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어머니, 그렇게 각 잡으니까 괜스레 떨리잖아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아 괜히 마른 침만 삼켰다.
“에일린. 이제 슬슬 사교계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니?”
“사교계요?”
“그래. 이제 곧 황후가 될 텐데 사교활동을 재개해야지.”
“아.”
나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래. 귀족 가의 여식은 사교계에서 활동을 하지. 티타임에 초대하고 초대받고 파티에 초대하고 참석하고.
사실 그동안은 납치사건으로 인해서 부모님이 나를 그냥 내버려 둔 상태였다. 공부도 안 하고 사회활동도 안 하고 그저 요양하며 마음 편히 지내도록 두었다.
비록 진짜로 납치사건의 피해자는 아니었지만, 세심하고 배려 깊은 부모님의 행동은 정말이지 감동적이었다. 무척이나 고마웠다.
그랬기에 차마 어머니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네. 그래야겠네요.”
“잘 생각했어. 에일린.”
어머니는 내 힘없는 대답을 멋대로 해석하였는지, 머리를 붙잡고 쪽 소리가 나게 키스를 했다.
“그래 내 딸. 힘내렴. 아침 식사 자리에서 보자.”
그녀는 그렇게 키스와 편지들을 남겨놓고서는 방을 떠났다.
아.
나는 망각하고 있던 내 의무를 꾹 짚어주는 상냥함에 탄식을 터트렸다.
지금도 황제가 심심하면 불러대서 귀찮아 죽겠는데, 여기에 더하여 파티까지 정기적으로 참석해야 한다니.
이런 것들을 모두 거절한 원작의 에일린은 대체 얼마나 기개가 높은 성격이었던 것인가.
이제 나의 편안했던 나날들도 끝났구나. 안녕.
나는 속으로 씁쓸함을 삼켜야 했다.
***
가족들과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난 후에는 받은 초대장을 분류했다. 부모님은 수도권의 명망 있는 귀족 가문이라며 초대장 몇 개를 추천해주셨다.
이 중에서 적어도 한 군데는 가야 한다는 건데, 어디를 가야 하지?
나는 초대자들의 가문 이름을 훑어보다가 왠지 익숙한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편지지 아래에는 후작 텐슬 오르텔이라는 이름 옆에 가문 문양이 함께 찍혀있었다.
오르텔 후작이라…. 원작소설 어딘가에서 한 번쯤 언급되었던 가문인 것 같은데.
그래. 기왕이면 조금이라도 익숙한 이름이 좋겠지?
내 선택의 기준은 단순했지만 부모님은 탁월한 선택이라며 좋아하셨다. 그러고는 즉시 참석하겠다는 답장을 써서 보내었다.
그리고 이 따끈따끈한 소식은 오늘 함께 점심 식사가 약속되어있던 황제의 귀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오르텔 후작의 파티에 간다고?”
“예. 폐하.”
오늘도 때깔 좋은 제복을 갖춰 입은 황제가 빛나는 금빛 머리칼을 나풀거렸다.
그가 멋있든가 말든가 나는 먹기 좋은 크기로 잘린 스테이크를 찍기 위해 포크를 뻗었다.
하아. 말하기 싫었는데 어쩌다가 말하게 된 걸까.
그래도 파티에 참석한다는 것 정도는 알려도 상관없겠….
그렇게 위안하는 나의 생각 끝이 단칼에 잘렸다.
“에일린이 가면 나도 참석하지.”
“예? 폐하께서요?”
나는 포크로 스테이크 조각을 쿡 찍어 올리다가 황제의 말에 놀라 도로 떨어뜨려 버렸다.
“그대의 파트너는 나이니 당연한 것 아니겠소?”
입안에 머금고 있던 수프를 삼킨 황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거죠?
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태연한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거 꼼짝없이 저 번쩍번쩍한 황제랑 파티에 같이 가게 생겼네.
결혼식 날짜도 안 잡아놨으면서 웬 파트너 타령이람?!
아, 그렇다고 결혼하자는 건 절대 아니고. 암 그래선 안 되지.
원작소설에서는 에일린을 쫓아냈으나 나는 아직 아니었으니까 대체 어느 장단을 맞춰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언제쯤 황제한테서 쫓겨날 수 있는 거지?
그나저나 일단은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생각해야 했다.
나는 진짜 에일린이 아니니까 당연히 사교계는 처음이다. 껍데기는 베테랑인데 속 알맹이는 초짜라는 얘기고, 고로 큰일이 났다는 거지.
그렇지만 로판 소설을 많이 읽은 짬밥이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는 뭐가 괜찮아! 춤을 어떻게 글로 배우냐고!!
황제가 같이 가는 게 불편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혼자 가는 것보다야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알쏭달쏭한 마음이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으니 낫다고 생각하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그리고 파티 날은 곧 다가왔다.
***
아침에는 정말이지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
큰 사건에 휘말렸다가 다시 사교계로 돌아가는 첫 복귀전이었기에 어머니는 나에게 신경을 많이 쓰셨다. 게다가 황제가 내 파트너로 동행해준다는 얘기까지 나오자, 나를 꾸미는 것에 온 집안의 사활이 걸린 것처럼 굴었다.
그렇게 들들 볶이고 나니 과연 정성을 들인 값어치가 있긴 했다.
내가 입은 드레스는 허리가 잘록하고 아래는 A스커트 형태로 넓게 벌어진 디자인이었다. 핏빛 천을 기본으로 하여 소매와 목, 치마 부분은 화이트와 블랙의 레이스로 레이어드되어 있었다. 머리에는 끝에 붉은 장미가 달린 머리띠를 둘렀고 목에는 다이아몬드들이 줄줄이 박힌 목걸이로 투명하고 반짝이는 포인트를 주었다.
옷이 날개라더니 과연 에일린의 분홍빛 머리칼, 녹안과 근사하게 어우러졌다. 원래도 요정같이 어여쁜 에일린이지만, 이렇게 꾸며두니 기품과 우아함이 넘치는 게 딱 예비 황후감이었다.
황제는 지나가면서 나를 태워가기로 했다. 시간이 다 되어갈 즈음, 금으로 새겨진 황실의 문양이 박힌 번쩍번쩍한 마차가 공작 저 앞에 당도했다. 황제의 등장에 공작 저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미리 서서 대기하고 있던 집안 소속의 기사들과 사용인들이 황제를 향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나는 미리 깔아둔 고운 카펫 위를 걸어서 황제가 있는 마차까지 걸어갔다. 그는 웬일인지 마차에서 내려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 에일린. 그대, 오늘 무척이나 아름답군.”
“감사합니다. 폐하도 정말 멋있으세요.”
뻔히 돌려주는 멘트였지만 빈말은 아니었다. 블랙과 화이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데다, 붉은 깃으로 장식을 준 연회복을 입은 그는 화려함 그 자체였으니까. 오늘따라 더 잘 손질된 황금빛 머리칼도 큰 몫을 했다. 눈부신 자태에 모두가 눈을 떼기 힘들어할 정도였다.
역시 남자주인공인가…!
그래도 나에게는 대공밖에 없어. 저 현란함에 결코 흔들리지 않을 거야.
그리 다짐하며 레이몬드가 연회복을 입고 내 곁에 서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러자 코피가 퐝 터져 나올 것 같이 울컥했다.
그 순간 시선이 마주친 황제가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어…? 저기요. 그쪽이 아닌데요?
아무래도 오해를 한 것 같은데, 정정할 수는 없겠지?
너 말고 레이몬드라고 말하는 순간 목이 달아날 테니까.
***
이윽고 도착한 오르텔 후작의 저택은 공작인 우리 집보다 훨씬 더 으리으리했다.
그저 이름이 뭔가 익숙하다 싶어서 별생각 없이 선택한 거였는데, 파티를 선택한 날 밤 침대에 누워서 원작소설을 되새겨보다가 갑자기 후작에 대한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아, 그 오르텔 후작!
그는 황제의 옆에서 온갖 아부와 아첨을 떨며 콩고물을 받아먹는 자였다. 나중에는 원작의 진짜 여주한테서 쫓겨나 거지 신세가 되는 비운의 가주이지만.
어쨌든 지금은 한창 잘나갈 때였다.
황제의 줄을 탄 탐관오리 귀족은 막강한 영향력을 떨치고 있었다. 황성보다는 한 단계 아래지만, 이곳 역시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으로 가득했다. 한마디로 돈을 x발라두었다.
저택의 입구에 다다른 마차가 멈춰 서자, 황제가 먼저 내려서 내게로 손을 내밀었다. 제 파트너를 에스코트해줌으로써 신사처럼 보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에일린. 내 손을 잡지.”
“고맙습니다, 폐하.”
마차에서 내려선 나는 황제의 팔에 내 팔을 둘렀다. 곧 파티가 개최되는 홀의 문을 통과하자 수많은 사람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황제 폐하 납시오!”
주최 측에서 황제의 행차를 목청 크게 알리자, 일제히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라고 외치며 우리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와…!
그 장면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모든 사람이 한 몸같이 움직이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가 힘드니까. 많은 사람이 나에게 허리를 숙이는 건 생각보다 훨씬 짜릿한 일이었다.
정수리와 손끝이 찌릿찌릿해 오는 이 느낌, 나는 문득 권력의 끝자락을 맛본 듯했다.
“황제 폐하. 어서 오십시오.”
황제를 보며 서둘러 이쪽으로 다가온 오르텔 후작이 성심을 다해 허리를 숙였다.
“오르텔 후작.”
“이런 누추한 곳까지 직접 행차하시다니 저희 가문에 큰 영광입니다. 가문 대대로 자자손손 이 영광스러움을 전해내려 줄 것입니다.”
듣기 좋은 아부 가득 한 멘트가 몸에 배어 청산유수로 흘러나왔다.
“코웻 공녀. 어서 오십시오. 초대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초대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지요.”
이번엔 내 차례였다. 나도 그에게 묵례를 하며 의례적인 멘트를 했는데, 그런 나를 황제가 곁눈질로 지켜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했지만, 표정으로 보아 내 태도가 꽤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두 분께서 함께 와주시니 이 자리가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허허. 그럼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알겠네.”
후작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물러가자, 황제와 나는 팔짱을 낀 채로 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참석한 귀족들은 우리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다가와 인사를 하며 사탕발림을 늘어놓았다. 황제를 사석에서 가까이 마주할 수 있는 기회는 천금과도 같았으니 다들 이때다 싶었는지 개미 떼처럼 덤벼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쿠드 백작입니다.”
“전 브닐 후작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공녀께서는 정말로 아름다우세요.”
“맞아요.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 한 쌍이세요. 호호호.”
황제가 무도회를 따라왔다는 사실이 나를 향한 애정으로 보였는지, 그들은 주로 내 칭찬을 늘어놓으면서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애썼다.
그렇게 한참 동안 계속되던 개미 떼들의 행진도 어느새 끝이 보였다. 그즈음 황실소속의 기사 한 명이 빠르게 다가오더니, 황제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