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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27화 (27/125)

27화

그 길로 공작 저로 돌아온 나는 방에 들어와 즉시 확인작업에 들어갔다.

아드리엔은 분명 그리 말했다. 내가 재채기를 했더니 삐었던 팔이 멀쩡해졌다고.

조금 무섭지만 달리 대상이 없으니 내 몸을 가지고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나는 읽고 있던 새 책의 종이 모서리로 왼쪽 두 번째 손가락 끝을 살짝 베었다.

“으윽.”

소름 돋는 감각과 함께 하얀 피부에 붉은 피가 옅게 맺혔다.

“후. 됐다.”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건 그게 아주 미미한 것일지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재채기를 억지로 일으키기 위해 정원에서 강아지풀을 꺾어와 코를 간질어 보았다. 그러나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이번엔 부엌에서 후추를 몰래 가져와 얼굴 근처에다가 뿌렸다. 그러자 코가 간질간질하더니 재채기가 뿜어져 나왔다.

“엣취!”

일단 재채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손가락 끝은 여전히 따끔거렸다.

이게 아닌가? 그렇다면 혹시?

나는 검지 끝을 그대로 입안으로 가져가 넣었다가 몇 초가 흐르도록 두었다. 처음엔 침이 닿아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웬일인지 그 감각은 곧 사그라들었다.

그러고 나서 손가락을 빼내어 보았다. 그랬더니 가로로 얇게 그어져 있었던 상처가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헐. 헐. 헐. 설마 침에 치유력이 있다고? 이거 진짜 실화야??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리다 정신을 차렸다. 믿기 힘들다면 여러 번 해보면 확실해지겠지!

나는 당장에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았다.

상처에다가 침을 묻혀도 보고, 혀로 빨아도 보고, 침을 뱉어보기도 했다. 그 결과 모든 실험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바로 에일린의 침에 치유능력이 있다는 것.

모기 물렸을 때 침 바르면 낫는다는 헛소리가 내게 있어서만큼은 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와아, 심 봤다!!

오직 원작소설 속 정보만으로 대공을 돕기에는 한참 모자라다고 느꼈기에, 내게 이런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정체가 들통날까 봐 부담스러웠던 아드리엔은 알고 보니 복덩이였다.

그나저나 그는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아까 얘기하는 걸 보니까 별로 깊이 생각하진 않는 것 같던데. 단지 재미있고 신기한 에피소드를 하나 가졌다고 여기고 있겠지?

원작의 에일린이 자신의 치유력을 알면서도 감추려고 잡아뗀 건지, 정말로 본인도 몰랐던 건지 모를 일이었지만 잘 되었지 싶었다. 어느 쪽이든 비밀로 하는 편이 나을 테니까.

그나저나 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지?

아직은 이 힘이 얼마나 강력하고 어디에 효과적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표본이 너무 적었으니까.

여러 가지 의문들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떠다녔지만 이제부터 차분히 알아보기로 했다. 막 하나의 실마리를 얻었을 뿐이니까.

치유력에 관한 책도 독서 목록에 추가해야 할 것 같았다.

***

옥 옥 오 옥 옥.

번쩍.

야밤에 들린 산짐승의 소리가 반쯤 잠든 내 의식을 흔들어 깨웠다. 나는 눈을 뜨며 부리나케 몸을 일으켰다.

이 소리는, 옥희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레이몬드의 소식이었다. 나는 1초도 지체할 수 없어 창으로 잽싸게 달려나갔다. 얼마나 허겁지겁 서둘렀는지 내 꼴이 어떤 꼴인지도 몰랐다.

옥희는 나를 보자 흠칫 놀라는 듯했다.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래져 있었다. 그 모습이 내 눈에는 그저 깜찍해 보였다.

귀여워, 흐흐흐.

내가 창문을 열고 손을 뻗자, 옥희가 손길을 피하려는 듯 푸드득 날아올랐다.

“응? 옥희야?”

내 시선은 옥희를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옥희는 내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나인 줄로 알았는지 다시 내려와서 창틀에 앉았다.

내 웃음소리가 너무 음흉했던 탓일까?

“옥옥 옥!”

그러나 옥희는 날개로 내 머리 쪽을 가리키면서 울었다. 날개를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거로 보아 꼭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여겨져 손으로 얼굴과 머리를 더듬어보니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있는 게 느껴졌다.

앗. 뭐야. 이 포터 삼촌 달그리드 같은 머리카락은. 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손으로 빗어 정리했다. 옥희는 커진 내 머리가 동물적인 감각에 위협적으로 느껴졌나 보다.

“미안해. 옥희야. 어서 들어와.”

옥희는 내가 사과를 하자 그제야 마음이 풀렸는지 총총 뛰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였다. 비명과도 같은 울음이 들린 것은.

“오오오옥!”

짧은 순간 옥희는 몸이 기우뚱하더니 창문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팔을 뻗어 녀석을 안아 들었다.

“헉. 옥희야! 괜찮아?”

“옥 옥.”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옥희는 다행히도 단순히 발이 미끄러진 듯했다. 크게 한숨을 돌리고 나서 혹시나 몰라 여기저기를 살펴보니 옥희의 한쪽 발에 상처가 나 있었다. 면적은 작지만 제법 깊은 상처였다.

상흔으로 보아 뾰족한 나뭇가지 같은데 걸린 게 아닐까 싶었다. 이 통증 때문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건가.

“옥희야. 아파?”

나는 확인을 해보기 위해 상처 부위를 손으로 살짝 건드려보았다. 그러자 “옥.”하고 우는 옥희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 흘러나오는 듯했다.

“여기가 아픈 게 맞구나. 언니가 침 발라줄게.”

가여운 마음에 그리 말하고는 내 손가락 끝에다가 혀를 갖다 대었다. 그리고 얼마나 묻혀야 할지 정확히 감이 오질 않아 아주 듬뿍 묻혀버렸다.

옥희가 무슨 짓이냐며 경악하는 표정을 짓는 듯했지만, 나의 상상력이 불러온 착각이라고 믿으며 손가락을 가까이 가져갔다.

내 치유력을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나는 옥희가 수긍하든지 말든지 얼른 찍은 침을 상처에다 묻혀보았다. 그리고 4, 5초쯤 흐르자 상처가 아물어가는 게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옥희는 따갑던 발이 갑자기 멀쩡해지자 이상했는지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다리를 총총거리며 신나게 뛰어다녔다. 가벼워진 몸 때문에 한결 기분이 좋아 보였다.

와! 옥희한테도 효과가 있구나.

“나아서 다행이야!”

짝짝짝짝짝.

나는 기뻐서 손뼉을 쳤다.

내게 신비한 능력이 있음을 알고 난 후부터, 그에 관한 내용이 기록된 책을 찾아 여러 권 살펴보았다. 마법이 있는 이곳 세계에는 현재 신전의 사제들을 중심으로 치유력이 존재했다. 우아하게 손에서 신성한 힘을 내어 치료하는 것이 보통의 모양새. ‘침’으로 치유한다는 얘기는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대신 고서에는 그런 기록이 몇 줄 있긴 했지만, 엄마 손은 약손같이 미신적인 부분인지라 정보로 건질만 한 것은 없었다.

그랬는데 이렇게 확실한 효과가 있다니.

나는 멋진 능력을 가진 에일린의 몸에 감탄하며, 레이몬드가 보낸 쪽지를 읽으려 했다.

“옥희야. 쪽지 좀 볼까?”

“옥 옥.”

옥희는 가뿐해진 몸으로 한쪽 다리를 삐죽 내밀었다.

종이를 슬며시 풀어낸 나는 그것을 곧장 펼쳐서 내용을 확인했다. 그러자 사무치도록 그리운 님이 써 내려간 글씨가 보였다.

[에일린. 잘 지내나? 궁금할까 봐 연락했어.

나는 아직 셰일에 있어. 네버레스트의 가족들은 거의 다 루슬로 가 영지로 이주시켰고, 마지막으로 단장인 온의 가족들만이 남았어. 남은 일을 다 처리한 후에 곧 넘어갈 생각이야.

온은 정말로 바람 같은 사내야. 기척을 완벽에 가깝게 숨기더군. 그대의 말대로 늘 곁에 두기로 했어. 돌아가는 대로 연락을 취하지.]

휴우. 일이 차곡차곡 잘 진행되고 있구나.

나는 이제야 한시름 크게 놓을 수 있었다. 앞으로는 대공이 위험에 빠지는 일이 있다 해도 목숨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원작소설에서 본 온의 활약은 실로 대단했다.

황제는 그를 항상 자신과 함께 동행하도록 했는데, 온은 암기란 암기는 모조리 다 막아내었다. 암기술에 통달한 마스터 급이었으니 쓰는 것뿐만 아니라 방어까지 해낸 것이다.

레이몬드 측에서 실패한 여러 번의 암살은 그가 지킨 결과였다. 온은 볼모로 붙잡힌 가족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랬는데도 황제에게 버림받았으니 그의 입장에서도 대공 쪽에 붙는 편이 훨씬 좋은 안일 것이다.

“옥희야. 고마워.”

“옥.”

나는 간단한 답장이라도 쓸까, 고민했지만 그냥 관두었다. 또다시 먼 타국까지 날아갈 옥희가 가여웠기 때문이다.

레이몬드가 돌아오면 근처에만 왔다 갔다 하면 되니까. 그때까지 꾹 참고 기다리기로 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 사이에 선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그리운 마음을 달래었다.

***

하지만 다음 날부터 답장을 보내지 않은 것을 조금은 후회했다. 아니 많이 후회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왜 옥희를 멀리 보내버리지 않았던가.

옥희를 침 발라서 치료해준 날. 나는 에일린의 치유력에 감동하여 눈물까지 흐를 지경이었는데, 이 기쁨의 눈물은 머지않아 괴로움의 눈물로 바뀌었다.

짹짹 짹짹. 구구구구. 까악까악. 비배쫑비배쫑.

새들이 울어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주위를 울려댔다. 각종 새들이 내 방 테라스 맞은편에 있는 나무 위에 모여앉아 가지각색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여기가 버드 카페인가.

왕창 몰려온 저 새떼들의 중심에는 옥희가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맹금류가 어째서 저런 초식성 조류들이랑 친한지는 모르겠지만, 옥희를 따르는 무리인 건 확실해 보였다.

“왜 오밤중에 이 많은 새가 몰려온 거니?”

새들이 온 것에는 따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커다란 천의 가장자리를 물고 그 위에 무언가를 얹은 채로 날아와 천을 테라스로 내려놓았다. 새들이 다 함께 힘을 합친 것이다.

옥희가 불러서 창을 열고 나가보니 천 위에는 늑대 한 마리가 누워있었다. 앞 다리에 피가 나는 것으로 보아 크게 다친 듯했다.

“헉. 어머, 어째.”

마음이 아팠지만 사람인지라 육식의 야생동물을 보자 두려움이 앞섰다. 선뜻 다가가기가 무서워 주춤거리고 있으려니 옥희가 큰 날개를 활짝 펴고서 파닥거렸다. 굉장히 엄중하면서도 간절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옥 오옥!”

“그래. 아… 알았어. 치료해주라 이거지?”

“옥.”

녀석의 뜻을 안 나는 어쩔 수 없이 용기를 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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