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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23화 (23/125)

23화

“네버레스트를 영입하라고? 네버레스트라면 셰일의 암살단이 아닌가?”

대공의 놀란 물음에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식을 들어서 아시겠지요? 셰일은 3년간 치르고 있던 내전을 최근에 휴전했어요. 곧 이미지 개선을 위해 특수부대들을 정리할 거예요.”

“흐음. 과연.”

동서로 갈라져 땅 싸움을 하던 셰일이 휴전을 하는 데에는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컸다. 전쟁도 더 잘 먹고 잘살려고 하는 건데 오랜 싸움으로 인해 물자가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휴전 후 피폐해진 땅을 살리기 위해서는 외국으로부터의 투자가 필수다. 셰일은 이 땅에 더 이상 싸움은 없으며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이라는 이미지를 선전해야 했고, 그것을 위해서 정규군의 규모를 축소하고 특수부대들을 없애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네버레스트는 지원이 끊어져 곤란을 겪게 될 거예요. 그때 레이몬드가 데리고 오시면 돼요.”

“알겠어. 그대의 말대로 하지.”

고심하던 그는 곧 결심이 섰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신뢰가 한 번 돈독해지고 나니 설득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좋아요. 네버레스트에 대한 정보는 제가 알려드릴게요. 네버레스트 단장은 온이라고 불려요. 그는 인상이 굉장히 날카로운데, 사실은 성품이 우직하고 자기 사람들을 천금처럼 여겨요. 그러니 레이몬드가 암살단과 가족들을 떠안아준다면 그의 충성심을 이끌어낼 수 있을 거예요.”

“떠안는다, 라.”

“암살단과 가족들을 대공의 세력으로 만드는 간단한 절차를 밟아야겠죠. 국적을 이전하고, 대공의 영지로 이주시키는 거지요.”

“호오. 그렇군.”

레이몬드는 나지막이 감탄을 터트렸다. 이렇게 확실하고도 세밀한 정보를 제공해주니 내가 생각해도 감탄할 만했다. 나는 레이몬드의 수호천사, 나 자신 칭찬해!

원작소설의 흐름은 이렇다.

원래 네버레스트는 황제의 세력이 될 운명이었다.

황제는 네버레스트를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셰일 왕한테 돈을 주고 그들을 막무가내로 끌고 왔다. 그리고 임무 수행에 지장이 된다는 이유로 그들의 가족들은 셰일에 그대로 두었다. 이에 온이 항의하자, 황제는 가족들의 안위를 협박하면서 일을 시켰다.

온은 그렇게 억지로 일을 수행하다가 임무에 실패하여 크게 다치고, 황제는 더 이상 쓸모없어진 그들을 다 처리해버린다.

다시 생각해봐도 황제는 천하의 나쁜 놈이다.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남의 생각이나 감정 따위는 일말도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존재였다.

우리 레이몬드는 그런 야만적인 일 처리 방식을 혐오한다고! 그래서 그에게 적합한 방법으로 바꿔서 일 처리를 제시한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방법까지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기꺼이 동의했다.

“그대의 말대로 이행하고 나서 기별을 넣지.”

“알겠어요.”

이야기를 끝마친 나는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문득 그에게 할 말이 생각났다. 내 사랑스러운 옥희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 맞다. 레이몬드. 옥희 말인데요.”

“옥희는 왜?”

“옥희는 뭘 먹어요? 먹을 거 줘도 돼요?”

“맹금류니까 쥐나 작은 새 같은 것들을 먹지.”

“그… 그래요?”

쥐랑 새라니….

우리 예쁜 옥희한테 맛있는 걸 주려고 했더니 쉽지가 않겠네. 저택바닥을 뒤져서 돌아다니는 생쥐라고 잡아야 하나?

“생고기여야겠죠?”

“물론이지.”

아아. 생고기를 어떻게 구하지.

주방에 생고기를 요청하면 분명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텐데.

옥희의 존재는 우리 둘 사이의 비밀이어야 하니 결코 그래서는 안 됐다.

그때 레이몬드가 막 생각이 난 듯 반가운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옥희는 해바라기 씨를 잘 먹어.”

“해바라기 씨요? 맹금류들이 원래 견과류를 먹나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 옥희는 좋아하더군.”

“그렇구나.”

견과류라면 얼마든지 쉽게 구할 수 있으니 딱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옥희에게 간식을 줄 생각에 신이 나서 걸었다. 레이몬드와 함께 밤거리를 걸으며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두 시간의 수업을 끝마친 선생이 공부방 문을 닫고 나갔다. 그러자 오늘 처음으로 혼자가 된 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완전히 녹초가 된 통에 머리까지 등받이에 기대어 눕다시피 했다.

하아. 지친다.

요즘 나의 일상은 쉴 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에일린의 납치사건을 핑계로 한 요양이 완전히 끝났기 때문이다. 오르텔 후작의 파티에 참석한 것이 그 시발점이었다.

에일린은 귀족가의 여식으로서 살인적인 공부 스케줄을 감당하고 있었다. 나의 요청으로 인해 그전에 했던 절반 정도만 하고 있음에도 충분히 버거웠다.

세계사 제국사 수학 사회 논술 이 다섯 가지를 돌아가면서 공부하는 데다가 음악 미술 발레를 매일 해야 했다. 선생들이 말하는 거로 보아 학업을 꽤 즐겼다는 것 같은데, 공부와 담을 쌓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따라갈 수도 없는 인물이었다.

완전 모범생이네, 모범생. 나도 덕질로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덕질을 하듯이 공부를 그리 했어 봐라, 서울대도 거뜬히 들어갔겠네, 라는 멘트는 내가 주위 사람들한테 가장 많이 들은 1번 잔소리였다.

흥.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거면 서울대가 서울대일 수 있겠어? 나 같은 지방대가 깔아줘야 서울대도 있을 수 있는 거지.

그건 그렇고 내가 이렇게 공부를 많이 할 수밖에 없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요새 황제가 나를 통 부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대공에 대한 대책을 세우느라 바쁜 거겠지?

그가 귀찮게 굴지 않는 것은 좋은데 걱정이 되는 측면도 있었다. 레이몬드를 위해서라도 황제를 만나면 그가 뭘 하는지 확인할 수도 있고 신경을 분산시킬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그래 결심했어!”

나는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날 부르기 싫다는 황제는 내버려 두고, 대신 옥희를 부르기로 결정했다.

갑자기 흐름이 왜 이렇게 가냐고? 이렇게 반복되는 학업 속에 매몰되어 있다가는 조만간 미쳐버릴 수도 있으니까.

스스로에게 휴식과 충전을 줘야 한다고 냉철하게 판단을 내렸다.

그날 밤.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서 올빼미 소리를 흉내 냈다.

“옥 옥 옥 오 옥.”

옥희를 부르는 신호였다. 그러자 잠시 후 푸드덕 날갯짓 소리가 들리더니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두 눈동자가 보였다. 빛은 가까이 다가와 창틀에 내려앉았다.

“어서 와. 옥희야.”

“옥 옥 옥.”

옥희는 나를 만난 게 기쁜지 힘차게 울었다. 우리는 반가운 인사를 나눈 후에 방안으로 들어왔다.

“옥희야. 이거 먹어. 널 위해 준비했어.”

옥희는 테이블 위에 미리 세팅해둔 물과 해바라기 씨를 보자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러더니 둘을 번갈아 가며 신나게 먹어대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옥희를 보자 가슴이 뿌듯해졌다.

“천천히 먹어.”

나는 테이블 옆 의자에 무릎을 쭈그리고 앉아서 먹는 모습을 구경했다. 옥희는 부리 끝으로 해바라기를 콕 찍어 부수고는 그대로 입에 털어 넣어 삼켰다.

“옥희야. 맛있어?”

“옥 옥.”

“해바라기 씨 정말 좋아하는구나?”

“옥 옥.”

말할 때마다 소리를 내며 화답하는 옥희가 정말이지 귀여웠다. 옥희라는 이름, 누가 지었는지 정말 잘 지었다니까?

“다음에 또 줄게.”

“옥 옥.”

다 먹고 난 옥희는 흡족해하며 다리 한쪽을 내게로 내밀었다. 나는 거기에다가 보낼 쪽지를 조심스럽게 묶었다. 떠나기 전 옥희는 인사를 하듯 나를 한 번 돌아보더니 푸드덕 힘차게 날아올랐다.

옥희에게 맡긴 쪽지는 대공에게로 곧장 날아갈 터였다.

내게도 날개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대공에게 날아갈 수 있었을 텐데…. 창밖으로 그의 모습을 훔쳐볼 수 있다면….

나는 부러움에 매몰되어 옥희의 뒤꽁무니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스스로에게 줄 휴식은 바로 레이몬드를 만나는 거였다.

이른바 최애 충전!!

덕질 인생 22년. 덕질에 처음 눈을 뜬 게 11살 때니까 자그마치 11년이나 덕질을 하고 살았다. 대상은 몇 번쯤 바뀌었지만, 덕질은 내게 있어 매일의 습관이자 숨 쉬는 것과도 같은 본능이었다.

그래서 대공을 만나긴 해야겠는데 문제는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하지?

쪽지를 쓰기 전까지 나는 머리가 터질 듯이 고민했다.

여태 우리의 만남은 예언 증명과 예언 내용 일러주기라는 사명이 목적으로 등극 되어있었다. 지금은 한창 네버레스트 영입 작업 중이기 때문에 딱히 만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뭔가 번뜩이는 수가 필요했다.

그러다가 매일 공부 삼아 보는 신문에서 우연히 로기 지방에 벚꽃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발견했다.

“이거다!”

나는 그 즉시 종이에다가 글씨를 휘갈겨 썼다.

쪽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레이몬드. 옆 마을에 벚꽃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 들었나요? 백성들의 축제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그 속에 문화와 전통이 깃들어있지요. 그리고 애환도요. 그들의 삶과 문화를 이해할 때야 비로소 기사에 나오지 않는 어려운 점들을 알 수가 있는 법이지요. 그러니 함께 그곳에 가보면 어떨까요? 답장 기다릴게요.]

쪽지 속에는 어떻게든 레이몬드를 꼬셔보려는 내 눈물겨운 사투가 담겨있었다.

그리고 나의 바람은 곧장 답장을 싣고 돌아온 옥희의 다리에 매달려있었다.

[그래. 내일은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데리러 가지.]

쪽지를 펼쳐본 나는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내일.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데리러 가지.

음절 하나하나가 팝업되어 내 가슴을 어루만졌다.

내일 온다고? 진짜? 이렇게 쉽게 승낙한 거야? 아아아아아앗싸!!

나는 감격에 젖어서 펄쩍 뛰었다가 신남을 주체하지 못한 몸을 사방으로 흔들었다.

일명 브레이크댄스.

최애와의 일대일 팬 미팅을 잡았다. 야호!

내일과의 이른 만남을 위해서 나는 아주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불을 어깨만큼 끌어올리고서는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 했으나, 오히려 소풍 전날의 아이처럼 눈이 말똥말똥 떠졌다.

이러다가 밤 꼴딱 새고 가는 거 아냐?

…라는 염려도 잠시, 나는 빠르게 꿈속으로 잠식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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