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편하게 사셨군요.”
“편하게 살았다고?”
그럴 리가. 평생을 훈련으로 채워진 삶이 편할 리가 없잖아?
카나리아는 코아의 말에 반박할 수만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을 메웠다.
하지만 그다음 말이 들리자 이 모든 불평을 목 안으로 꿀꺽 삼켜야만 했다.
“저는 고아로 태어나 평생을 어두운 뒷골목에서 용병으로 살아왔습니다.”
“아.”
그 한마디에 카나리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사와 용병은 살아가는 세계 자체가 달랐다. 시작에서부터 귀족과 평민의 삶으로 나뉘었다.
용병보다 정식 코스를 밟은 기사가 인정받는 건 당연했지만, 고생의 정도로 치자면 용병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카나리아는 진실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기에 그걸 아는 자였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무릎을 꿇고야 말았다.
***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무릎을 탁, 쳤다.
맞아. 레이몬드는 평민들을 구해서 부하로 둔다고 했지.
카르고도 그랬는데 코아도 그랬구나.
몸에 배어 있는 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전투 감각은, 생존을 위해 익혀진 산물이었던 거다.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말이다.
세상에 거저 얻어지는 건 없구나.
나는 코아의 근성에 깊은 존경심을 느끼며 속으로 박수를 쳤다.
그런 생각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옆에 있는 어머니도, 집사와 하녀들의 고개도 나와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코아가 뽑히는 건 거의 확정인 듯했다.
***
다른 사람들의 대련도 모두 끝이 나고, 테스트는 3차인 최종면접만을 남겨두었다.
지금까지는 실력이 판단요인이었다면 면접은 일종의 인성 테스트였다.
편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유도하기 위해 면접은 한 사람씩 불러 진행했다. 면접관들과 테이블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었다.
질문은 주로 구체적인 기사 경력과 각오에 관한 거였는데, 후보들은 하나같이 청산유수로 대답했다. 어찌나 말들을 잘하는지 어디 스피치 학원이라도 다녔나 했더니, 하녀장의 얘기가 중요한 면접은 오기 전에 준비를 많이 한다고.
그래서 과묵한 코아의 차례가 되자 또 다시 긴장이 되었다. 자신이 뽑힐 줄 알고 있으니 분명히 그냥 왔을 텐데 어쩌지.
코아는 앉으라는 손짓에 의자에 정자세로 바르게 앉았다. 무예를 하는 이들은 언제나 몸가짐을 정돈하는 게 습관인가보다.
이윽고 하녀장을 시작으로 질문이 던져졌다.
“그전에는 어디에서 어떤 일을 했나요?”
“스무 살까지는 용병 단에 몸을 의탁하여 지내다가 그 후론 신전의 기사로 일했습니다.”
“이 일을 지원하게 된 동기가 뭐예요?”
“더 넓은 세상에 나와 경험을 쌓고 싶었습니다. 물론 실력을 충분히 쌓았다는 자신이 붙었기 때문입니다.”
우려와 달리 코아는 묻는 말에 대답을 아주 잘 해 주었다.
“특기는 무엇인가요?”
“주로 검을 사용하지만, 제 특기는 암기술입니다.”
“오호. 그래요? 한번 보여줄 수 있나요?”
“네.”
어머니가 관심을 보이며 구석에 대기하고 있는 하인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하인 하나가 여러 개의 암기가 꽂힌 주머니를 가져와 코아에게 건네주었다.
코아는 그중에 하나를 빼내어 사람이 아무도 없는 창가 쪽을 응시하더니 그것을 내던졌다. 휘리릭. 날아간 단도가 창과 창 사이의 벽에 꽂혔다.
하인이 다가가 자세히 살피더니 “칼끝에 날벌레 한 마리가 걸려있습니다.”라고 알렸다. 공중을 배회하고 있다가 칼에 꽂혀 벽에 박힌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와우. 브라보!”
그의 확인 사살에 어머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구 박수를 쳤다. 공작 마님의 행동에 모두가 따라 일어나 박수 세례를 쏟아부었다. 이 중에 억지로 움직인 이는 아무도 없었다.
면접이 모두 끝나자 심사위원들만이 제자리에 남았다. 집사님이 후보들에게 매겨진 점수를 정리하여 합산하는 동안, 어머니는 내게 물어왔다.
“에일린. 네 생각은 어떠니?”
“네?”
“누가 가장 마음에 드니?”
“어, 저는 코아라는 분이 가장 좋아요.”
마무리 단계라고 이제야 내 의중을 묻나 보다. 당연히 품어왔던 이름을 거론하자, 다른 이들의 동의가 쏟아졌다.
“저도요.”
“저도 그렇습니다.”
“나 역시.”
하녀장, 집사, 어머니까지 모조리 같은 마음이었다. 어머니는 목을 크흠, 하고 가다듬더니 큰소리로 위엄있게 선언했다.
“그럼 정해졌네. 코아를 에일린의 호위기사로 하도록 하죠.”
어머니는 나를 보더니 싱긋 웃었다.
비록 과정은 복잡했지만 최종결론은 무사히 정해졌다.
***
코아는 며칠 후에 공작 저로 들어왔다. 앞으로는 이곳에서 함께 지낼 예정이었다.
호위기사인 그녀는 늘 나와 붙어 다녔다. 그전에는 남자호위들뿐이라 한 걸음 떨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그림자처럼 내 삶에 스며들었다.
이러려고 같은 성별을 뽑은 거겠지?
마치 24시간 감시 체계 같았지만 그 상대가 코아라서 천만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대공을 만나러 가는 게 더는 불가능할 뻔했다.
그녀는 엄밀히 말하면 대공의 세력. 그렇기에 코아에게 신경이 많이 쓰였다. 뭣보다 나의 최애의 사람이니 아껴주고픈 마음이 컸다.
꼭 최애의 물건처럼 최애의 사람도 소중한 거지.
그래서일까. 둘이서 남겨질 때마다 다리 아프니 앉아라, 목은 마르지 않나, 필요한 게 있느냐 계속 물어보고 챙겼더니, 급기야 코아가 부담스러워했다.
“그러지 마십시오. 공녀님.”
“아니에요. 아니, 아니야.”
나는 아직 반말조차 익숙지 않은 상태고.
“공녀님이 자꾸 그러시면 제가 호위하기가 힘듭니다.”
“알았어요. 아니, 알았어.”
그래. 챙김 받는 것도 귀찮은 일일 수 있지. 간섭이랑 결이 비슷하니까.
참다못한 코아가 진지하게 부탁하고 나서야 나는 과한 행동을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내재하여 이글거리던 내 애정은 대신 다른 곳으로 발산되었다.
“안녕. 에일린.”
“아드리엔, 어서 와! 여기는 새로 뽑은 내 호위 코아야.”
“오호. 호위를 뽑았다더니 이쪽이구나.”
나는 아드리엔이 정원 테이블에 앉자마자 당장 코아부터 소개했다. 어머니께 언제 얘기를 전해 들었는지 그는 내가 호위기사를 구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코아입니다.”
“반가워. 우리 에일린 잘 부탁해.”
아드리엔은 눈을 반으로 접으며 그녀를 반겨주었다. 그리고는 코아에게 시선이 박혀있는 나를 쳐다보았다.
“너 왠지 신난 거 같다?”
“응? 그래 보여?”
“어 완전. 호위가 생긴 게 그렇게 좋아?”
“나 아무래도 그런가 봐. 어디 더 자랑할 데 없을까?”
대공의 사람. 레이몬드의 사람!
곁에 있으니 막 잘해주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꼭 그의 분신이라도 곁에 둔 것처럼 마음이 두근두근 설렜다.
내가 턱을 괴고 남은 손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고 있자니 아드리엔이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우리 집에 오면 되겠네.”
“응?”
“나비엔이 조만간 티타임 열거라면서 초대장을 쓰고 있더라고.”
“어. 맞네! 그래야겠어.”
나비엔한테 자랑하면 되겠구나!
새로운 자랑 처를 확보한 나는 신이 나서 키득거렸다.
코아에 대한 나의 자랑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황제가 불러서 황성에 갔을 때도 들썩이던 내 어깨는 멈출 줄을 몰랐으니까. 그래도 적 앞이니 최대한 자제하려 노력했지만, 황제는 나의 상태를 단번에 파악했다.
“에일린.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소?”
“네?”
아니, 그건 어떻게 알았대?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다면.”
깜짝 놀라서 굳어있으려니까 황제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리켰다.
“광대가 올라가서 내려오질 않고 있군.”
그리고는 느른한 움직임으로 턱선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움직였다. 나는 부끄러움에 양손으로 볼을 가렸다.“앗, 그런가요.”
“무슨 좋은 일이지?”
황제가 사연을 물어오자 나는 거짓말을 할까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딱히 그럴 이유도, 적절한 변명도 떠오르질 않아서 그냥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제게 새 호위가 생겼어요, 폐하.”
“호오. 새 호위라.”
“네. 저기 있는 코아입니다.”
황제는 테라스 안쪽에 서 있는 코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나 대공의 세력인 줄 알까 잠시 마음을 졸였지만, 레이몬드가 코아의 얼굴은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줬던 기억이 나서 안심했다.
“호위가 생긴 게 그리도 좋은 일인가?”
“네! 친구가 생겨서 좋아요.”
“친구라….”
그는 턱을 매만지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대는 참 자애롭군. 신분에 따라서 사람을 가리지 않으니 말이야. 평민이든 귀족이든 황제든.”
“그런가요. 하핫.”
칭찬인 줄 알고 뒤통수를 매만지며 쑥스러워하던 나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음? 그런데 끝에 황제라는 단어는 왜 들어가는 거지?
심히 의아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물어보면 괜히 껄끄러워질 수도 있을 것 같으니 배시시 웃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원대로 실컷 자랑하고 다니다가 끝에는 대공한테까지 갔다.
“에일린.”
“레이몬드!”
나는 술집 아지트 2층 방에 들어서자마자 다짜고짜 외쳤다.
“코아가 제 호위라서 정말 좋아요!”
“어, 그런가?”
“네! 무예도 출중하고 말도 얼마나 잘한다고요.”
앞뒤 문맥도 다 잘라버린 채 신나게 칭찬을 늘어놓자, 뒤에 선 코아가 얼굴을 붉히며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대공은 오랜만에 봤을 그녀의 얼굴을 일별하더니 이쪽으로 오라는 듯 손짓했다.
“코아.”
“네. 대공 전하.”
“….”
레이몬드는 막상 불러놓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적이 계속되자 코아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전하. 왜 그러시는지….”
“아니다. 앞으로 에일린을 잘 지키도록.”
“아… 알겠습니다.”
코아는 허리를 숙이고는 다시 뒤로 물러났다.
그 장면을 어리둥절하게 쳐다보고 있던 나는 대뜸 생각난 말을 내뱉었다.
“앗, 맞다. 이 말을 깜빡했는데요.”
레이몬드가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레이몬드를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게 제일 좋아요!”
나는 행복한 기분에 거의 펄쩍 뛰다시피 했다.
그러자 볼이 복숭앗빛이 된 레이몬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