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18화 (18/125)

18화

나는 즉시 대공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레이몬드.”

“?”

“곧 루크를 만나러 두 번째 메타세콰이어를 찾아갈 때가 되었지요?”

“아.”

레이몬드는 내가 자신의 스케줄을 꿰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이건 정말로 소수만이 아는 기밀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예언가임을 떠올리자 빠르게 납득하는 듯했다. 역시 신력은 모든 것을 납득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

“그래. 맞아.”

그는 얼떨떨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체없이 나의 생각을 전달했다.

“이번에는 레이몬드 쪽에서 함정을 파면 어떨까요?”

“함정을?”

“네. 그 주변이 매복하기 딱 좋은 장소잖아요. 이중 매복도 가능할 테고요.”

“이중 매복이라….”

그는 가만히 생각을 짚어보았다.

분명 레이몬드는 이중 매복이 좋은 수라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실은 원작소설에서는 이 이중 매복을 통해서 대공 쪽이 당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있으니까 어림없지. 오히려 이쪽에서 먼저 선수를 쳐보려는 것이다.

“그건 가능할 것 같군. 좋은 생각인데? 고마워 에일린.”

크헉. 내 심장아.

이렇게 기습적으로 이름을 부르다니, 하마터면 쓰러져버릴 뻔했잖아?

“뭐…뭘요.”

나는 고개를 숙이며 옆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겼다.

저 좋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니까 막막 설레고 녹아버릴 것 같아.

나는 홧홧하게 열기가 오른 볼을 차가운 손바닥으로 식혔다.

한 번 들으니까 자꾸만 듣고 싶고 자꾸만 불러주었으면 했지만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은 꽤 흘러가 버렸다. 아쉽게도 공작 저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이제 갈까요?”

오늘 밤은 선물을 한 아름 안고 돌아가는 기분이라, 한층 가벼워진 발걸음을 떼려는데 레이몬드가 내 팔을 살짝 붙잡았다.

팔을 잡는 건 그의 섹시한 버릇인가?

행동이 저지당하는 건 인격자로서 유쾌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에게만은 달랐다.

레이몬드가 나를 불러주고 필요로 해주는 건 쾌감 그 자체였으니까.

함께 일어선 그는 할 말이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요?”

이 질문이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본론이었나보다. 그는 거칠 것이 없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에일린은 황제의 사람이 아니라 했지. 그렇다면 내 사람인가?”

두근.

그 순간 얼굴이 단풍처럼 물들며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내게 대답을 요구하는 듯한 물음을 흘렸지만, 사실은 이건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인 작업이겠지.

그것이 내 가슴에 느닷없이 봄바람을 일으켰다.

내 사람. 레이몬드의 사람. 이 말은 나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가장 확실한 표현이었다. 수호천사가 되어 대공을 살리려는 게 내 스스로 결정한 빙의의 최종 목적이니까.

하지만 이런 거창한 속을 내비칠 수는 없지. 무엇보다 근거를 솔직하게 말해줄 순 없으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그가 원하는 대답에서 조금은 비껴가기를 택했다.

“저는 정의의 수호천사가 되고자 해요.”

그것도 바로 당신의!

나는 가장 중요한 부분만 쏙 빼놓고 말했다. 그러자 아주 그럴듯한 대답이 완성되었다.

흔히들 신력은 하늘에서 내려준다고 믿는다. 모든 지위, 재능 등이 하늘에서 내려준 것이긴 하지만, 신의 영역은 훨씬 더 그런 취급을 받았다.

그렇기에 신력을 가진 자가 신의 뜻에 따라 정의를 수호한다고 말하면 아주 그럴듯하기 마련이다. 감추긴 했지만 진실을 말했으니 양심에 거리낄 것도 없었다.

마치 홍길동이 빙의한 듯 정의로운 레이몬드. 그는 내 이유를 듣자마자 빠르게 납득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바로 자기 자신도 그렇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렇군.”

대공은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더 이상의 다른 이유는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이대로 설득 완료였다.

레이몬드는 나를 데리고 시장길을 걸었다. 코아는 숲이 시작되는 길목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자정이 다 된 시각인데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길거리에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꽤 듣기에 좋은 음성이었다.

소리가 나오는 곳에 가까워지자, 두 사람이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보였다.

“길거리 공연인가 봐요.”

대학로를 걷다 보면 가수 지망생이나 신인들이 길에서 버스킹을 하곤 했는데, 이곳에서 비슷한 풍경을 보니까 반가웠다.

“목소리가 듣기 좋은데요?”

“잠깐 듣다 갈까.”

“좋아요.”

우리는 구경하는 사람들의 틈으로 섞여들었다. 레이몬드도 익숙한 듯이 자연스럽게 섰다.

나는 레이몬드를 쳐다보았다.

가수들로 시선이 향해있는 그는 리듬을 타며 가볍게 몸을 흔들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내 눈동자에 담긴 장면은 세상에서 가장 기이하고도 신기한 장면이었다.

대공씩이나 되는 대귀족이라면 무릇 비싼 가죽 소파에 앉아 저명한 악단이 연주하는 우아한 선율의 음악을 들어야 할 텐데.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가 이 사람이 황족인 줄 알까.

평민들과 섞여서 평민 문화를 즐기다니 참으로 소탈하고 멋있는 사람이었다.

“영원히~ 그대만 바라보리~”

노래에는 여러 가지 주제가 담겨 있었지만 오늘의 메인은 ‘사랑’인 것 같았다. 나는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은 가사에 잔뜩 심취했다.

곧 노래가 끝나자 사람들의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다음은 지원자를 받아보도록 하지요.”

가수들은 잠깐 쉴 타임을 가지려는지 관중 중에서 노래를 시켜볼 만한 사람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들어 대뜸 이쪽을 지목했다. 그의 손가락은 정확히 대공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야. 저쪽에 잘생긴 총각이 계시네. 얼굴 맛이 좋으면 노래 맛도 좋지요?”

“옳소!”

“거, 말 한번 잘한다.”

갑자기 모든 사람의 시선이 레이몬드에게로 쏠렸다. 그는 이런 상황이 처음인지 무척이나 당황한 기색이었다.

“에일린. 그만 가지.”

“레이몬드. 그러지 말고 노래 한 곡 들려주세요.”

나는 도망치려는 그를 한 번 말려보았다. 리듬을 타는 모습에서 음악을 향한 진심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불쑥 튀어나온 진심이었다.

그러자 내 말에 놀란 레이몬드는 잠시 망설이더니 곧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가수가 있는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어? 진짜로 부르려고? 레이몬드가 노래를?

최애의 노래를 듣고 싶은 욕심에 졸라봤는데, 이렇게 바로 먹힐 줄이야.

나는 생각지도 못한 득템에 감격했다.

용기를 낸 레이몬드는 정말이지 멋있었다.

저 환상적인 목소리로 노래를 들려준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다 녹아 땅속으로 스며들어버릴지도 몰라…!

가수들 옆으로 간 레이몬드는 목을 흠흠 가다듬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길거리 가수들은 프로답게 그의 음성에 맞추어 연주를 해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바람을 타고 길거리 속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흘러가는 세월을 막을 순 없으나 그 속에서 움트는 귀한 것들이 있으리.

끊어지는 듯하나 끊어지지 않고 영원이란 이름 속에서 이어져가리.

그대의 땀방울을 마신 대지가 또 하나의 생명을 피워내리.

희망을 노래하는 목소리.

노래를 기교 있게 잘 부르는 건 아니었지만 가사 하나하나에 진심이 깃들어있었다. 그래서일까. 관중들은 그의 목소리에 빠져들었고 감동이 벅차오르는 듯했다.

노래가 끝나자, 그와 동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나왔다. 레이몬드는 서둘러 그 틈에서 빠져나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이 꼭 낯선 곳에서 엄마를 발견하고 오도도 달려오는 아이 같았다.

“레이몬드. 너무너무 멋있어요!”

“그… 괜찮았나?”

“당연하죠! 어쩜 목소리가 그렇게 좋아요? 장난 아니에요!”

나는 이때다 싶어 나의 팬심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거의 방방 뛰면서 침까지 튀겨가며 칭찬 세례를 쏟아부었다.

나의 부둥부둥이 쑥스러웠는지 대공의 얼굴은 복숭아처럼 어여쁘게 붉어졌다.

“많이 늦었군. 어서 가지.”

그는 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돌아서 걸음을 재촉하는 우리의 등 뒤로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노랫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

강한 햇볕이 드넓은 창을 통해 내리쬐는 날.

아침에 일어나 깨끗이 씻은 내 몸을 하녀들이 단장해주고 있었다. 머리를 매만지던 하녀는 빗으로 두피를 시원하게 긁어주었고, 다른 하녀는 내 손톱 발톱을 손질해주었다. 또 다른 하녀는 내가 입을 옷과 신을 신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던 타인의 케어가 점점 익숙해져 가는 거로 보아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가보다. 에일린이 귀족 레이디로서 관리가 익숙한 삶을 살았으니 나도 거기에 자연스러운 척 맞출 필요가 있었다.

오늘은 안타깝게도 황제가 점심 식사에 초대한 날. 아침을 먹은 후에 마차를 타고 황성으로 가야만 했다. 그래서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며 열심히 꾸미는 중이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명상을 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늘 하듯이 마음속으로 같은 말을 수십 번씩 되뇌었다.

나는 에일린, 에일린이다.

나는 코웻 공작 가의 딸 코웻 공녀로, 황제 카일의 약혼녀다.

혹여나 아차 하는 순간 내 정체성을 잊어버릴까 봐 일어나서 얼마 동안 습관처럼 되뇌는 말들이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별안간 노크 소리가 나길래 대답했더니, 코웻 공작 저의 안주인인 어머니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시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에일린. 너도 잘 잤니?”

어머니는 인사를 건네면서 내게로 다가왔다. 어머니의 뒤에 따라온 하녀의 손에는 제법 넓은 상자가 하나 들려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화장대 앞에다가 내려놓았다.

시선을 던지자, 상자 안에는 편지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최근에 너에게로 온 초대장이란다.”

“초대장이요? 이게 전부 다요?”

족히 팔십 장은 돼 보였다. 이 정도라면 수도 퍼먼트에 있는 잘나가는 귀족들은 물론, 근처 지방 귀족들까지도 보냈을 양이었다.

“이렇게나 많아요?”

“당연하지. 에일린. 넌 황제 폐하의 약혼녀잖니. 안 그래도 엄마가 네게 할 말이 있단다.”

그리 말하며 어머니는 살짝 무릎을 꿇고 앉더니 내 손을 슬쩍 가져다가 잡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