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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34화 (34/125)

34화

그때 레이몬드는 막 한 놈을 처리하고서 마차 쪽으로 뛰어들었다. 인질이 있는 상황은 일반적으로 굉장히 불리하다. 복면이 온의 가족들을 노리자 레이몬드는 그걸 막아내느라 적이 휘두른 검이 스쳐 그만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핸디캡을 안고 싸우다 보니 실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결과였다.

그러나 대공은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검호. 황제 때문에 반쯤은 숨기고 있지만 실은 대단한 실력자다. 그는 인질이 있는 와중에도 현란한 검술과 강한 힘으로 복면의 칼을 쳐내는 데 성공했다.

캉.

칼은 저 멀리 날아가 땅에 박혀버리고, 무기를 잃은 자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위기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깔끔한 승리로 끝이 났다.

“휴, 다행이네요. 복면의 정체는 누구였어요?”

“그들은 셰일 왕과 황제의 연합세력이었어. 칼을 맞대었을 때 사용하는 검술이 익숙한 방식과 그렇지 않은 방식이 섞여 있다 싶더니. 전투가 끝나고 나서 살아남은 자들을 추궁해서 자백을 받았지.”

“그렇구나.”

그의 말대로였다.

셰일 왕에게 가장 막강한 세력은 네버레스트이니 그들이 도주를 막을만한 힘이 없었겠지. 그래서 본래 팔아넘기려고 했던 황제 쪽에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게다가 국경 지는 양쪽 나라에서 협공하여 덮치기에 가장 최적의 장소니까.

레이몬드는 이 승리가 네버레스트 수장인 온 덕분이라고 했다.

“기습공격이 시작이었는데 온이 전부 다 막아냈어. 아무런 예고도 기척도 없었는데 말이야. 실력이 굉장하더군.”

레이몬드는 새 장난감에 들뜬 아이처럼 온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자신이 다친 건 전투 중에 일어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일이라고 강조하면서 말이다.

“온을 내 편으로 만들고 나니 아주 든든해. 다 에일린이 소개해준 덕분이야. 고맙게 생각해.”

“아니에요. 애쓴 건 레이몬드인걸요.”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네버레스트 영입을 권하고 자책하던 마음이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이만한 부상이기에 천만다행이기도 했다.

“멜라스. 잠깐 들어오지.”

이야기를 끝낸 레이몬드는 대뜸 멜라스를 방 안으로 불렀다. 문밖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멜라스가 부름을 듣고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생각해보니 내 부하들을 한 번도 소개하지 않았더군. 진즉 해야 했는데 그동안 너무 경황이 없었어. 용서해줘, 에일린.”

“무슨 그런 말씀을. 전 괜찮아요.”

레이몬드는 손사래를 치는 나를 보며 양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멜라스를 가리키며 소개했다.

“여기는 멜라스. 내 수족 같은 자야.”

“반갑습니다. 코웻 공녀님.”

멜라스는 정중한 몸짓으로 허리를 숙였다. 이미 아는 사이끼리 새삼스레 인사를 하려니 낯간지러웠지만 나 역시 묵례를 했다.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그에게 전하도록 해. 다 들어주라고 해둘 테니까.”

“알겠어요.”

나는 레이몬드의 세심한 배려가 무척 고마웠다. 이제야말로 한배를 탄 동료가 된 기분이랄까?

그런데 그때 레이몬드가 가슴을 움켜쥐며 상체를 숙였다.

“크흑.”

“대공 전하. 괜찮으십니까?”

“레이몬드!”

나는 깜짝 놀라 그의 안색을 살폈다. 공격을 받은 부위가 욱신욱신 쑤시는 듯했다.

“조금… 아프군.”

“지금은 안정을 위해 충분히 휴식하셔야 합니다.”

“그래요. 몸이 우선이에요. 다른 일들은 나중에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겉보기에는 별거 아닌 상처지만 깊은 내상이 있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아니야. 곧 괜찮아질 거야.”

레이몬드는 이 와중에도 고집을 부렸다. 그의 성격을 아는 멜라스가 가벼운 한숨을 쉬며 그를 달랬다.

“제가 공녀님을 모셔가서 저희 애들과 네버레스트 단원들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러니 대공 전하께서는 쉬시지요.”

“맞아요. 지금부터 무조건 두 시간 푹 자고 일어나세요!”

나는 옆에서 무던히도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몬드는 내 단호한 표정을 한 번 보더니 피식 웃으며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그럼 멜라스. 부탁하지.”

“잘 생각했어요. 레이몬드.”

“그 전에 에일린과 잠시 대화하고 싶군.”

“그럼 전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멜라스는 한결 안심한 표정으로 먼저 방을 나섰다. 달칵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레이몬드가 시선을 마주해왔다.

“에일린.”

“네. 레이몬드.”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걸까?

기다리고 있으려니 그의 볼이 복숭앗빛으로 물들며 낮게 속삭였다.

“잠들기 전까지 곁에 있어 줘.”

“네? 어… 알겠어요.”

의외의 요청에 어리둥절해진 나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부탁은 아무것도 아니지.

“그럼 대신에.”

이때다 싶어 나는 품에서 병을 하나 꺼냈다. 그 작은 병 안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이걸 상처 부위에 바르세요.”

“그건 뭐지? 혹시 포션인가?”

“어, 네. 맞아요.”

포션! 그거 좋은 명칭인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사실은 평범한 물에다가 치유 효과가 있는 침을 떨어뜨린 거였지만, 굳이 자세한 설명으로 신뢰를 떨어뜨릴 필요는 없지.

앞으로 이걸 포션이라고 부르면 되겠다!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해준 레이몬드에게 박수를.

“이런 귀한 것을 주다니 고맙군.”

“얼른 나아요. 레이몬드.”

나는 침대에 누운 그에게 이불을 올려 덮어주었다.

그는 몇 번쯤 눈을 깜빡이더니 어느 순간 눈꺼풀이 무거워 더는 들어 올리지 못했다. 곧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잠이 든 레이몬드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커튼 같이 처진 길고 풍성한 속눈썹에, 오뚝한 콧날이 높이 매끈했고, 적당히 도톰한 탐스러운 입술이 보기 좋게 자리 잡았다. 눈을 감았기에 바다 같이 영롱한 그의 눈망울은 비록 보이지 않았지만, 고요히 눈을 감은 모습이 곱고 성스러워 보였다.

자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건 아주 특별한 것일 테지. 예전에 내가 잠들었을 때 레이몬드도 이런 생각을 했을까?

나는 다시 한번 이불을 정돈하고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손잡이마저 소리 나지 않게 돌리고 문을 닫자, 기다리고 있던 멜라스가 내게로 다가왔다.

“공녀님. 이쪽으로 오시죠.”

그는 나를 안내하며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여기에 있는 부하들은 일부입니다. 수도 쪽을 맡고 있는 녀석들이지요. 전하의 세력은 언제 어디서든 움직이기 좋게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습니다. 이곳 외에도 근처 아지트가 몇 개 더 있습니다.”

“그렇군요.”

레이몬드가 내게 보인 신뢰가 멜라스의 눈에도 보였는지, 그는 거리낌 없이 대공의 세력 상황에 대해 말해주었다.

우리는 1층으로 내려가 가운뎃방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레이몬드 방과는 다르게 아주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병풍처럼 둘린 책장에 엄청난 양의 자료들이 꽂혀있고 여러 책상이 즐비해 있으며 몇몇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이들은 멜라스의 등장에도 제 할 일을 이어나가더니 내 존재를 인지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여기는 이든, 에반, 클로이, 드류입니다.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역할을 하지요. 그리고 이분은 너희들도 알다시피 코웻 공녀님이시다.”

“안녕하세요.”

나는 가벼운 묵례로 예를 차렸다.

“이 녀석들은 정보 쪽에 특화되어 있을 뿐, 무예도 다들 기본 할당량은 한답니다.”

멜라스의 설명에 드류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항의했다.

“멜라스 님. 인간적으로 이든은 빼야 하지 않아요?”

“흠. 그런가.”

“아니, 내가 뭘! 나도 할 땐 한다고.”

드류의 말에 너도나도 동의하고 나서자 이든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반박했다. 아무래도 내 앞에서 망신을 당한 게 부끄러운 것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웃음이 나와서 쿡쿡거렸다. 드류의 농담 덕분에 긴장감이 흐르던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모두가 표정이 밝은 건 아니었다. 한쪽 구석에 홀로 서 있던 어두컴컴한 남자가 뒤늦게 내 쪽으로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옅은 하늘색 머리칼에 까만 눈동자를 가진 그는 찢어진 눈매가 아주 날카로워 보였다.

네버레스트의 단장 온이다.

나는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원작소설에도 간단한 묘사가 있었는데, 그 묘사가 문자 그대로 구현된 실제를 보는 건 신기한 기분이었다.

온은 언뜻 보기에도 기운이 없어 보였다. 마치 죽을죄를 지은 죄인처럼 어두운 표정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의 죽을상도 알만했다. 대공이 자신의 가족을 지키려다가 다친 사실이 못 견디게 힘든 거겠지. 레이몬드의 설명에 따르면 온이 몇 번이나 암기를 막아 지켜주었음에도 말이다. 그는 그렇게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반가워요.”

“말씀 들었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저를 영입하시도록 추천하셨다고요. 은인을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는 처음처럼 다시 한번 허리를 깊이 숙였다.

비록 대공이 조금 다치고 저자에겐 마음의 부담감이 생겼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온의 실력을 생각해본다면 목숨을 하나 더 가지게 되었다고 여겨도 될 정도니까. 그가 곁에 있는 한 황제가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은 저명한 사실이었다.

“저희 대공님 잘 부탁드려요.”

“물론입니다. 제 목숨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양손을 맞잡으며 부탁하자, 온이 주먹으로 제 가슴께를 치며 대답했다.

그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멜라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꿈틀댔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

에일린이 공작 저로 돌아간 후, 한숨 푹 자고 일어난 대공은 멜라스를 불렀다.

그는 에일린이 주고 간 병을 손에 든 채로 흔들어보았다. 물처럼 보이는 투명한 액체는 신비롭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에일린이 포션을 주고 갔어. 상처 부위에 바르라는군.”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요. 정성이 대단하네요.”

“그러게.”

어디서 구했는지는 몰라도 그녀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대공은 멜라스의 도움을 받아 상처 부위에 포션을 다 바른 후에 도로 누웠다. 아플 때는 푹 쉬어서 빨리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으니. 어서 나아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리고 다음 날, 레이몬드는 몸에 상처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아주 멀쩡해진 상태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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