버벅대는 말로 물어왔다. 벽이 아니라 내 손이 괜찮냐고 물어본 게 맞겠지?
이 상황에 맞지 않은 질문이라는 걸 가슴으로 느끼면서도, 적절한 다른 질문을 떠올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물음을 던지는 대신에 내게로 바짝 다가왔다. 그러더니 나를 그의 품으로 당기는 동시에 빼 든 검을 남자에게로 겨눴다. 날카로운 칼끝이 남자의 목에 매달리듯 달라붙었다.
“히… 히익!”
“감히 에일린을 위험에 빠트리다니 각오해야 할 거다.”
그는 단단히 화가 난 목소리로 위엄있게 말했다. 살기등등한 기세에 남자는 겁에 질려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아. 내가 위험에 빠졌구나.
레이몬드의 눈에는 그래도 내가 연약해 보이나 보다.
진실은 모르겠지만, 그에게 안기다시피 몸을 붙이고 있는 포즈가 마음에 들어 그저 조용히 있었다.
날 구하러 와준 것만은 확실하니까.
어깨너머로 보이는 아드리엔이 눈썹을 꿈틀대고 있었지만, 이 극락을 누리기 위해서는 친구의 반응 정도는 잠시 무시하기로 했다.
***
“혼자서 범죄현장에 제 발로 들어가다니 제정신인가?”
“그래.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아.”
우리는 범죄자를 경비대에 넘겨주고서 근처 디저트 가게로 들어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내 맞은편에 나란히 앉은 대공과 아드리엔은 차례를 바꿔가면서 내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처음에는 잘못했어요, 안 그럴게요, 를 남발하던 나도 듣고 듣다 보니 문득 짜증이 치밀었다. 아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나한테만 왜 이래?
그래서 상체를 불쑥 내밀고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외쳤다.
“아니 이 사람들이.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어줬잖아요! 두 사람이 말다툼하느라 나한테 신경도 안 써놓고 이제 와서 야단치면 어떡해요?”
한 번 입이 트이자, 신나게 말이 날아다녔다.
“아드리엔. 넌 내가 불렀을 때 들었어? 안 들었지?”
“어? 어….”
“레이몬드도 그래요. 내가 팔을 잡아당겼는데도 미동도 없었잖아요.”
“그래. 내가… 그랬군.”
한 명씩 콕콕 집어서 지적했더니 두 사람은 반성하는 기미를 보였다. 이제야 속이 좀 시원해지려는데, 또 다른 복병이 터져버렸다.
“에일린. 방금 루슬로 대공님을 레이몬드라고 부른 거야? 언제 둘이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됐대?”
“이게 경이 놀랄 일은 아닐 텐데?”
“아뇨, 저 지금 매우 놀랐거든요?”
팔짱을 낀 레이몬드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아드리엔은 흥분한 상태로 상체를 세워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팡팡 쳤다.
말다툼의 2차전이 발발한 것이다.
두 사람,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건대!!
나는 머리채를 붙잡으며 절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