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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22화 (22/125)

22화

카일은 선 황제가 살아있을 때 에일린 코웻과 약혼을 했다. 그 당시 공작 가는 부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울타리였기에, 그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귀족들의 미약한 힘이나마 낡은 동아줄처럼 붙잡아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심 에일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수가 적고 무뚝뚝하며 몸가짐이 정갈한 그녀를 볼 때마다 답답함을 느끼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제가 되고 나면 적당한 시점에 파혼을 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납치사건이 어떤 계기가 되었던 걸까? 에일린은 어딘가 바뀌어있었다. 그걸 딱 짚어서 말할 순 없지만 그녀의 표정과 행동에서 활기가 넘쳐 보였다. 카일은 그게 좋았다.

그러다 그는 그런 결심을 했다. 계기는 간자와 특임대를 한꺼번에 잃는 사건이었다. 레이몬드를 몰래 제거할 수 없다면, 정치적으로라도 자신에게 유리한 기반을 만들어야겠다고. 그리고 그 일환으로 약혼녀인 코웻 공녀를 이용해야겠다고. 곧 결혼을 하겠다는 소문이 돌면 후세에 대한 기대감으로 자리를 더 공고히 할 수 있을 테니까.

황제는 친밀해 보이기 위해 공녀를 이름으로 부르고, 함께 파티에 참석하여 좋은 관계를 과시하려 했다. 다정해 보일수록 좋았다. 그래서 파티에까지 같이 참석했건만 그날 황제는 특임대 다섯 명이 당했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눈이 회까닥 뒤집혔다. 파티고 뭐고 크게 분노하여 파티장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출입문으로 가는 길에 에일린이 서 있었지만, 머리끝까지 화난 그의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젠장. 지금 공녀 따위가 문제야?

“최정예만 다섯이야. 무려 다섯이라고!”

황성으로 돌아온 황제는 신하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공이 실력자임을 감안해 무려 다섯이나 붙였건만 그들이 모조리 당했다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중 매복이라니 그런 걸 미리 확인 안 했단 말이야?”

씩씩거리던 황제는 참을 수 없는 분을 느끼자, 머릿속에 입력되어있던 부황의 생전 행동이 고스란히 출력되었다. 호위기사들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한 기사의 허리춤에 있던 검을 빼내어 들고는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신하들은 본능적으로 검을 피해 달아나거나 몸을 낮추었지만, 황제는 기어코 몇몇의 팔과 어깨, 다리에 피를 보게 만들었다. 그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기억이 떠오르면서 부황을 따라 하는 것이다.

“폐…폐하. 제발 진정을….”

신하들은 그런 황제 앞에서 벌벌 떨었다. 선 황제가 겹쳐지는 모습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들의 본능적인 두려움이 깨어난 듯했다.

공포정치의 귀환. 카일의 가면이 벗겨지고 있었다.

***

12시가 지나 마법에 풀린 신데렐라처럼 무장을 해제한 나는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사교 파티 자체는 상당히 피로한 일이었다. 내가 오랜만의 외출로 피곤한 줄 알았는지 오늘은 저택에서 편안히 쉬도록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 덕에 조용한 오후를 보내며 원작소설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보았다. 대공에게 알려줄 팁이 어떤 것들이 더 있을까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문득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주 같은 신비로움이 담긴 까만 머리카락과 하늘을 닮은 짙푸른 눈동자.

기대고 싶은 태평양 같은 어깨와 깊고 아늑한 미소를 띤 얼굴.

나의 님은 저 높은 곳에 있구나.

아. 레이몬드 보고 싶다.

나는 화려함에 시달린 두 눈을 꾹 감았다. 어지러움을 일으키는 존재 말고 내게 안정감을 주는 존재를 향한 그리움에 사무쳤다. 바로 그때였다.

톡톡톡. 뾰족한 것으로 가볍게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옥희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도도도 달려가 창문을 열었다. 커다래서 더 귀여운 올빼미 옥희는 내 쪽으로 총총 뛰어오더니 오늘도 한쪽 다리를 척, 하고 내밀었다.

사랑스러운 옥희가 전하는 최애의 메시지라니. 금상첨화는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지.

나는 쪽지를 풀어내고는 탁자로 걸어가 컵에다가 옥희에게 줄 물을 따랐다. 그 순간 옥희가 푸드덕 날아오르더니 탁자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직접 물을 먹으려고 여기까지 행차하신 것이다.

“아이구 똑똑해. 우리 옥희. 시원하게 물 마셔.”

“옥 옥 옥.”

옥희는 대답을 하듯이 몇 번 소리 내어 울고는 물에다가 부리를 박았다. 나는 그동안 쪽지를 풀어 내용을 확인했다.

[에일린. 전할 소식이 있어. 이야기는 직접 만나서 하고 싶으니 내일 코아를 보내지.]

내일? 내일이라고? 내일!! 내일이면 레이몬드를 만날 수 있다!

못 본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체감상 몇 달을 못 본 것 같았기에 기쁘고 행복해졌다.

오후 내내 빈둥대던 나는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여우처럼 설렘 속에서 다음 날을 맞았다.

***

“두 가지 소식이 있소.”

아지트 술집 2층 의자에 앉자마자 그리 말하는 레이몬드의 얼굴은 부쩍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그의 기분에 기꺼이 장단을 맞춰주기 위해 물었다.

“그게 뭔데요?”

“하노 지방의 금광이 무너졌다고 하는군.”

“허. 그랬군요.”

역시 무너지고야 말았구나. 과연 소설의 전개대로라 어쩔 수 없는 일인가보다.

나는 탄식을 터트리며 이어지는 레이몬드의 말에 경청했다.

“그대의 말대로 미리 백성들을 피신시켜서 천만다행이었지. 그런데 영주가 대신 돈을 주고 전문광부들을 여럿 고용한 모양이야. 그들이 광산이 무너지면서 그 안에 갇히는 바람에 지금 한창 구조작업 중이라는군.”

“아아 저런.”

내 입에서는 진정으로 안타까워하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리석은 영주는 금광 자체가 위험하다는 대공의 경고를 무시한 것이다. 그러다 결국 사람들이 다치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모두가 무사했으면 좋겠네요. 잘 구조되기를.”

“그러게 말이야.”

잠시 손을 모아 기도하는 포즈를 취한 나는 다음 소식을 물었다. 광부들의 안위는 우선 하늘에 맡겨놓기로 했다.

“그럼 두 번째 소식은 뭔가요?”

“과연 황제가 내게 미행을 붙였어.”

“헙. 정말요? 그래서요?”

이것 역시 소설의 전개대로였다. 하지만 눈앞의 멀쩡한 그의 모습을 보니 반드시 전개를 따르는 건 아닌가 보다. 시작은 같았으나 그 결과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대의 말대로 붉은 메타세콰이어 숲에 내 부하들을 미리 매복시켜두었지. 그리고 혼자인 척하며 유인했더니 역시나 기습공격이 들어오더군. 적의 매복은 다섯 명. 내 쪽은 열다섯 명이었어.”

레이몬드의 설명에 따르면 대공이 혼자가 되자, 숲에서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매복하고 있던 복면들이 나타났단다. 그들은 곧장 대공을 공격했는데, 잠깐 칼을 맞대어보니 굉장한 실력자들임을 알 수 있었다. 대공의 실력을 감안하여 최정예들을 붙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곧 먼저 매복해있던 대공의 기사 열다섯 명이 모습을 드러내자 저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숲은 대공의 영역인 만큼 저들은 이중 매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위험도 피하고 적들도 처리할 수 있었어. 다 에일린 덕분이야.”

레이몬드는 그리 말하면서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 모습은 마치 ‘엄마, 나 잘했지?’라고 말하는 아이 같았다.

“와! 정말.”

벌떡 일어난 나는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그의 볼을 붙잡았다. 미리 말하건대 이것은 아주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엄마 말을 잘 들은 아이는 참 잘했어요 도장과 함께 칭찬을 마구마구 해줘야 하니까.

“오구오구, 잘했어요. 우리 레이몬드.”

무심코 손바닥으로 그의 볼을 비비던 나는 그 순간 내 손에 휘둘리며 당황하고 있는 눈동자를 발견했다.

“아, 아파. 에일린.”

“앗. 죄송해요.”

허… 헛. 나도 모르게 그만.

나는 얼른 손을 떼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도로 앉았다.

내 손 안에서 문질러진 대공의 볼은 새빨개져 있었다. 우리 둘은 잠깐 헛기침을 하며 어색해진 분위기를 수습했다.

“레… 레이몬드.”

“으… 응?”

“그 일이 일어난 게 언제쯤이었어요?”

“그건 어제 정오였어.”

“헛.”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그 시간이라면 황제와 내가 후작의 파티에 참석했을 때였다. 그러자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급히 파티장을 빠져나갔던 황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 그게 황제가 본색을 드러낸 이유구나.

따로 알아보려 했건만 이렇게 연결고리가 이어져 있었다니.

카일 황제는 일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견디지를 못했다. 원래 하나에 빠지면 정신을 못 차리는 성미였다. 그래서 찐 여주한테 그리 허우적댔던 거고.

원작소설의 흐름상 지금은 한창 정치에 골몰하고 있을 때니까 찐 여주가 나오기 전까지는 쭉 이랬다.

내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자, 나의 표정 변화가 신경 쓰였는지 레이몬드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왜 그러지 에일린?”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레이몬드.”

나는 일부러 웃어 보였다. 그에게 황제와 파티에 참석한 이야기 같은 건 절대 꺼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쩔 수 없었더라도 적과 함께했다는 사실은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었다. 그저 내 마음에 몰랐으면 싶기도 하고. 언젠가 알게 되더라도 그게 가능하면 먼 훗날이었으면 좋겠다.

나에게는 이것보다 훨씬 더 생산적이고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나저나 레이몬드. 아군과 적의 비율이 대략 3대1이었는데 괜찮았나요? 충분했어요?”

“헛. 그… 그건.”

허를 찔린 레이몬드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럴 줄 알고 던진 질문이었다.

대공 쪽이 열다섯 명, 황제 쪽이 다섯 명이었으니까 3대1. 하지만 저쪽은 분명 황실의 특임대나 그에 버금가는 실력자들이라 처리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안의 위중함으로 보나 비밀엄수로 보나 아무한테나 시킬 일이 아니었으니까.

자신이 대공을 처리하려 한다는 것을 황제는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한다. 그는 겉으로는 너그럽고 관대한 황제이고 싶어 했다.

중요한 것은 황제의 주위에는 실력자들이 넘친다는 것.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깨질 것은 대공 쪽임이 분명했다. 고로 인력보충은 시급한 사안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나는 거침없이 조언했다.

“레이몬드. 네버레스트를 영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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