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우리는 술집 아지트로 가는 대신에 길거리로 향했다.
예전에 하리네 디저트를 먹었던 바로 그 장소였다. 그때처럼 간이 테이블이 설치되어 있었고, 우리가 도착하여 의자에 앉자마자 하녀들이 음식을 내왔다.
9시가 지난 시각.
밤이라고는 하나 저녁을 다 먹은 지 얼마 안 되어 야식을 먹기에는 좀 이른 시각이었다.
이곳에는 야식이라는 개념이 없는 듯하지만 말이다.
“배가 부를 테니 조금만 들지.”
“그럴게요.”
그래서인지 내어온 요리는 양이 적고 간단했다. 그중에 단연 내 눈에 띈 메뉴는 말캉 버섯이었다.
“와 말캉 버섯이네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간 그리웠는데.”
“나 역시도 그리웠어.”
레이몬드는 내가 포크로 말캉 버섯을 쿡 찍어 입안에 넣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오물오물 야무지게 씹어댔다.
응? 그런데 레이몬드는 먹고 싶을 때 언제든지 먹을 수 있지 않나?
아 맞아. 한동안 퍼먼트를 떠나있어서 못 먹었겠구나.
저 혼자 의문을 제기하고 또 답을 구하면서 요리를 이것저것 맛보았다. 전에도 느꼈지만 대공 사용인들의 요리에는 간이 삼삼하면서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요리법이 주로 사용되었다. 이게 그의 입맛인 거겠지?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맛이 레이몬드의 성정과도 꼭 잘 어울렸다.
이것저것을 다 맛보다가 예상대로 얼마 가지 않아 배가 차버렸다.
맛있는데 배부르다, 쩝.
나는 많이 먹지 못하고서 식기를 내려놔야 했다. 무엇보다 아까 저녁을 너무 한껏 먹은 탓이었다.
“후. 잘 먹었습니다.”
“많이 먹지 못하는군. 식사 시간이 아니라 그렇지.”
“네. 배가 금세 부르네요.”
맛있는 것들을 눈앞에 두고도 배가 불러서 더 먹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레이몬드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리 생각하는데 그 역시 식기를 내려두면서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밤에만 만나니 불편하군.”
“아무래도 그렇죠?”
나는 그의 말에 동조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한 번씩 밤마실을 나오는 것도 상당히 긴장되는 일이었다. 혹시나 들킬까 봐 마음을 졸여야 했고, 또 귀가한 후에도 조용히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해야 했으니까.
“그대가 카일의 약혼녀만 아니었어도.”
그렇게 말하는 레이몬드의 표정이 무척이나 씁쓸했다.
그건 그렇지. 에일린이 황제의 약혼녀만 아니었어도 낮에 대공을 만나는데 아무런 장애물이 없을 테니까. 거기에는 솔직히 나의 바람이 훨씬 더 컸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금 미뤄두었던 의문이 슬금슬금 피어올랐다.
황제는 나를 내칠 생각이 없는 건가? 대체 왜 나를 그냥 두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요즘은 도통 부르지도 않고 방치해두는데, 이럴 거면 얼른 결판을 내줬으면 싶었다.
이 답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 분위기를 전환하려는지 레이몬드가 안부를 물어왔다.
“요즘은 생활하기가 어때?”
“괜찮아요. 한 번씩 밖에 나가기도 하고요.”
“그래? 허락을 해주시나 보군.”
“네. 아드리엔 런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기사거든요. 다른 사람은 안 돼도 걔랑은 같이 나갈 수 있게 허락을 해주세요.”
“아드리엔 런….”
그는 이름을 곱씹으며 미간을 구겼다. 음절 하나하나를 힘주어 말하는 게 꼭 화가 난 듯한 태도였다.
보아하니 누군지 아는 눈치인데. 런 가가 유명한 검술 명가라니까 레이몬드도 아드리엔을 알겠지? 혹시 사이가 나쁜 걸까?
그의 표정이 좋지 않자 괜스레 걱정이 꼬리를 물었다.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레이몬드의 질문세례가 이어졌다.
“그 친구와 단둘이 나가나?”
“네. 둘이서요.”
“많이 친한가 보군.”
“집안끼리 서로 잘 알아요. 소꿉친구거든요.”
“소꿉친구라….”
“부모님이 아드리엔을 친아들처럼 엄청 예뻐하세요. 하핫.”
나는 잘 아는 것처럼 연기를 펼치며 그에게 설명했다.
실은 친한 걸 어필하여 그를 좀 좋게 봐주기를 원하는 마음도 있었다. 아드리엔이 유일한 친구에다가 그에게 도움을 많이 받은 것도 사실이니까.
또한 혹시나 남의 일을 말하듯이 어색할까 봐 일부러 잔뜩 오바했는데, 무슨 일인지 레이몬드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가고 있었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역시나 연기가 서툴렀던 걸까?
차라리 이 화제에서 벗어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나는 얼른 새로운 소식을 꺼냈다.
“어머니께서는 제게 새로운 호위를 붙여주실 계획을 가지고 계세요.”
“오. 그런가?”
화제전환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일순 레이몬드의 표정에서 먹구름이 싹 거두어졌다.
실은 레이몬드를 만나러 오기 위해 혼자서 탈출을 감행했던 날, 나는 공작 저의 호위 두 명을 쓰러뜨렸다. 그 일로 저택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고, 걱정이 깊어진 부모님은 내게 개인 호위를 붙일 결심을 하신 것이다.
휴. 다시 생각해도 정체를 들키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야.
“같은 성별의 호위를 구할 것 같아요. 공작 저에는 실력이 좋은 여자분이 없거든요. 조만간 신문에 공고를 내실 것 같아요.”
그 말을 귀담아듣던 레이몬드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렇다면 코아를 에일린의 호위로 붙이면 어떨까.”
“네? 코아요?”
“그래. 그렇게 되면 낮에도 얼마든지 나와 접촉할 수 있을 테니까.”
오호, 그러네? 맞네!
호위가 대공의 사람이면 눈치를 보지 않고 얼마든지 나가서 볼 수 있겠구나.
그의 아이디어는 정말이지 나이스한 것이었다. 나는 감격한 나머지 박수를 크게 짝, 쳤다.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공고가 뜨면 알려줘. 시험을 보게 할 테니까.”
“네. 알았어요.”
말아쥔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 행동반경 또한 훨씬 넓어질 수 있을 테니까.
대공은 야간 식사를 마친 후 나를 직접 데려다주었다. 온이 모습을 숨긴 채 곁에서 함께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레이몬드와 단둘이 있는 기분이었다.
밤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몸을 감싸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자 레이몬드가 자신의 제복 마이를 벗더니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앗. 괜찮은데.”
“숄도 없고, 내가 길거리에서 안아줄 수는 없으니까.”
차마 거절하지 못한 내가 쭈뼛거리자, 레이몬드는 그렇게 맞받아쳤다. 납치되었을 당시 숄을 덮어주었을 때 그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붙잡은 일을 기억하고 말하는 듯했다.
우리 대공님, 그 생각이 났구나?
쑥스러워라고 말했나 본데 전혀 그렇지 않지롱. 나는 당당하거든?
문득 그리워지는 때였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그때가.
“다음에는 디저트를 함께하지.”
“네. 조심히 가세요.”
테라스에 오른 레이몬드는 나를 내려둔 후에 떠났다. 나는 손을 흔들며 공작 저를 유유히 빠져나가는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
자꾸만 황제를 떠올렸기 때문일까?
한동안 뜸하던 그는 아주 오랜만에 나를 황성으로 불러들였다.
이번에는 제발 기다리던 파혼 소식을 전해주기를….
그렇게 빌면서도 지난번 티파티에서 들었던 내용이 떠올라 유독 긴장이 되었다.
황제는 벌써 흑화가 진행 중이었다.
클레어가 이것저것 물어온 소식에 따르면, 그는 확실히 관대한 지도자를 표방하던 자가 맞는지 의심스러운 행동들을 보였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구석이 착실히 늘어가고 있었다.
인성 파탄자의 공통적인 특징은 조울증에 기분파에다가 스스로의 감정을 못 이겨 멋대로 힘이나 권력을 휘두른다는 점이다. 원작소설에서도 황제는 착실히 이 루트를 따라가기 때문에, 만나기 전에 각오를 다질 필요가 있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오랜만이오, 에일린.”
소파에 앉은 황제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내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그는 여전한 실크 같은 금발을 휘날리며 화사한 외모를 뽐내었다.
그와 나는 시녀가 내어온 차와 디저트를 들며 안부를 묻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이때까지는 황제는 별달리 달라진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조금은 안심하려는 찰나, 그가 내게 의미심장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
“에일린. 최근에 수도에 파다한 소문을 들었소?”
“무슨 소문을 말씀하시나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며 두 눈을 깜빡거렸다. 소문이라면 다들 그 얘기만 했으니 뻔했지만, 우선은 모르는 척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귀족 회의에서 있었던 나에 대한 소문 말이오.”
“아, 그 얘기라면 듣긴 했어요.”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던가?”
구체적인 언급에 상식적인 대답을 했더니 황제는 한술 더 떠서 질문을 심도 있게 하였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자기가 직접 알아보면 될 것을!
짜증이 마구 솟구쳤지만, 상대는 내가 몸담은 제국의 제1 권력자. 공손한 대답을 들려주어야 했다.
나는 꾹 참고 적절한 대답이라고 생각한 바를 내놓았다.
“사람들은 그저 폐하를 염려하지요. 혹 정치에 힘쓰시다가 지치신 게 아닌가 하고요.”
“그렇군. 그렇다면 그대는 어찌 생각하지?”
그 순간, 머릿속을 관통하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다.
이건 시험이구나…!
내가 뭐라고 말해야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선뜻 답하지 못하고서 잠시간 정답을 찾아 헤맸다.
너무 착하게 말하면 계속 나를 곁에 두려 할 테고, 너무 못되게 말하면 곁에서 떼어내는 것도 모자라 아주 멀리 타국이나 지옥으로 보내버리겠지. 양극단을 배제한 그 중간 어디쯤을 택해야 할까?
제발 이제는 약혼녀의 자리에서 내쳐주기를 바라며, 조금은 원작의 에일린을 따라 해보기로 했다. 나는 침을 꼴깍 삼긴 후에 입술을 열었다.
“저는 폐하께서 과하게 처신하셨다고 생각했어요. 불같은 성정을 한 번쯤은 참고 움직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주먹을 꼭 말아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