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이제는 코아가 있어서 공작 저에 따로 데리러 올 필요도 없이 그냥 오가면 되니 그것도 편리한 점이었다.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레이몬드의 생각은 약간 다른듯했다.
“밤에 나올 때마다 코아는 방에서 그대인 척 침대에서 자면 되겠어.”
그는 눈동자를 빛내며 그리 말했다.
“그러면 혹 들킬 염려도 덜 수 있겠지.”
“그것도 그러네요.”
오호. 새로운 시각이다.
나는 그의 생각에 감탄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비워진 방보다야 확실히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레이몬드는 내가 돌아가는 길에 시장을 지나 숲 입구까지 배웅해주었다. 그러고는 언제나 아쉬운 이별 인사를 건네었다.
“가볼게요. 레이몬드.”
“에일린.”
그런데 그는 나의 이름을 부드럽게 입술 끝에 담더니, 허리를 숙여 내게로 얼굴을 내밀었다.
으응?
그리고 잘생긴 얼굴이 지척으로 다가오자, 순간 숨이 멎어버리는 줄 알았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생겼구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이마, 코, 눈, 입술로 이어지는 곡선이 기가 막히게 유려했다.
그중에서도 시리도록 푸른 그의 눈동자, 헤엄치고 싶은 그곳에 내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저 속에 있는 나는 참 행복하겠다!
그런 망상에 젖어있을 때, 그는 냄새를 맡듯이 코를 킁킁하더니 도로 물러났다.
그 행동은 갑자기 내 청결 상태를 의식하게 만들었다.
내 몸에서 무슨 냄새가 나나? 오늘 샤워하고 향유도 바르고 새 옷으로도 갈아입었는데.
괜스레 마음이 위축되어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는데 그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전부터 에일린에게 궁금한 게 있었는데.”
“네? 뭔데요?”
나는 팔을 내리며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대의 입에서는 늘 향기가 나. 아주 달콤한.”
그렇게 말하는 레이몬드는 눈꺼풀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다른 감각은 닫고, 오직 하나의 감각에 몰두하려는 몸짓이었다.
아, 향기. 어디에서 나는지 궁금해서 얼굴을 들이댄 거구나.
저 호기심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 치유력의 근원은 입속 침.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가 항상 청결하고 깨끗했으며, 구석구석 양치질을 마친 듯 청량한 향이 났다. 꼭 요정의 축복이라도 받은 것처럼 말이지.
하지만 나는 아직 치유력에 대한 진실을 전할 용기가 없어서 말을 둘러대야 했다.
“저는 평소에 양치질을 아주 열심히 한답니다!”
“…그렇군.”
아차. 그러고 보니 아까 같이 뭘 먹었지.
말이 되는 듯 안 되는 듯했지만, 그래도 일말의 설득력은 있었는지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어떻게 상상이나 하겠어?
치유력 때문에 입속이 늘 정화한 숲과 같은 상태라는 걸.
그는 웃어넘기려고 배시시 웃는 내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얼굴을 가린 분홍빛 옆머리를 한 움큼 붙잡아 매만지더니 조금 있다가 놓아주었다.
“에일린. 다음엔 낮에 만나도록 하지.”
레이몬드는 그렇게 약속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
며칠 후, 아드리엔의 말대로 공작 저에는 초대장이 한 장 날아들었다.
초대장이야 늘 많이 오고 있지만, 이건 기다리던 나비엔의 티파티 초대장이었다.
기꺼이 참석하겠다는 답장을 쓰고 있는데 클레어가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편지를 건네며 보내 달라고 했더니, 그녀는 또 한 번 제 입담을 늘어놓았다.
“어머. 나비엔 아가씨의 초대장이구나. 아주 오랜만이에요. 제가 다 반갑네요!”
“지난번에 헤레나 키튼의 티파티에서 만났거든.”
“아아, 맞아. 그렇다고 하셨죠? 아이고. 더 어릴 때는 나비엔 아가씨도 아드리엔 도련님과 같이 자주 놀러 오셨었는데. 이제는 왕래도 격식을 차릴 만큼 세 분이 어른이 되셨네요.”
클레어는 감개무량함을 느끼며 두 손을 모았다. 어른들이란 아이들이 자란 것만 보아도 감격에 젖어 들곤 했다.
“나비엔 아가씨도 혼처를 찾으려고 여러 혼담이 오가나 보더라고요.”
“오호. 그래?”
“그럼요. 이제 어엿한 레이디니까요. 런 가는 역사와 전통이 깊은 가문에다가 뛰어난 검술로도 명망있으니까요. 다들 줄을 선다더라고요.”
클레어는 찻주전자를 들어 내 찻잔에 차를 부어주었다. 입을 쉬지 않으면서도 그런 우아한 동작을 말끔히 해내었다.
“인기가 굉장하구나.”
마침 목이 말랐던 나는 찻잔을 들어 올려 찻물을 입에 한 모금 머금었다.
“네. 가문도 그렇고 나비엔 아가씨도 훌륭하시잖아요. 외모도, 성격도 고우시고. 높은 분들이 좋게 생각하시나 봐요. 그래서인지 루슬로 대공 전하가 짝으로 거론되기도 하더라고요.“
풉!!
그 소리에 하마터면 입속에 있던 찻물을 모조리 뿜을 뻔했다.
다행히도 대부분이 기도로 들어가 사레만 거하게 걸렸다.
“콜록콜록.”
“어머, 아가씨! 괜찮으세요?”
클레어는 깜짝 놀라 다가와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어후, 놀라셨죠? 저도 그랬어요. 그 무서운 대공님과의 혼담이라니. 우리 나비엔 아가씨 어쩌나요.”
“켁켁. 그거 확정된 거야?”
“그런 건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여러 말이 오가고 있을 뿐이죠. 그렇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니까요.”
나는 클레어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가까스로 기침을 멈췄다. 하지만 심장은 점점 더 크게 요동쳐가고 있었다.
나비엔을 만나면 한 번 물어볼까? 레이몬드한테 마음이 있는지.
그런데 가문 간의 일이면 개인의 마음이 상관있기는 할까? 귀족 자녀들의 결혼은 전적으로 가문에 달린 거겠지?
춤추는 심장만큼이나 머릿속은 실타래가 엉킨 듯 복잡해졌다.
레이몬드는 어떤 마음일까? 어떤 이성을 좋아할까?
혹시 그도 나비엔한테 마음이 있는 건 아니겠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더 이상 이성으로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은 채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
런 후작 가의 티파티가 열리는 날.
나는 마차를 타고 깔끔한 정경이 펼쳐진 후작 저 앞에 도착했다.
이곳은 검술 명가답게 입구에서부터 정원, 저택까지 칼에 관한 장식이 수놓아져 있는데, 화려하기보다는 군더더기 없이 산뜻한 모습이었다.
나비엔은 헤레나처럼 정치적 야망이 넘치는 타입은 아닌가 보다. 소수만 초대한 단출한 분위기가 고즈넉하니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곳에 와본 척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래서 잔뜩 긴장한 채로 입구에 들어섰다. 내 등에는 자연스럽게 코아가 뒤따랐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아드리엔이 언급했던 ‘찰스’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에일린!”
내가 마차에서 내리는 걸 본 아드리엔이 내 쪽으로 오는데, 그 옆에 웬 거대한 솜뭉치가 나란히 달려왔다.
왈왈 왈!
덩치가 송아지만 한 털북숭이 개였다. 우렁찬 목소리로 짖자 저택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헉. 개잖아?!!
외양은 흡사 삽살개처럼 온몸이 복슬복슬한 상아색 털로 뒤덮여 있었다. 어찌나 털이 많은지 녀석은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헉헉. 어서 와. 에일린.”
아드리엔은 숨을 고르며 내게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안주인의 환영 인사가 너무 격한 거 아니야?
두 존재가 뛰어온 장면을 보니 대체 어느 쪽이 개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혹 아드리엔이 반갑다고 꼬리도 흔들고 있는 거 아닌가 싶어 슬쩍 엉덩이 쪽도 곁눈질했다.
“왜 그래? 뭐가 있어?”
“아무것도 아니야. 초대해줘서 고마워.”
나는 빙그레 웃고는 드레스 끝을 잡으며 정식으로 인사를 올렸다. 그런데 갑자기 저 털북숭이가 나를 향해 큰 소리로 짖기 시작했다.
“왈! 으르르릉 왈왈왈왈.”
“어, 찰스. 너 왜 그래? 에일린이잖아. 오랜만에 봤다고 잊은 거야?”
“왈왈왈. 으르릉.”
아, 얘가 찰스였어?
그제야 이 커다란 털북숭이의 이름이 찰스라는 걸 알았다.
지난 이야기와 지금 이야기를 유추해보건대, 찰스는 에일린을 아주 잘 따랐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아닌 원래의 에일린을 말이다.
동물적 감각이라는 게 이런 걸까? 저 아이는 내가 자신이 좋아하던 에일린이 아닌 걸 눈치챘는지 경계심을 한껏 드러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드리엔은 찰스를 말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쉿! 그만. 어디서 혼나려고 짖어대?”
“끼잉낑낑.”
다행히 찰스는 순하고 말 잘 듣는 개였다. 에일린인지의 여부는 둘째치고, 손님한테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아는 것 같았다. 그는 호통을 듣자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태연한 나와 달리 아드리엔은 다소 충격을 먹은 듯했다.
그는 기가 차고 또 미안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찰스가 너를 다 마다하고.”
“그러게.”
“거 이상하네. 그렇게 좋아 죽더니. 어디서 영혼이라도 바뀌었나?”
헙. 아드리엔의 그 말에는 나도 모르게 어깨가 경직되면서 낯빛이 굳었다.
“무슨 그런 말을…!”
“놀라기는. 당연히 농담이지! 하하하.”
아드리엔이 호탕하게 웃자, 괜스레 민망해진 내가 얼굴을 붉혔다.
“너무 오랜만에 와서 잊었나 봐. 어쩔 수 없지. 어서 들어가자.”
“그래.”
원래 도둑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듣던 도둑은 찔리는 법이란다.
나는 마음을 추스르며 아드리엔을 따라 저택으로 향했다.
들어선 런 가의 내부 전반에는 기품이 흘렀다. 검과 검사들의 역사가 저택 구석구석에 배어있어 전통의 미를 넘치도록 맛보여 주었다. 벽에는 역대 가주들의 초상화가 걸린 채 위엄을 드러냈고, 모조로 만든 칼이 복도를 멋스럽게 장식하고 있었다.
내 뒤를 따르던 코아도 평소답지 않게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과연 검사라서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여기야.”
아드리엔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커다란 홀이었다. 요리가 여러 테이블에 세팅되어 있어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먹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 초대된 손님은 얼핏 보아 서른 명 남짓이었는데, 귀족 가의 영애와 영식이 섞여 있었다.
나는 아드리엔을 따라 홀 안으로 들어섰다. 코아는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홀 가장자리로 가 내가 잘 보이는 곳에 서 있었다.
얼른 눈에 띄지 않는 나비엔의 모습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아드리엔에게로 하인 하나가 다가왔다. 두 사람은 귀엣말로 속닥거리더니 아드리엔이 내게 양해를 구했다.
“에일린. 혼자 있을 수 있지? 나 잠깐만 다녀올게.”
“알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기꺼이 보내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을 기다리면서 목을 축일 요량으로 테이블로 향하는 그때,
“어? 저기 꼭두각시 예비 황후님 아니신가.”
어디선가 불손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