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헤레나는 수많은 레이디를 제치며 백작 가의 2층으로 올랐다. 이윽고 어떤 방에 들어섰는데, 그 테라스에 몇 명의 레이디가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담소를 나누던 그들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 끝자락을 잡아 올렸다.
테라스는 정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장소였다. 그리고 여기 헤레나와 나를 포함한 레이디들의 숫자는 전부 다섯. 모두 고위급 귀족으로서 정원에 있는 레이디들과 격을 달리하는 느낌이었다. 일부러 그렇게 의도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공녀님. 소개할게요. 여기서부터 호힌 백작 가의 레이, 하트라 백작 가의 비비아나, 로크 백작 가의 엘리예요.”
꼭 정치계 모임 같은 경직된 분위기는 나를 더욱 긴장시켰다. 그 순간, 아래의 정원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담소를 나누는 레이디들이 부러워졌다. 이들은 구별된 자신들이 자랑스러울 테지만.
헤레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지난번 파티에서 보지 못한 얼굴들이었다.
“듣던 대로 정말 아름다우세요.”
“옷을 굉장히 세련되게 입으셨네요.”
“분홍색 머리칼이 신비로워요.”
나를 보면서 입에 비단을 문 듯한 칭찬이 한 바퀴 돌고 나자, 비로소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저희는 요즘 한창 논쟁인 국경 수비 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이 레이디들이 속해있는 가문은 정말이지 미래가 전도유망해 보였다. 이리도 총명하여 사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정치 사안에 대한 논의라니 그야말로 엘리트들이었다. 헤레나는 아무래도 자신과 비슷한 지성인들과 가깝게 어울리는 모양이다.
“국경수비대는 국경지를 소유한 귀족 가문에서 책임지고 훈련시켜야 하는 것 아닐까요? 사실상 거기서 나오는 이익도 가문의 소유잖아요.”
“저는 반대예요. 제국에서 관리를 해야 국방이 튼튼해진다고 생각해요.”
레이디들은 각자의 의견을 일목요연하게 피력했다.
이 복잡한 난제를 간단히 정리해보면 이렇다. 핵심은 수비하는데 누가 돈을 내야 하냐는 거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두 사람은 귀족이, 다른 두 사람은 제국에서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원작의 에일린이었다면 사교모임은 즐기지 않더라도 이런 대화에 자연스럽게 끼어들 수 있었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아니었다. 하품이 마구 밀려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만 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에일린의 과묵한 성정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되도록 도와준다는 사실이었다.
“코웻 공녀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지만 그것은 내 생각일 뿐이었다. 헤레나는 기어코 내게도 의견을 물어왔다.
동조하는 척하며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데 굳이 물어 봐주는 성의를 보이다니. 안 그래도 괜찮은데….
레이디들은 내 대답을 기다리며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나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는 듯 편들어주기를 기대하는 눈들이었다. 2대 2의 상황이라 더 그런 것 같은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뭐라도 대답을 내놓아야 할 것 같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모두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특별히 아는 바도 없고, 한쪽 편만 들기는 영 꺼림칙하여 선택한 대답의 반응은 썩 좋지 못했다. 대충 동의의 뜻을 내비쳤더니 의아한 표정들이 돌아온 것이다.
꼭 선택을 해야 하나?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가장 좋은 것은 조합. 무릇 한국인이라면 임금의 사랑을 받아 70세까지 일하셨다던 정승처럼 다 옳다고 여길 수 있어야 하는 법이지.
나는 황희정승에 빙의하여 인자한 눈빛을 빛냈다.
“국경수비대는 귀족 가문에서 책임져야 하는 것도 맞고, 제국에서 책임져야 하는 것도 맞지요.”
“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책임을 져야 하지요?”
레이디들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더욱 확실한 대답을 요구하며 나섰다.
나는 현안을 내놓듯이 여유 있는 태도로 다시 말했다.
“둘 다 일리가 있는 의견이죠.”
“하지만 결국 누군가는 떠안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둘 다 하면 되겠네요.”
“둘 다요?”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이 어느 쪽도 아니자, 레이디들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나는 마지막 결론을 내기 위해 입술을 떼었다.
“가문에서 국경수비대를 키우고, 제국에서는 경비를 지원하는 형식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아!”
절충안. 그것은 어떠한 사안이라도 정답이 될 수 있는 묘안이지. 둘 다 맞는 말이라면 장점을 섞는 게 최고니까.
사실 말만 쉽지, 실행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론상으로 만큼은 완벽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제야 내 말뜻을 이해한 레이디들은 일제히 탄성을 터트렸다.
“어쩜 그렇게 영리하세요.”
“정말 그러면 되겠다!”
“우리 각자의 아버님들께 이 의견을 내봐요.”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더 좋았다. 그들의 반응에 어리둥절해진 건 오히려 나였다. 정말로 그걸 몰라서 갑론을박하고 있었던 거야?
어쩌다 보니 분위기를 선도해버리고 만 모양새. 레이디들은 이제 나를 완전히 브레인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녀들은 정말로 감탄에 젖은 눈빛들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상급자인 내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면서 커진 리액션은 나를 더더욱 신나게 만들었다. 한마디만 해도 칭찬과 찬양으로 도배된 당근을 마구 던져대는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사람인지라 맞장구를 받으니 신이 나 버렸다.
그래선 안 되었는데. 적당히 참았어야 했는데….
흥분한 나머지 그간 걸어 잠가놓았던 입이 터지고야 말았다.
“후. 실은 저희 사촌오빠 가문이 변경백이라서 고민이 참 많았답니다. 이토록 지혜로운 공녀님의 의견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놓이네요.”
“앗, 사촌 오빠시라면 달라스 님 말씀이시죠?”
“맞아요.”
비비아나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자랑스러운 낯빛을 띠었다. 그 말에 일순 레이디들의 표정이 환해지면서 꺄르르 하였다.
나라의 정사를 의논하는 이런 고귀한 레이디들도 이성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한창 혼인에 대한 이야기가 오갈 나이대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마치 내가 대공을 떠올리며 짓는 표정과 유사했기에 그것이 익숙하면서도 소외감이 들었다. 뭐야 뭐야, 달라스가 누군데? 나도 보고 싶다고.
하지만 이곳에는 사진이 없으므로 보는 대신 간략한 설명만을 들어야 했다. 끼어들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있는 내게 헤레나가 대신 친절히 알려주었다.
“달라스 님은 프라레스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미남이에요.”
“아주 아주 잘 생기셨어요.”
“인기도 무척 많으시답니다.”
“그래요?”
그래 봤자 대공보다 잘 생기지도 않았을 텐데 뭐.
대충 맞장구를 치고 관두려는데, 내 귀를 번뜩 뜨이게 하는 정보가 하나 날아와 박혔다.
“달라스 님도 벽안이세요.”
“오홋. 벽안이요?”
그 한마디에 바로 나의 관심이 짙어져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우리 레이몬드와 같은 벽안이 또 있다는 말이야?
자고로 덕후란, 최애와 닮은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을 호감으로 여기는 법이니까!
“어머. 공녀님께서도 관심이 가시나 봐요.”
한층 환해진 내 낯빛에 레이디들이 즐거워했다. 이에 나는 턱에 손등을 갖다 대면서 아주 단호한 어조로 선언했다.
“자고로 남자는 벽안이죠.”
“꺄아!!”
“혜안이 깊으세요.”
“공녀님 말씀이 맞나 봐요. 제국 5대 미남에 벽안이 세 명이나 있네요!”
레이디들은 신이 나서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나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여주고는 그 근거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푸른 바다의 물결처럼 짙푸른 빛깔이 아주 신비롭고 오묘한 맛이 있죠.”
“어머 어머!”
“정말이다 진짜!”
이제 소외감은 잊은 지 오래. 우리는 이성 이야기로 진정한 하나가 되었다. 오늘 이렇게 참석해보니 사교모임도 제법 재미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어진 헤레나의 말은 좋아서 헤헤거리고 있는 나를 정신이 퍼뜩 들게 했다.
“공녀님도 참. 폐하가 그리도 좋으실까. 폐하랑 같은 벽안이라니까 칭찬을 아끼지 않으셔.”
“….”
저기요? 그쪽이 아닌데요?
하마터면 정색할 뻔했으나, 그것이 표출되지 않도록 지그시 꾹 눌렀다.
아니야. 황제가 아니라고!!
발광해야 하는 덕후로서 반박하지 못하는 현실이 가슴 아팠지만, 얌전히 그녀들이 황제라고 착각하도록 내버려 두어야만 했다. 내 입장을 생각건대 그리 믿도록 하는 편이 안전하니까.
그리고 새삼스레 떠오른 사실에 잠깐 딴생각에 몰두했다.
그러고 보니 황제도 벽안이었지.
그의 눈동자 색깔이 파란색이든 똥색이든 내 관심 밖이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황제와 대공의 이미지가 달라서 그런지 썩 와닿지가 않았다.
어째 같은 벽안인데도 대공의 눈동자는 바다처럼 깊은데 황제의 것은 한없이 가벼워 보일까?
나는 두 사람의 눈동자가 결코 같은 색깔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였다. 테라스로 통하는 유리문이 열리더니 웬 레이디가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제가 좀 늦었죠?”
청록이 떠오르는 머리칼을 곱게 늘어뜨린 그녀는 붉은 눈동자를 반으로 접으며 해맑게 웃었다. 서둘러 오느라 두 볼은 복숭앗빛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어딘가 굉장히 익숙한 얼굴인데…?
나는 기시감이 드는 레이디를 마주하고는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헤레나는 그런 그녀를 내게 소개해주었다.
“어서 와요. 이쪽은 런 후작 가의 나비엔 님이랍니다, 공녀님.”
가만있어봐. 런 후작 가라고?
그 순간 나비엔과 눈을 마주친 나는 깜짝 놀란 마음을 다급히 숨겨야 했다.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그녀는 아드리엔의 여동생인 모양이었다. 생김새도 제 오빠랑 똑 닮아있었다. 그러고 보니 집에 놀러 오라며 언급했던 이름 중에 나비엔이 있었던 기억이 있다.
나를 보고 싶어 한다고 했지.
그렇다면 아는 사이라는 뜻. 얼마나 친한지는 모르겠으나, 일면식이 없는 레이디들 보다는 반가움을 표출할 필요가 있었다. 에일린의 성정 상 과한 반응은 보이지 않을 테니 아주 약간만 더 드러내기로 했다.
“반가워요.”
나는 입꼬리를 새침하게 올리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좋았어! 감정을 절제하여 기품있고 우아하게 표현하는 데 성공이로군.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