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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35화 (35/125)

35화

그날 이후로 옥희는 내게 다시금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한동안 나를 부려먹는 통에 대우가 낮아졌다가 도로 귀한 손님의 지위로 회복한 것이다.

이유는 명백했다. 다친 레이몬드에게 나를 부르자고 독려했기 때문이지.

“아이구, 우리 똑똑한 옥희. 맛있게 먹어.”

“옥, 오옥.”

콕콕콕콕.

나는 신나게 해바라기 씨를 쪼아먹는 옥희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래서 내가 널 이뻐했지.

어쩌면 옥희가 내 치유력을 의도적으로 훈련시킨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이 녀석은 그 훈련의 목적지가 어딘지 분명히 아는 느낌이었으니까.

게다가 옥희는 내가 광호를 치료해준 이후로는 상처 입은 동물들을 데려오지 않았다. 더 이상 아무도 다치지 않아서 일 리가 없는데도, 짐작만 할 뿐 그 연유를 정확히는 알 수가 없었다.

“옥희야. 요즘은 왜 다친 애들을 안 데려오는 거야?”

“옥, 옥옥, 옥, 옥오오오, 옥옥옥.”

“그래. 네가 사람 말을 할 수 있으면 참 좋겠네.”

“옥, 옥오오.”

옥희가 뭔가 설명을 하려는 것 같지만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턱을 괸 채 녀석의 울음소리를 들어줄 뿐이었다.

똑똑.

아쉬운 마음을 갈무리하려는 그때 창가에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응? 누구지? 레이몬드한테서는 연락받은 게 없는데?

나는 반사적으로 옥희의 다리를 보았지만 역시나 쪽지는 달려 있지 않았다.

코아가 온 건가?

조금 긴장되는 마음으로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자, 의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내리쬐는 달빛 아래에 흐드러진 흑발, 그 아래로 영롱한 푸른 광채를 띤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이몬드.”

내게 호명된 레이몬드는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한 번 더 유리문을 두드렸다. 내가 서둘러 문을 열자 그가 잔뜩 상기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에일린.”

와, 예기치 않고 찾아오는 남자친구한테 그렇게 설렌다더니 바로 이런 기분이구나.

완전 설렘 주의보다!

나는 내 몰골이 어떻게 보일지는 까맣게 잊은 채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미안하군.”

“무슨 말씀을요. 어서 오세요.”

이런 밤손님이라면 백번 천번 환영이지.

대체 무슨 일로 갑자기 온 걸까 궁금함을 담은 채 그에게 내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그때까지 해바라기 씨를 먹던 옥희가 날갯짓을 하며 레이몬드를 반겼다.

“옥희와 함께 있었군.”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말없이 방을 둘러보았다. 지난번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이지만 이렇게 머무는 것은 처음이니 어색할 만도 했다.

그런데 그 행위가 꼭 할 말이 있는데 괜히 말머리를 돌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먼저 운을 띄워주는 편이 좋겠다 싶었다.

“레이몬드. 여기까지 무슨 일이에요?”

“아, 그렇지. 사실 궁금한 것도 있고 또 보고 싶기도 해서.”

“편히 말씀해보세요. 뭐가 궁금하고 뭐가 보고 싶으셨어요?”

나는 눈을 말똥말똥 뜨며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얼마든지 말해보라는 신호였는데, 어쩐지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게…. 포션 때문에.”

오 그렇지, 포션!!!!

그러고 보니 레이몬드는 아주 멀쩡해진 모습으로 나타났구나.

“이제 몸은 괜찮아요? 어디 한 번 봐봐요.”

나는 확인을 위해 그의 상의로 손을 뻗었다. 셔츠를 올리자 레이몬드의 몸이 굳어지는 게 느껴지면서 드러난 그의 근육은 잔뜩 성이 나 있었다.

“헙.”

그 순간 내 동공은 지진을 일으켰다. 상처 부위 하나 없이 매끈한 살결은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만큼 근사했으니까.

순간 코피가 터질 것 같이 피가 쏠리는 감각에, 나는 얼른 손을 떼었다.

“이… 이제 다 나아서 말끔하네요.”

“에일린 덕분에. 포션을 바르고 나니 상처도 고통도 싹 가셨어.”

“정말 다행이다! 어우, 근데 왜 이렇게 덥죠.”

나는 뜨거워진 볼을 양손으로 번갈아 가며 부채질을 했다.

심쿵하느라 잠시 정신이 다른데 팔렸지만, 중요한 것은 레이몬드가 다 나았다는 사실이었다.

치유력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구나.

나의 능력은 이제야 제대로 번지수를 찾은 듯했다.

힘을 발견하고 훈련하여 그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은 굉장히 감격스러웠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쌓였던 피로가 한순간에 증발해버리는 기분이었다.

레이몬드는 옷을 추스르고는 내게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에일린. 혹시 포션을 어디서 구했는지 물어봐도 될까?”

“네? 그… 그게.”

질문은 마치 기습공격과 같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지금 당장 진실을 말해야 할까?

그 짧은 순간 머릿속은 엄청나게 복잡해졌다. 대답을 미리 대비해두지 못해서 대혼란이 일어난 것이다.

안절부절못하던 내가 선뜻 대답을 내놓지 않자 레이몬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 부담을 줄 생각은 없어.”

“그게, 실은. 가문의 창고에서 몰래 빼 온 거라서요. 저도 어디서 났는지는 몰라요. 죄송해요.”

당황한 나는 잘도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딱히 능력을 감출 생각은 없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아직은 진실을 말할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게 내 침이라고 말하냐고!

남들은 치유력이라고 하면 손에서 성스러운 기운을 발하는 우아한 방법을 사용하곤 하는데. 내 경우는 발상에서부터 완전히 깼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상상해도 물에다가 침을 떨어뜨리는 행위는 아름답게 포장할래야 포장할 수가 없잖아?

후우. 신이시여. 기왕 주려면 그럴듯하게 주시지 이게 뭡니까.

그 덕에 입 냄새도 안 나고 이가 아플 일은 없긴 하겠다만 모양 빠지게.

치유력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던 마음에 이제는 조그마한 불평이 일었다.

“죄송하다니. 오히려 감사 인사를 해야 하는 쪽은 나인데.”

레이몬드는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포션이란 마법사가 궁극의 지식을 사용해 만들어내는 신비한 물약으로, 돈이 있어도 구하기가 힘들다. 마법사와의 거래가 트여야 구매도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가문의 소중한 것을 기꺼이 내어준 줄 알고, 표현을 조금 더 보태자면 황송해하기까지 했다. 실은 전혀 그런 게 아닌데.

아마도 레이몬드는 치료제를 더 확보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겠지. 그러고 보니 그의 세력에 힐러가 없긴 하다. 루슬로 가와 오랜 세월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 신전세력이 있긴 하지만, 그들과의 사이도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영역이니까.

미안해요, 레이몬드. 조만간 밝힐게요. 흑흑.

나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짜낼 것을 다짐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그럼 다시 올게. 다음번에는 함께 식사하도록 하지.”

“좋아요.”

나는 그 말이 기뻐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기간 대공을 보지 못하고 그림으로만 버텨왔는데, 이제 실물로 마음껏 힐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이몬드는 언제 또 오려나?

그를 배웅하고 돌아온 난, 그때까지도 해바라기 씨를 먹고 있던 옥희를 바라보며 기대감에 벅차 실실 웃었다.

***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밤. 레이몬드가 찾아왔다.

며칠은 걸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나 일찍 올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에일린. 가지.”

“앗. 레이몬드.”

유리문 사이로 얼굴을 내민 레이몬드는 날 보자마자 나오라며 손짓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오늘 올 줄 몰랐기에 옷이 잠옷 원피스 차림이었다.

“잠시만요. 저,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렇군. 실례했어. 밖에서 기다릴게.”

그제야 내 얇은 차림새를 인지한 그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돌렸다. 그대로 테라스에서 기다릴 심산 같았다.

“레이몬드. 그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럴 순 없어. 숙녀의 잠옷 차림을 보다니.”

“하지만 거기에 있으면 눈에 띄고 말 거예요.”

“아.”

레이몬드는 내 말을 듣자 상황을 인지했다. 그는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기에, 테라스에 떡 하니 서 있다가는 발각될 가능성이 높았다.

“크흠. 그럼 잠깐만 실례하지.”

하는 수 없이 유리문을 통과한 레이몬드는 최대한 내게서 시선을 두지 않으려 애썼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쿡쿡.”

“왜… 웃는 거지.”

“아아, 정말. 우리 레이몬드는 귀엽다니까.”

나는 최애를 향한 거침없는 애정을 표현했다. 사실 덕후라면 이 정도 반응이 얼마나 작고 사소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원래라면 벽을 뿌셔뿌셔도 모자라는데.

하지만 레이몬드는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눈동자가 떨리더니 급기야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그러고는 가능하면 나와 멀리 떨어지려는 듯 구석으로 가서는 “귀엽다니, 다 큰 사내에게 귀엽다는 말을….” 이라며 저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린아이 취급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차가운 도시 남자처럼 보이는 그가 실은 마음이 아주 따뜻하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는걸. 게다가 만사에 능글능글하고 능숙한 황제보다는 저런 순수한 모습이 훨씬 매력 있다고. 일명 조신남이지!

나는 등을 돌리고 선 레이몬드를 두고 옷장으로 가 옷을 갈아입었다.

찰나긴 하지만 그를 곁에 두고서 속옷 차림이 된다는 게 생각보다 부끄럽고 긴장되었다. 천끼리 부딪치는 부스럭 소리가 귀를 긁자, 괜스레 옆구리까지 간질간질했다.

“저 다 입었어요.”

나는 움직이기 편한 활동복으로 갈아입고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레이몬드는 꼭 면벽 수행을 하듯이 그때까지도 창만 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레이몬드?”

불러도 꼼짝을 안 하기에 손을 올려 그의 팔을 톡톡 쳤다. 그러자 레이몬드가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뒤로 돌았다.

“에일린.”

“옷 다 입었는데.”

“그렇군. 그럼 갈까.”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얼굴에 불이 나 있었다.

우리는 테라스로 나갔고, 전에 했듯이 레이몬드가 한쪽 팔로 내 허리를 감았다. 지난번에는 조심스러우면서도 거침없이 했던 행동인데, 오늘따라 그는 손을 뻗기도 전에 쭈뼛쭈뼛하며 망설이는 기운이 느껴졌다.

앗. 혹시 내 뱃살을 본 걸까?

아까 저녁 식사 때 고급진 스테이크가 나온 바람에 신나게 먹어댔는데, 그래서 그런가 유독 배가 빵빵해 보였다. 올 거라고 미리 말해줬다면 좀 적게 먹었을 텐데. 데리고 가는데도 좀 덜 무겁고 말이야.

살짝 원망스럽긴 했지만 일찍 만나러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말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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