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오늘은 레이몬드와 오랜만에 낮에 만나는 지라 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래서 대신에 그의 부하들을 시켜서 적당한 책을 몇 권 사 오도록 시켰다.
아쉽게도 서점 나들이에 할애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고로 그와의 만남도 일찍 마무리 지어야 했다. 헤어지러 걸어가는 숲길에서 나는 다시금 따스해진 레이몬드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를 물을 차례였다.
“레이몬드. 그런데 아까 저한테 물어볼 게 뭐였어요?”
“아.”
그는 내가 묻고 나서야 생각났는지 내 쪽으로 돌아보았다.
“혹시 나에 대한 예언이 또 있나 하고.”
“예언은 아직까지 없어요.”
“그렇군.”
여기까지는 일이 술술 풀렸기 때문에 당장은 그에게 건넬 조언이 없었다. 좀 더 확실히는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황제의 반응을 좀처럼 예상할 수가 없으니까.
그런 걱정이 올라오자, 레이몬드에게 넌지시 말을 꺼내 보았다.
“예언은 아닌데요. 그분, 요즘에 소문이 좋지 않더라고요.”
“알아. 일이 잘 안 풀리니 초조한 거겠지.”
레이몬드도 소문을 들어 짐작하고 있었나 보다. 황제와의 보이지 않는 알력싸움에서 자신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 상황과 그에 따른 황제의 반응을 말이다.
방어태세는 잘 갖춰둔 상태일 테지.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온이 함께하고 있으니. 그럼 됐어.
그리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레이몬드는 갑자기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입술을 몇 번 달싹이기만 할 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자 그의 초조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에일린. 가끔 황성에 들어가지?”
그 말이 하기가 어찌나 어려운지, 입안에서 한 자 한 자가 힘들게 만들어져 나왔다. 하지만 이건 내게도 마찬가지로 반갑지 않은 주제였다. 그에게 말하기 껄끄러운 탓에 여태 의도적으로 피해왔으니까.
누구보다도 황제의 약혼녀가 아니길 원하는 게 나인데 내 위치는 그게 아니었고, 그 사실이 내 입에 자물쇠를 채운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차마 속 시원히 대답하지 못하고서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내 마음을 안 걸까. 레이몬드가 걸음을 멈추었고 나 또한 따라 멈췄다. 내 쪽으로 돌아선 그는 나의 옆 머리칼을 한 움큼 잡고서는 부드럽게 매만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손안에서 벚꽃 잎을 닮은 머리칼이 이리저리 춤췄다.
레이몬드의 눈길이 자신의 손길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고, 나는 곧 내게로 시선을 맞추는 그의 눈동자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심해. 코아를 항상 곁에 두고.”
“네.”
숲을 지나가는 스산한 바람 때문일까. 대공의 음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쓸쓸하게 들렸다.
***
저택의 내 방으로 돌아온 난 코아가 옮겨서 놓아둔 책들을 살폈다.
제목을 읽어보니,
[위대한 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제국과 주변 국가들의 정치 관계도]
[국가의 흥망성쇠는 수학의 진보에 달렸다]
.
.
하나하나가 잠을 유발하는 자장가들이었다.
이걸 고른 레이몬드의 부하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에일린의 원래 소문대로 아주 지적이고 똑똑하다고 알고 있을까? 그래, 그럴 거야. 아니면 이렇게 무시무시한 책들로만 골라왔을 리가 없어. 이런 센스없는 자들 같으니.
나는 괜스레 그들을 싸잡아 욕하면서 방 안 책장 깊숙한 곳에다가 책을 꽂아버렸다.
똑똑.
“아가씨.”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클레어가 들어왔다. 그녀는 아버지가 오랜만에 공작 저에 오셨고 나중에 같이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소식을 들고 왔다.
“아버지가 오셨다고? 그럼 인사하러 가야지.”
같이 저녁을 먹는 건 먹는 거고, 나는 당장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방을 나섰다.
지나가는 하녀들에게 물으니 부모님은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라고 하셔서 나는 지체 없이 그쪽으로 향했다.
집무실에 가까이 다가가니 문은 어중간하게 열려있었다. 그 틈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반가움에 들어가려던 나는 문득 들려온 대화 소리에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휴우. 에일린이 큰일이에요.”
어머니의 걱정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응? 뭐가 큰일이라는 거지?
그 말에 온몸이 한껏 긴장되었다.
인간의 본능이란, 나 없는 곳에서 내 얘기가 나오면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게 되어있다. 나는 벽면에 몸을 살짝 붙이고서 귀를 쫑긋 세웠다.
“새로운 선생이 그렇게 말했단 말이오?”
“네. 납치사건이 충격은 충격이었나 봐요. 멍청해진 것 같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그러게나 말이오.”
헐. 머… 멍청…이라니!!
아무리 내가 잘나지 않았기로서니 멍청하다는 단어를 갖다 붙일 정도인 거야?
나는 나에 대한 험담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것도 순도 백 퍼센트의 진심 어린 걱정의 형태로 말이다.
“그래도 오늘 책을 잔뜩 사 온 걸 보니 조금은 안심이 되더라고요. 선생님 말씀대로 좋아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것 참 반가운 말이군.”
“네. 앞으로는 사 온 책들을 읽고 독후감을 쓰게 해야겠어요.”
나는 그 말을 듣자 화들짝 놀랐다. 아까 보았던 책 리스트가 생각나면서 머리가 무거워졌다.
아… 안 돼에에!! 어떻게 그런 책들을 읽고 독후감을 쓰란 말이야!!!
내 앞에 펼쳐진 절망에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넘기자.
다음부터는 반드시 내가 가서 책을 골라오겠어. 가능하면 쉽게 재미있는 책들로….
그렇게 결심을 하며, 아버지와의 재회도 잠시 후를 기약하기로 했다.
***
레이몬드와의 한낮의 데이트, 아니 팬 미팅은 주 2회였다.
그리고 오늘도 바로 행복한 그 날이었다.
레이몬드는 내가 도착하자 인사를 건네더니 하던 일을 마저 했다. 무엇을 하나 싶어서 쳐다보니, 작은 상자를 정리하고 있었고 그 안에 편지봉투가 몇 장 들어있었다.
“레이몬드. 그건 파티 초대장이에요?”
“그래 맞아.”
그는 내 물음에 즉각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참석하시려고요?”
“응. 그간 소홀했는데 몇 군데 정도 가봐야겠어.”
“어디에 갈 건데요?”
“로건 백작이 어떨까 생각 중이야. 로건 가는 대대로 중립세력이거든.”
“오, 그렇구나. 이 초대장은 저한테도 왔어요.”
레이몬드가 초록색 봉투를 들자, 낯익은 비주얼에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같이 참석할까?”
그러자 그가 머뭇거리면서 슬쩍 내게 물어왔다.
네?? 대… 대공과 파티… 최애랑 파티에 간다니!!!
나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의 턱시도 차림은 상상만으로도 심장에 무리가 갔으니까.
남자의 제복!! 섹시함의 최고봉!!
흐트러뜨리고 싶은 각을 잰 듯한 깔끔함!!
실은 덕질을 할 때도 제복 차림의 대공을 가장 사랑했다. 하지만 평상시의 그는 평민 가에 거주하기에 주로 셔츠만 입곤 해서 그것에 목마르던 참이었다.
말해 뭣해요. 당연히 참석이죠!!
라고 속으로만 외치고서 겉으로는 최대한 자제하여 표현했다.
나는 책상을 쾅 짚으면서 상체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좋아요. 같이 가요!”
이 정도면 절제가 된 거겠지…?
테이블이 삐걱거리고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흔들거렸지만, 나 딴에는 최대한 자중한 거다.
“물론 파트너가 될 순 없겠지만….”
“괜찮아요! 아무 상관 없어요!”
파트너 지정 따위가 뭐가 중요하랴. 그와 파티에 함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나는 행복한 마음이 되어서 고개를 여러 번 끄덕거렸다. 나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본 레이몬드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럼 오늘도 식사를….”
“으응? 아… 안 돼요. 레이몬드. 오늘부터 서점에는 직접 갈 거예요. 저 밥 먹고 와서 배부르니까 어서 가요!”
“어? 그…래.”
나는 필사적으로 외치며 레이몬드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의자에 앉아있던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 힘에 끌려 나와야 했다.
***
이번에 나는 무사히도 책을 직접 선택했다. 무겁지 않고 흥미로운 것들 위주로 말이다. 물론 이 책들의 표지는 무지개색들로 아주 알록달록했다.
레이몬드는 오랜만에 서점에 들렀는지 수많은 책장 사이를 천천히 누비고 다녔다.
“다 골랐어?”
“네. 점원에게 주고 왔어요.”
나는 그의 곁으로 뽀르르 다가갔다. 마치 닌자처럼 기민한 움직임으로 책을 빠르게 쏙쏙 골라 카운터에 주고 온 뒤였다. 이게 다 그가 제목을 보는 참사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레이몬드는 어떤 책을 좋아할까?
그런 의문을 가지고 옆을 따라다니다가 마침 그의 손에 들린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엇. 하나 골랐나 봐요?”
“으응?”
그런데 뻗어진 내 두 손이 머쓱하게도 책이 쑥 빠져나갔다. 그러고 그는 내 손이 결코 닿지 않을 높이의 책장 칸에다가 책을 꽂아 넣었다.
“이건 살 게 아니라서.”
“아. 그래요?”
힝. 그래도 뭔지 보여주지.
원색의 표지가 궁금했단 말이야.
호기심을 풀지 못해 슬퍼진 나는 괜스레 책이 있었던 허공을 손으로 휘적휘적 저었다.
레이몬드가 몇 권의 책을 사서 딜리버리 서비스를 맡기는 동안, 나는 먼저 서점에서 빠져나왔다. 이렇게 최애와 함께 시내를 누비자니 이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한 기분인지!
하지만 한창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을 때, 뜻하지 않게도 훼방의 존재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서점을 나오는 그 순간 이쪽으로 걸어오던 아드리엔과 마주친 것이다.
“어?”
“앗.”
우연치고는 고약한 만남이었다.
서로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탓에 빼도 박도 못할 일이건만, 나는 최후의 발악으로 손바닥을 들어 최대한 옆얼굴을 가렸다.
“에…일린?”
“사람 잘못 보셨어요.”
나는 몸을 홱 돌리며 이 지점을 벗어나려 했지만, 내 정체를 확신한 아드리엔이 곧장 따라붙었다. 그가 팔을 붙잡아 내 몸을 빙글 돌렸다.
“에일린 맞네. 방금 나 피한 거야?”
“어? 아드리엔이었구나. 여기엔 어쩐 일이야?”
의미 없는 발악은 3초 안에 끝이 났다.
들켜버리고 말자 나는 최대한 연기력을 쥐어 짜냈다. 로봇같이 말이 어색하게 나간 건 모르는 척해주려나?
“나야 서점에 책 보러 왔지. 너는?”
“나도 그래.”
“혼자 온 거야?”
“에일린.”
바로 그때였다. 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레이몬드가 나타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