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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26화 (26/125)

26화

나갈 채비를 마친 나는 아드리엔과 함께 공작저의 대문을 통과했다. 시내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마차 없이도 걸어가기가 괜찮았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음….”

딱히 아는 곳이 없었기에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턱을 톡톡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데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소가 하나 있었다.

“우리 하리네 디저트 갈까?”

“하리네? 아하. 유명한 디저트 맛집 말이구나? 그래 가보자.”

아드리엔도 아는 걸 보니 정말로 유명한가 보다. 목표지를 정한 우리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귀족 영애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며? 하녀들이 줄을 서서 포장을 해간대.”

“그래? 많이 기다려야 하려나.”

“그건 포장이고. 가서 먹는 건 괜찮을 거야.”

“오. 그래?”

가게 앞에 다다르자 사람들이 북적이는 풍경이 보였다. 과연 아드리엔 말대로 테이블은 한산하고 포장해가려는 줄만 엄청나게 길었다.

하지만 어차피 주문하려면 줄을 서야 하지 않나?

의아해하고 있을 무렵,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은 나를 두고 아드리엔이 카운터로 걸어갔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줄의 끝이 아닌 가장 앞쪽을 향했다.

그러자 그를 발견한 종업원이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누군가가 허겁지겁 뛰어나왔다. 차림새나 분위기로 보아 이 가게의 매니저인 듯했다.

“어서 오세요. 런 공자님!”

“안녕? 메이.”

매니저 및 종업원들의 우렁찬 인사가 쏟아지자, 아드리엔이 손을 살짝 들어 화답했다.

그렇게 그는 매니저를 단독으로 대면하여 주문을 넣었다. 나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지켜보다가 돌아와 자리에 앉는 아드리엔에게 물었다.

“어째서 너를 따로 부른 거야?”

“아. 실은 여기 우리 가문에서 운영하는 곳이야.”

“정말이야? 난 몰랐….”

여기까지 말하고 나자 아차 싶었다. 나도 모르게 여과 없이 술술 말해버렸는데, 혹시나 원래의 에일린이 알고 있었던 사실이면 어쩌지?

“너한텐 말한 적이 없으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지. 이쪽으로 올 일도 잘 없잖아?”

“그건 그렇네.”

아드리엔은 턱을 괴고 웃었다. 나는 그 얘기에 몰래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다행이다.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호기심이 탈이었지만, 어쨌든 아드리엔 덕분에 기다리지 않는 호사를 누릴 수 있어 행운이었다.

나는 진열장 안에 있는 디저트들을 둘러봤다. 알록달록한 색상만으로도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리고 저 예쁘장하고 귀여운 모양들을 보자, 마치 버튼을 누른 것처럼 어두운 밤 간이 테이블 위에 차려진 형형색색의 디저트가 생각이 났다. 맞은편에는 푸른 빛을 띤 대공이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

문득 떠오른 그와의 추억은 한쪽 가슴을 시큰하게 만들었다. 너무 보고 싶다, 내 최애.

“디저트 나왔습니다.”

막 그를 향한 그리움에 눈시울이 붉어지려는데 때마침 종업원이 다가왔다. 눈앞에 화려한 먹거리가 하나씩 올려지자, 언제 슬펐냐는 듯 눈물은 쏙 들어가 버렸다.

나란 인간, 구제 불능 먹보 인간 같으니.

“와. 잘 먹겠습니다!”

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인 법.

포크가 쥐어진 내 손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조각 케이크 끝을 살살 긁어내어 한 조각 떼어내고는 쿡 찍어서 혀 위에다가 올렸다. 그러자 크림이 솜사탕처럼 스르르 녹으며 자취를 감추었다. 혀 위에 부드럽고 달콤한 감촉과 향기만을 남기고서 말이다.

“으흠. 맛있어.”

나는 디저트에 심취해 미처 아드리엔의 시선을 신경 쓰지 못했다. 한참을 열심히 먹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아주 신기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응? 왜 그래?”

“너 원래 단 거 별로 안 좋아했잖아. 잘 먹는 걸 보니 신기해서.”

“아….”

이런. 디저트에 빠져서 에일린의 식성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이럴 땐 어떻게 얼버무려야 하지?

나는 아무 말이나 막 내뱉기로 했다.

“사… 사람이 나이가 들면 입맛이 변하기도 하잖아? 요즘은 달달한 게 손이 가더라고.”

“흐음. 그렇긴 하지.”

보통은 나이가 들수록 단 걸 더 피하는 경향이 있지만, 반대의 경우도 없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역시 단순한 아드리엔은 급히 지어낸 변명일지라도 그럭저럭 납득하는 듯했다.

아무렴 갑자기 단 걸 잘 먹는다는 이유로 몸속에 다른 영혼이 들어왔다고 생각하겠어?

나는 안심하며 나머지 디저트들을 끝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너랑 나랑 정원을 마구 망가뜨리고 나서 식량창고에 숨었잖아. 그때 우리가 사라져서 집안이 발칵 뒤집혔지. 나중에 밤이 다 되고 나서야 집사님이 발견했는데, 둘 다 입 주위에 쿠키 가루를 잔뜩 묻힌 채 자루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고 했지. 크크큭. 깨어나서 얼마나 호되게 혼났는지 기억나지?”

“하하. 그랬지.”

“집사님은 나만 보면 늘 그 얘기야. 엊그제 또 이 이야기를 하시더라니까.”

입안에서는 맛의 향연과 축제가 펼치지는 동안, 아드리엔은 회포를 풀며 신나게 떠들었다. 특히 어릴 때 에일린과의 추억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먹으면서도 놓치지 않게 귀담아들어야 했다. “응, 응.” 건성으로 대답하면서도 말이다.

입을 다물면 중간은 가는 법이지.

적당히 맞장구만 치면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으니까.

“한번 놀러 와. 부모님도 너 많이 그리워하셔. 나비엔이랑 그리고 찰스도.”

나비엔? 찰스? 그건 또 누구지.

이야기 속에 새로운 인물이 추가될 때마다 나는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의 필사적인 연기에도 불구하고 아드리엔은 짧은 찰나 멈칫한 내 표정을 알아챘나 보다. 순간 그의 웃는 낯이 거두어졌다.

“하긴. 이제 신분 때문에 함부로 다니지도 못하겠구나.”

그렇게 말하는 그는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앗. 그렇게 비에 쫄딱 젖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으면 어떡해?

마음이 불편해진 나는 안절부절못하다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스레 한마디를 얹었다.

“한 번쯤은 가도 괜찮지 않을까?”

“엇, 정말? 그렇겠지? 와싸, 신난다!”

아드리엔은 정말이지 감정표현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내 허락을 담은 말에 여과 없이 기쁨을 드러냈다.

그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허물없이 지낸 소꿉친구가 느닷없이 황제의 약혼녀라는 손닿지 못할 신분이 되어버렸으니 얼마나 슬플까?

그리고 방문에 대한 내 허락에는 황제가 조만간 파혼을 선언할 것이라는 계산이 들어있었다. 그러니 아마도 괜찮겠지?

우리는 디저트 가게를 나서며 길거리를 잠시 걸었다. 평민들이 분주히 오가는 시장은 평일 오후에도 왁자지껄했다.

날이 저물어갈수록 골목골목에 그늘이 지면서 공기가 서늘해졌다. 차가운 기운을 실은 바람이 몸 구석구석을 휘감고 지나갔다.

지금 내 옷차림은 심플한 드레스 차림. 제대로 된 보온 역할은 그다지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에취.”

순간 몸이 으슬으슬해지더니 재채기가 튀어나왔다. 재빨리 팔로 막아 매너를 지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콧물이 삐죽 튀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코를 킁킁대고 있으려니까 아드리엔의 걱정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추워지려나 본데?”

“그러게.”

그러자 아드리엔은 대뜸 제 겉옷을 벗더니 내 어깨에다가 걸쳐주었다. 그를 두르고 있던 온기가 그대로 전해져왔다.

“앗. 괜찮은데.”

“레이디는 감기 걸리면 안 돼. 난 튼튼해서 괜찮으니까. 어서 가자.”

“응.”

그는 하얀 셔츠만 입은 채로 하얗게 웃었다.

배려에 고마워진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걸음을 재촉하려는데, 또 뭔가 생각이 났는지 아드리엔이 난데없이 추억을 꺼내 들었다.

“그나저나 네가 재채기하니까 떠오른다. 너 그거 기억나?”

“무슨 얘기?”

응. 기억 안 나. 그러니까 그만 말해줄래? 말해도 모르니까.

두 사람이 가진 옛 추억 이야기는 가장 피하고 싶은 주제. 아까부터 아는 척하느라 노곤해질 지경이었으나, 그렇다고 이렇게 솔직하게 대꾸할 수는 없으니 나는 빙그레 웃고 있기만 했다.

“예전에 내가 검술연습 하느라 팔이 삔 채로 공작 저에 갔었잖아.”

“어, 어.”

“미리 약속을 해둔 거라서 간 거였는데, 네가 아픈데 왜 왔냐면서 날 야단쳤었지.”

“그랬지.”

나는 애써 아는 척을 하며 볼을 긁적였다. 아드리엔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흐뭇했는지 짧게 큭큭 대며 웃었다.

“그때도 날씨가 이렇게 급격하게 싸늘해졌었고 말이야. 그 때문에 네가 내 팔에다가 재채기를 해버렸으니.”

“으앗.”

에일린이 그런 비매너 실수를 저질렀다니. 그녀가 많이 당황했겠구나 싶은 순간, 아드리엔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삐었던 내 팔이 다 나았었지.”

“뭐?”

“그때 네게 치유능력이 있다고 믿었는데.”

“에이. 말도 안 돼.”

그러나 이번에도 단순히 추억 소환인 줄 알았던 이야기는 엄청난 비밀을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그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해버렸다. 하지만 내 영혼은 180도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에일린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나는 아주 우연히 알게 된 그녀의 능력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이지 엄청난 일일 테니까.

“까마귀가 날아서 배가 떨어졌다고 하겠네.”

“응? 그게 뭔데?”

“둘이 아무 상관도 없다는 얘기지.”

대수롭지 않은 내 반응에 아드리엔은 자기 뒤통수를 문지르며 멋쩍어했다.

“뭐, 그때도 넌 그렇게 말하긴 했어. 단지 삐끗했던 것뿐이니까 금세 나은 거겠지?”

“그래. 당연하지. 그게 말이 되니?”

나는 서둘러 얼버무리며 넘겨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심장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묘한 흥분감으로 인해 거세게 벌렁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정보에 정신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가슴은 어떤 기대감으로 차올랐다.

이거 진짜인 거 아니야?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나는 빙의했고,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걸 안다. 마법이 존재하는 이곳 세계에서 어쩌면 에일린에게도 특별한 능력이 있을 수 있었다.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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