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다섯 번째 예언은 채광에 관한 거였다.
하노 지방의 영주는 우연히 발견된 커다란 금광을 평민들을 동원하여 채굴하기 시작했다. 보수는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강제노역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곳이 머지않아 무너져내릴 거라는 사실이었다.
대공은 내 말을 듣자마자 바로 하노로 달려가 영주를 혼쭐을 내고, 평민들을 삶의 터전으로 되돌려보내 주었다.
지난번처럼 금광이 무너지려면 시기가 좀 지나야 해서 이번에는 천천히 부를 줄 알았는데, 대공은 하노에서 올라오자마자 나를 소환했다.
우리는 늘 그랬듯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대공은 할 말이 아주 많은 얼굴이었다.
특히나 그의 눈빛에는 나에 대한 신뢰가 뚝뚝 흘러내렸다.
내가 알려준 덕에 그 많은 백성을 구하게 되었으니, 조금 오버를 보태서 내가 신으로까지 보일 법도 하겠지?
캬아.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니. 이런 사람이 군주가 되어야 하는데.
나는 표정만으로도 감격해하며 그가 말을 꺼내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대공은 크흠, 목을 가다듬으며 가만히 나와 시선을 맞췄다. 앉은 자세는 좀 더 공손해져 있었다.
“공녀. 이제는 예언을 한다는 그대의 말을 믿겠소. 혹시라도 앞으로 이런 이야기가 더 있으면 나에게 알려주었으면 좋겠군.”
“네. 그리할게요.”
나는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이 어떤 마음으로 예언의 증거를 계속 요구했는지 알기에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간 수고 많았소.”
“뭘요. 저는 말을 전한 것밖에 없는걸요. 대공님이 애쓰셨죠.”
나의 칭찬이 의외였던 걸까? 그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그러더니 중요한 할 말이 있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변했다.
“공녀. 그 예언 능력은 얼마나 쓸 수 있소?”
두둥! 드디어 때가 되었나.
사실 평민들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증거일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이 황제로부터 대공을 살리기 위한 나의 밑밥 깔기였으니까.
내 계획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나는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대답을 꺼내었다.
“사실 제 능력은 미약하고 마음대로 조종이 되는 건 아니랍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대공님에 관한 꿈을 꾸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대공님께 알려드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군. 그렇다면 그대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소.”
대공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황제의 약혼녀인 내게 정식으로 도움을 요청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흔들리고 고민했을까.
그 마음이 느껴져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푸른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면서 말이다.
“잘 부탁드리오. 코웻 공녀.”
대공은 내게 악수를 요청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내 시선은 그의 긴 손가락으로 내리꽂혔다.
손, 대공의 손. 내가 최애의 손을 잡다니!!
일전에 약을 발라주면서 한 번 잡은 적이 있지만 그건 성스러운 치료행위에 불과했으니까.
물론 그것도 영광스럽고 행복했지만 이번에는 닿는 면적 자체가 다르다.
악수를 하게 되면 손과 손이 포옹을 하는 거잖아? 잡고 나면 며칠간 손도 안 씻어야 하는 거겠지?
나는 악수를 하기 전에 내 바지에다가 손을 문질렀다.
야무지게 닦아내는 솜씨에 대공이 뭘 하는 건가 싶어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지만, 의식을 치르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었다.
손을 그렇게 한참을 처리하고 나서야 나는 기꺼이 대공의 손을 잡았다.
“저야 말로요. 루슬로 대공님.”
척.
두 손이 서로를 마주 잡았다.
손바닥과 손바닥이 만나자 서로의 온기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온전히 전해졌다.
내게서 뻗어 나간 후끈후끈한 열기가 맴돌아 손안의 공기를 데우고 있었다. 커다랗고 기다란 대공의 손은 작고 하얀 에일린의 손을 넘어 손목까지 감쌀 지경이었다.
태연한 척 잡고 있지만.
내 심장은 쿵쾅거리며 북을 쳐댔다. 그것도 아주 아주 커다란 북을 말이다.
그래서인지 손에도 심장이 있는 것처럼 거대한 울림이 느껴졌다.
쿵-쾅. 쿵-쾅.
손이 떨어지고 난타와 같은 연주가 끝나자, 대공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내게 물었다.
“공녀에게 어떤 보상을 드리면 좋을까. 혹시 내게 원하는 것이 있소?”
대공은 내 도움을 공짜로 받을 생각이 없나 보다. 과연 청렴결백한 그다웠다. 하지만 내게는 그저 최애를 살리려는 사명만 있을 뿐이었으니, 팔을 빠르게 뻗어 손사래를 쳤다.
“네? 보상이라뇨? 당치도 않아요. 저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
거기까지 말하고 나자 내 입술이 별안간 멈추었다.
아니 잠깐만. 필요 없기는 뭐가 필요 없어? 만화나 드라마 같은데 많이 나오잖아. 소원 들어주기 내기해놓고 내 소원은 너랑 사귀는 거다 뭐 이런 식의 내용이…?
나는 보상이라는 단어 앞에 잔뜩 발휘되는 내면의 음흉함을 깨닫고는 잠시 심호흡을 하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후우후우. 왜 이래, 나 자신. 최애에게 그런 나쁜 마음을 먹다니, 떼끼!
하지만 거절하고 날려버리기에는 확실히 아까운 기회였다.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겠어?
나는 한 번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요구를 할 거라면 현실적으로 들어가야 그에게 먹힐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까 있어요.”
“그게 무엇이오?”
대공은 카고르가 간자임이 확인된 순간부터 나를 은인으로 여기고 있었나 보다. 그는 말만 하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태도로 물었다.
그 잘난 얼굴을 들이밀며 물으니까 결혼하자고 하고 싶잖아?
그렇지만 지금 프러포즈를 해봤자 농담이라고 생각할 것이 뻔했으므로, 나는 욕망을 꾹 누르고 실현 가능한 대타를 꺼내 들었다.
“저를 에일린이라고 불러주세요.”
“뭐?”
내가 말한 보상이 너무나 의외였는지 대공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왕이면 반말도 써주시고요.”
나는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얹었다.
반말 반말 반말!
대부분의 사람에게 말을 조심하는 대공이 내게만 편히 말한다면 얼마나 특별할까. 마음 같아서는 나도 오빠라고 부르고 싶다. 최애는 다 오빠. 잘생기면 다 오빠잖아?
“그건 공녀에게 너무 실례가 될 것 같은데….”
대공이 근심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내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전혀 아니에요. 도움을 받으려면 앞으로 저랑 친하게 지내셔야지요. 저도 대공님께 편하게 연락하고요.”
“물론이오. 공녀가 원할 때면 언제든 연락을 주시오. 엘리자… 아니 옥희를 통해서 기별을 넣어주면 되오.”
대공은 그건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제 보상도 들어주시는 거죠?”
“그…그건….”
그는 다시 고민 속으로 빠져들어서 한참을 생각하고 망설였다.
에이. 그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그러세요, 레이몬드.
사귀자는 것도 결혼하자는 것도 아니고, 에일린을 에일린이라 부르라는 것뿐인데.
이 애가 내 거다. 내 여자다. 왜 말을 못 해!
……아, 이건 아니고. 그만 흥분해버렸네.
하지만 내게도 이것은 포기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핵심은 이거다. 황제도 이제 나를 이름으로 막 부르는데 최애한테는 더더욱 에일린으로 불리고 싶다는 것!
“에일린.”
결심을 마친 대공이 나를 보며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번개가 관통한 것처럼 짜릿한 감각이 몸통을 훑고 지나갔다.
어이쿠, 깜짝이야.
갑자기 이름을 듣게 되자 나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화들짝 놀랐다.
부르라고 해놓고서는 막상 불리니까 감당 안 되는 이 기분은 뭐지?
“이러면 되나?”
대공은 오랜 망설임이 무색하게 자연스럽게 보상을 해내었다. 게다가 상당히 거칠 것 없는 태도로 말이다.
그 모습이 이 세상에 다시 없을 정도로 섹시했다.
어머어머. 반말까지. 너무 설레잖아.
오늘 이 자리가 내가 누울 자리군요. 네, 그럼 안녕히.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도다.
이 자리에서 곧바로 관을 짜고 드러누울 지경이었다. 그만큼 내 심장은 당장이라도 터져나갈 것 같았다. 기절하고픈 몸을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대공이 마지막 쐐기 박기용으로 벼락같은 멘트를 날렸다.
“대신 그대도 내 이름을 불러. 그러면 공평하겠지.”
“네?”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요?
서로가 서로에게 이름을 부르다니 그것이야말로 유일무이한 일이지 않은가.
정말이지 완벽해!
“내 이름은….”
“좋아요. 레이몬드.”
이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다. 나는 냉큼 말을 받아서 그의 이름을 불러버렸다.
대공은 자신의 풀네임을 모를까 봐 내게 친절하게 알려주려고 한 것 같았지만, 그의 소개 멘트보다 내 말이 한 발 더 빨랐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지? 의아해하던 대공은 곧 스스로 답을 찾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예언가인데 자신의 풀네임 정도야 모를까 생각하는 거겠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됐다. 아예 틀린 추측도 아니니까.
이제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신뢰를 바탕으로 탄탄하게 구축되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전할 가장 시급한 경고부터 꺼내야 했다.
“레이몬드.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이제부터 제 말을 잘 들으셔야 해요.”
“말해. 에일린.”
으아, 이름에 반말까지 한 번에.
우리 최애는 정말 잘한다. 내 심장 터트리기 전문가인가?
그러나 마냥 좋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황제는 카르고를 통해 레이몬드의 동선을 파악했을 거예요. 그러니 앞으로는 절대 혼자 다니시면 안 돼요.”
소설원작에서 봤을 때 레이몬드는 긴밀히 움직이기 위해서 종종 혼자 다니는 걸 선호했다. 자신과 부하들의 편리성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고양이 앞에 쥐가 지나가며 “나 잡아갑쇼.” 하는 꼴이 될 수 있으니 몸을 사려야 한다.
“레이몬드가 강한 걸 알지만 기습에는 장사가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
“적어도 다섯 명은 꼭 데리고 다니세요.”
“다섯 명이나?”
“네. 당분간 만이라도요.”
“흐음. 그렇군. 알겠어.”
사실 루슬로 대공은 제국에서 손꼽히는 검호였다. 보디가드 격으로 부하들을 대롱대롱 달고 다니는 게 썩 내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공의 정기적인 스케줄이 황제에게 소상히 알려졌을 테니 반드시 때를 노릴 터. 빈틈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
그런데 빈틈이라고…?
갑자기 무엇인가가 내 머릿속을 찌릿하게 관통했다. 좋은 아이디어가 번뜩 떠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