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반짝.
아침에 눈을 뜬 나는 영롱하고 아름다운 새날을 맞이했다.
마치 어제 죽은 이의 하루같이 귀하고 소중한 날을!
일단 그토록 원하는 시간은 하루의 후반부니까 좀 더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나는 종일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굴다가 해질 즈음이 되자 오히려 차분해졌다. 레이몬드와의 만남은 설레면서도 그만큼 편안한 무언가가 있었다.
오늘은 이른 야반도주를 위해 가족들과 일찍 헤어졌다. 원래는 9시에 자러 들어오면 10시 가까이가 돼야 코아가 데리러 오는데, 오늘은 저녁을 먹고 바로 방으로 들어와 있었다.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똑똑, 하고 창을 두드리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어. 코아가 왔나보다.
소파에 앉아 진정용 독서를 하고 있던 나는 빛의 속도로 창가로 다가갔다. 그런데 평소보다 달빛에 비친 그림자의 크기가 유난히 커 보였다.
응?
커튼을 걷은 나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창밖에 서 있는 존재를 발끝에서부터 올려다보았다. 큰 발, 탄탄한 다리, 골반을 지나 떡 벌어진 어깨 위로는 이 세상 외모가 아닌 조각상이 걸려있었다.
레… 레이몬드!!
자주는 아니지만 꽤 얼굴을 보았던 터라 익숙하기도 하건만, 내리는 달빛에 비친 대공의 모습은 찬란함 그 자체였다.
밤에 이렇게 아름다워서 될 일이야? 별들 다 기죽게 말이야.
그렇게 외모에 감탄을 하고 있는데 레이몬드가 다시 한번 창문을 톡톡 두들겼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걸어 잠긴 빗장을 풀어 창문을 열었다.
“에일린. 나 왔어.”
“어서 오세요. 레이몬드.”
나는 애써 떨림을 감추고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제 발로 나의 영역으로 찾아들어 오다니 흐흐흐. 가둬두고 예뻐해 주고 싶지만 그런 음흉한 마음은 전체 연령가에서는 허용이 안 되니 접어두기로 했다.
“그대의 방이로군.”
“제 방엔 처음이시죠?”
레이몬드는 숙녀의 방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조금 쑥스러운지 방을 둘러보면서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오늘은 직접 오셨네요?”
“말을 타고 왔어. 아무래도 그대를 태우고 바로 가는 게 빠를 것 같아서.”
말을 탄다고?
앗. 그렇다면 설마 내가 대공의 허리를 휘감아 안을 수 있는 건가.
이거 오늘 팬 미팅이 아주 후끈후끈하겠는데? 준비된 프로그램이 아주 훌륭해.
나는 흡족한 팬처럼 속으로 박수를 잔뜩 쳐주고는 대공과 함께 테라스로 나갔다.
“내 손을 잡아.”
대공은 한 손으로는 나무를 붙잡으면서 나머지 한 손을 내게로 내밀었다.
그 모습이 마치 나와 함께 가겠소? 라는 프러포즈처럼 보여 괜히 가슴이 팔딱팔딱 뛰었다.
나는 망상을 떨쳐내며 침을 꿀꺽 삼키고는 손을 그 위에 포개었다. 그러자 레이몬드는 잡힌 손을 살짝 잡아당기더니 팔을 내 허리에 둘러 감았다. 나무를 타고 내려가기 위한 자세였다.
!!!! 어… 어맛!!
순간 양 볼이 동백꽃처럼 붉어졌다.
상체가 레이몬드의 가슴에 밀착되자 단단한 근육의 질감이 느껴졌다.
평소 코아가 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대공이 하니까 숨을 쉬는 것조차 의식되었다. 살아있는 물고기처럼 미친 듯이 팔딱거리는 심장은 곧 튀어나와 밑바닥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심장 대신에 레이몬드와 내 몸이 바닥으로 안착했다.
그는 여전히 나를 안은 채로 그림자 속에 숨어들어 공작 저를 빠져나갔다.
나를 드는 코아를 볼 때마다 무거운 내 육체가 죄스러웠는데, 대공은 깃털을 든 듯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그 점이 안심되었다.
이내 숲이 가까워지자 대기하고 있는 말 한 마리가 보였다.
“래쉬. 오 그래. 착하지.”
레이몬드는 말의 얼굴을 한쪽 팔로 쓰다듬더니, 들고 있던 나를 그대로 래쉬의 안장 위로 올렸다.
어찌나 팔 힘이 좋은지 중력을 거스르지 않는 느낌이었다.
레이몬드는 곧이어 자신도 내 뒤에 올라탔다. 내가 그의 허리를 안을 줄 알았더니 도리어 안기는 자세가 되자 얼굴에 터질 듯이 열이 차올랐다.
아. 대체 이건 꿈인가 현실인가.
이런 팬 미팅이 실재하지는 않을 테니 아마 꿈인가 보다.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소망을 되뇌며 레이몬드와 나는 말을 타고 로기로 달려갔다.
그리 먼 길은 아니었다. 말을 타고 15~20분쯤 가자 축제의 현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벚나무가 하나둘씩 보이더니, 밤에도 축제를 이어나갈 수 있게 주위에는 조명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마을 인근 숲속에 래쉬를 둔 채로 걸어 나왔다. 똑똑한 녀석이라 일부러 묶어두지는 않았다.
이윽고 번화한 거리로 나오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축제라 그런지 밤이지만 보통 때보다도 북적였다. 그래도 낮의 열기가 한층 꺾여 다소 한산한 느낌이 여유롭고 좋았다. 좀 더 걸어가자 공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왔다.
“와.”
나는 그 입구에 서서 감탄을 터트렸다. 분홍빛 벚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풍경은 내 눈동자를 분홍색으로 꽉 채웠다. 마치 분홍빛으로 된 눈의 세상에 온 듯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내 입이 다물어지지 못하자, 옆에 나란히 선 레이몬드가 감탄에 젖은 내 표정을 보았다.
“에일린. 마음에 들어?”
“네. 정말 아름다워요.”
“다행이로군. 백성들과 같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어서 말이야.”
“앗.”
그는 농담 섞인 말을 던지며 씨익 웃었다. 내가 애써 만든 핑계가 도루묵이 되는 순간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더 기쁘게 느껴졌다.
레이몬드는 알면서도 내 요청에 응했단 말이야?
볼이 붉어지면서 입술이 웃음기를 머금었다. 대공의 상냥함이 정말 고마웠다.
대공도 내 의도를 다 알았겠다, 그렇다면 얌전을 떨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 팬 미팅 시간을 아주 알차게 보내고야 말리라.
“레이몬드. 우리 어서 가요.”
그의 팔을 잡아끌며 공원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나는 스스로가 선정한 포토존에 대공을 세워놓고 카메라를 찍듯이 그의 모습을 끝없이 눈에 담았다. 사실 그는 어디에 서 있어도 한 폭의 그림이고 걸작이었다.
천국에 사는 천사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넋이 나갈 만큼 신비로운 정경이 오직 눈동자에만 잔상을 남긴 채 사라진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카메라. 이곳에 없는 게 진짜 천추의 한이다.
그렇게 내적으로 요동치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을 그때, 내 눈에 무언가 위대한 것이 포착되었다.
아닛. 바로 저거야!
내가 발견한 것은 길거리 화가였다. 그는 돈을 받고 미리 그려놓은 벚나무 풍경에 사람을 그려 넣어주고 있었다.
좋았어. 너로 정했다!!!
“레이몬드. 우리 저거 하죠.”
나는 손가락으로 그쪽을 가리켰다.
레이몬드의 시선이 길거리 화가에게로 옮겨졌다. 나는 그를 다짜고짜 화가 쪽으로 데리고 갔다.
“응? 에일린?”
그는 별 힘도 못 쓰고 내가 이끄는 대로 끌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화가 아저씨는 우리를 보자 넉살 좋게 인사했다. 그의 손과 옷에 얼룩덜룩 묻어있는 물감 자국은 그의 실력과 연륜을 가늠케 해주었다.
“이 남자분을 그려주세요.”
“예. 원하는 곳에 가서 포즈를 취해주시죠.”
레이몬드는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내가 밀어붙이자 대꾸 없이 순순히 따라주었다.
나는 그를 적당해 보이는 한 장소에 세워두었다. 레이몬드가 부끄럽고 어색해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는 어떤 포즈를 취할지 몰라 어쩔 줄 몰라 했다.
“흐음.”
나는 화가 아저씨 옆에 서서 양쪽 엄지 검지로 구도를 잡아보고는 다시 그에게로 갔다.
“레이몬드. 한쪽 손은 허리를 짚고 다른 쪽은 자연스럽게 내리고요. 네네. 그렇게요. 그다음 시선은 저쪽으로 봐주세요. 맞아요. 아주 좋아요.”
나는 전문 사진기사처럼 그에게 이것저것 주문을 넣었다. 그러자 곧 내가 원하는 포즈가 완성되었다.
“이렇게 그려주시면 돼요.”
“예.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레이몬드에게 주문한 자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공의 모습이었다.
그윽한 눈빛으로 전장을 훑는 대공의 모습은 일에 몰두하는 섹시한 남자 그 자체였으니까.
아아. 코피가 퐝 터질 것 같아.
나는 태양 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것 같은 눈부심을 목도하면서도 꿋꿋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휴. 저 총각은 어쩜 저렇게 잘 생겼대.”
지나가는 아주머니의 한마디가 순간 내 머릿속을 꽉 지배했다. 주위의 말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오직 그 말만이 천둥처럼 울렸다.
나는 낯선 땅에서 고향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에 그만 울컥해버렸다. 아주머니의 손을 덥석 잡고서는 열변을 토해냈다.
“맞죠! 정말 잘생기지 않았어요? 저 흑발에 벽안 좀 보세요.”
“그러게. 눈매도 잘빠졌고 콧날도 오뚝해. 귀도 크고 이마도 훤한 게 안 잘생긴 곳이 없네.”
“그렇죠. 키도 크고 어깨도 넓어요!”
“그렇네. 덩치도 크고 아주 늠름해.”
“아주머니께서 보는 눈이 정확하시네요!”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침을 튀겨가며 맞장구를 쳤다. 누가 누가 칭찬 잘하나 베틀을 하듯이, 우리 두 사람은 레이몬드의 미모에 대한 찬사를 해대기 바빴다.
아. 오랜만에 느끼는 이 충족감!
함께 덕질하는 사람이 있다는 기쁨. 공감. 행복. 캬아 살맛 난다!
이름도 모르는 아주머니는 그렇게 나랑 한참을 떠들다가 홀연히 떠났다. 자고로 아줌마들이란 공통사 하나만 있어도 짧은 순간 절친이 되었다가 쿨하게 헤어지는 법이다.
“다 되었습니다.”
그림은 생각보다 빠르게 완성되었다. 대공은 그 말에 안심한 듯 굳어버린 몸을 풀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아저씨는 예상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실력자였다. 사진처럼 자세하지는 않지만 내가 원하는 레이몬드의 분위기가 다 들어가 있어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여기 있어요. 고맙습니다.”
후한 팁과 함께 값을 지불하고 그림을 손에 쥔 내가 배시시 웃자, 대공이 나를 쳐다보았다.
“예쁘게 잘 나왔다, 그렇죠?”
“그렇군. 내가 값을 지불할 텐데.”
“아니에요. 제가 가질 거니까 제가 내는 게 맞죠.”
“응? 에일린이 가져간다고?”
“네. 물론이죠! 보고 싶을 때마다 보려고요. 제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나는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싱글벙글 웃었다.
그래. 이게 바로 덕질이지!
최애의 굿즈를 하나도 갖지 못한 덕후란 있을 수 없다고.
이제야 제대로 된 덕질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아주 아주 행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