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어머. 어째. 가여워라.”
눈물을 방울방울 뚝뚝 떨어뜨리는 빛 여우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상처를 치료하려면 덫을 제거하는 게 우선된 과제였다. 덫의 이빨이 뒷다리의 살갗을 갈라 깊숙이 찌르고 있었으니까.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들었다.
저 덫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힘센 사람을 불러왔어야 하는 거 아닐까? 아니면 도구라도 가지고 왔어야 했는데.
별다른 수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뭐라도 해야 했다. 운이 나쁘면 덫을 놓은 사람들이 몰려올 수도 있을 테니.
나는 여우의 발 쪽으로 슬며시 다가갔다. 다행히 빛 여우는 해치지 않을 것을 알았는지 얌전히 나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철로 된 덫은 당연하게도 아주 튼튼해 보였다. 다가가 손을 대어보니 더욱 그랬다.
혹시 쉽게 풀리게 되어있는 장치 같은 게 있을까 하여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적당한 지점을 붙잡고 잡아당겨 보았다. 힘을 줘보면 달칵거리다가 툭 빠질 수도 있으니까. 정말 그런 생각으로 양손으로 당겨 본 거였는데.
두두두둑.
그 순간 덫은 완전히 조각조각으로 분해되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어라? 이거 왜 이렇게 쉽게 부서졌지? 알고 보면 내구성이 아주 약한 거였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동시에 엄습했다.
그러다 보니 불현듯 떠오르는 몇몇 경험담들이 있었다.
칼질을 하다가 그릇이 깨졌다던가, 발을 굴리니 땅이 패였다던가 한 일들이. 그것들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였다.
나, 힘이 엄청 센가 본대?
에일린은 능력이 많구나.
새로운 사실의 유입에 어안이 벙벙하여 있을 때, 덫에서 해방된 빛 여우는 눈물을 뚝 그쳤다. 그러고는 한쪽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기뻐하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그 모습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아차, 얼른 치료부터 해줘야지.
“빛 여우야. 내가 상처도 고쳐줄게.”
나는 그렇게 여우를 불러놓고서 몸서리를 쳤다. 빛 여우야 라니, 너무 정 없는 호칭 아닌가? 누군가가 나보고 사람아, 라고 부른다면 화가 날 테니까.
그래. 옥희처럼 얘한테도 이름을 지어주자.
그렇게 잠시 고민하다가 떠올린 이름은 광호였다. 빛 광자에 여우 호 자를 써서 광호!
“광호야. 이리 와서 앉아봐.”
광호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곧 가만히 땅에 앉아 다친 다리를 삐죽 내밀었다.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저 순순한 태도는 내가 자기를 구해줬다는 것까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얼른 침을 모아 광호의 상처 부위로 흘려 넣었다. 그러자 시간이 역행하는 것처럼 녀석의 다리가 말짱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광호는 벌떡 일어나 제자리에서 몇 바퀴 돌더니 돌연 깊은 숲속으로 사라졌다.
“광호야, 잘 가.”
그제야 나는 긴장이 풀려 땅바닥에 풀썩 쪼그려 앉았다. 조금 허탈한 마음마저 들었다. 만에 하나, 대공에 관한 일이었을까 싶어 마음을 잔뜩 졸인 탓이었다. 대공 일이 아니었기에 천만다행이지.
“옥, 옥.”
그때 옥희가 다가오더니 날개로 내 팔을 슥슥 쓸어내렸다. 고마움의 인사와 위로를 담아 건넨 듯했다.
“그래. 난 괜찮아. 친구가 나아서 다행이야.”
“옥, 옥오.”
“이만 가봐야겠다. 내 친구도 걱정하고 있을 거라서.”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옥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길을 잃지 않도록 왔던 길을 다시 안내해주었다. 숲의 초입에 다다랐을 때 즈음 옥희는 인사를 건네듯 두어 번 울고는 저쪽으로 날아갔다.
좋은 일을 했으니 뿌듯한걸?
혼날 일이 구만리로 남아있었지만 나는 성녀가 된 기분으로 숲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발을 내디딘 시내 길거리에는 한바탕 난리가 나 있었다. 경비대들이 누군가를 찾아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게 누구일지는 자명했다.
“에일린!”
옆에서 아드리엔의 외침이 귀 점막을 두드렸다.
고개를 돌려보자 씩씩대며 잔뜩 흥분한 얼굴이 보였다. 그의 표정에는 화와 염려 그리고 안심이 한데 섞여 어우러져 있었다.
“너 대체 어딜 갔다 온 거야?”
“미안해. 아드리엔.”
나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이 혼났다.
아드리엔은 대단히 화가 나 있었다. 그가 호위의 자격으로 나와 시내까지 동행한 셈이니 책임감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일 테지.
그걸 알기에 나는 찍소리도 하지 않고 바로 잘못을 인정했다.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를 걱정 끼친 건 진심으로 미안했으니까.
“금세 사라져버릴까 봐 마음이 급했어.”
“아무리 마음이 급했어도 나한테 말을 하고 갔어야지. 적어도 누군가에겐 알리고 갈 수도 있었잖아. 쪽지를 남겼어도 됐고 말이야.”
“미… 미안.”
듣고 보니 다 맞는 말이라 고개만 푹 숙였다.
내가 내세운 변명은 나무 아래 덤불 사이에서 신기한 동물이 튀어나왔다가 사라져서 쫓아가 봤다는 내용이었다. 가게의 종업원들이 내 행동을 보았을 가능성이 높으니 비슷한 맥락의 내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덕에 나는 천하의 팔푼이 취급을 받으며 잔소리 폭격을 맞아야 했지만.
아드리엔은 나랑 재회한 그 순간부터, 경비대에 나를 찾았다고 알리고, 말을 타고 공작 저로 돌아가는 내내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나도 사람인지라 계속 혼이 나다 보니 보람찬 마음도 점점 부서져 증발하고 있었다.
우씨. 옥희 미워.
이제 찾아와도 치료 안 해줄 테다!
나는 낮에는 성녀였다가 날이 저물면서 점차 말썽꾸러기로 변모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것은 아드리엔이 부모님께는 비밀에 부쳐주었다는 거였다.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앞으로 영원히 공작 저에서 나오지 못할 일이었다.
“두 번은 없어, 알지?”
“물론이지. 고마워 아드리엔.”
나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는 그런 나의 천연덕스러움이 얄미워 보였는지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려버렸다.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잔소리를 듣는다는 건 생각보다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하긴, 덕질에 한창 정신이 빠져있을 때도 엄마가 퍼붓는 잔소리가 힘들긴 했다. 그나마 최애 때문에 버텨냈지만.
야심한 밤.
이날도 근래와 마찬가지로 어김없이 옥희가 등장했다.
콕콕콕.
날카로운 부리가 창을 찍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늘 버선발로 뛰어가던 나는 평소답지 않게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흥. 어디 문 열어줄 것 같아?
내가 무슨 호구야? 늘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게?
콧방귀를 뿡뿡 뀌며 이불도 덮지 않은 채로 침대에 똑바로 누워있었다. 대충 자는 척을 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모르는 척하기는 양심에 찔리니까 말이다.
벌컥.
하지만 옥희는 포기를 모르는 새였다. 그리고 힘이 셌다. 늑대를 팼던 그 날을 생각해보면 창문 여는 것 정도야 아무것도 아닌 거지. 단지 예의상 노크를 한 것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푸드덕 소리와 함께 옥희가 침대로 내려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아주 어설프게 눈을 감고 있는 바람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침대 위에서 총총 뛰는 감각이 다가오더니 갑자기 묵직한 무게감이 가슴께를 짓눌렀다.
으으윽.
처음에야 견딜만했지만, 점점 가슴을 압박하는 힘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쯤 되면 아주 작정하고 잠을 깨울 심산인가보다. 참다못한 나는 눈을 번쩍 뜨며 소리를 꽥 질렀다.
“무… 무겁잖…!”
그런데 눈이 마주친 옥희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있는 게 아닌가. 다급히 상체를 일으켰더니 옥희가 쪽지가 묶인 다리를 내밀었다. 왠지 불안하고 불길한 마음이 손이 떨려왔다.
쪽지를 열어본 나는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적혀있는 내용은 이랬다.
[에일린. 나는 퍼먼트로 돌아왔어. 그런데 오는 과정에서 복면을 쓴 세력들과 싸움이 생겨서 조금 다쳐버렸군. 큰 부상은 아니니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몸이 낫는 대로 기별을 넣을 테니 며칠 후에 만나지.]
그 순간 핑 돌아버린 내 눈에는 ‘좀’이나 ‘큰 부상은 아니’라는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부분들만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레… 레이몬드가 다쳤다고?
오직 이 한 가지 사실만이 가슴에 압박감을 주었다. 아까 옥희가 짓눌렀을 때보다 훨씬 더 숨쉬기가 힘들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옥희야. 레이몬드가 다쳤어?”
끄덕끄덕.
그제야 옥희의 눈에 맺힌 눈물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쭙잖은 토라짐으로 그녀를 무시했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자책감이 휘몰아쳐 왔다.
차분히 앉아있을 수 없어진 나는 방안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쪽지에 의하면 며칠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건데 내가 그때까지 견딜 수 있을까?
심장은 지금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이 요동치는데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지.
며칠을 두고 볼 자신이 없는 난 혼자 가보기로 결정했다.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 잠옷에서 움직이기 편한 바지로 갈아입고 모자로 머리카락을 감추었다. 품에는 작은 병도 챙겨 넣었다. 그리고는 테라스로 나가 코아나 레이몬드가 타고 내려간 나무를 쳐다보았다. 늘 다른 사람이 몸을 붙잡고 내려다 준 나무는 위에서 내려다보니 천 리 길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한없이 가녀리게 보이는 이 팔이 사실은 천하장사처럼 힘이 아주 세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나무타기 정도는 문제없겠지.
나는 팔에 힘을 한 번씩 줘보고는 나무에 매달렸다. 과연 체중 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처음 해보는 거라 코알라처럼 나무기둥을 팔다리로 안고 슬금슬금 움직였다. 날렵하지가 못해서 속도는 느렸지만, 천천히 움직이는 편이 초보에게는 더 안전할 거 같기도 했다.
됐다!
나는 땅에 내려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경로는 코아가 이용하는 나무 그늘 길을 이용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몇 번 옮겨졌다고 제법 따라할 수 있었다.
후후. 나도 되는 거였어.
주먹을 움켜쥐고 흔들며 승리를 자축하는 그 순간이었다.
“누구냐?”
저쪽에서 사내의 외침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