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대공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었다. 그리고 나는 두 손을 맞잡으며 볼에다가 갖다 대었다.
이야. 우리 대공은 어쩜. 이렇게나 멋있을까.
대공의 설명에는 저런 세밀한 TMI까지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들은 정황을 바탕으로 각색을 해보았을 때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모습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 일은 내 예언이 적중했다는 증거였기에 일단 그에게 최대한 으스댈 필요가 있었다. 나는 어깨를 최대한 벌리며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봐요. 제 말이 맞죠? 이제 절 믿으실 수 있겠죠?”
“한 번 가지고는 부족하지.”
“에?”
당당하게 외치며 가슴을 내밀었던 나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대공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확실한 자기 의사를 표현했다.
“일이란 자고로 여러 번이 중복되어야 신뢰할 수 있는 것 아니겠소?”
“그…건 그렇죠.”
하나 가지고는 부족하다 이거지? 그래. 좋았어.
나는 당황한 마음을 수습하고서 검지를 앞으로 내밀었다.
“좋아요. 그럼 한 번 더 가죠.”
“좋소.”
대공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 타자는 젠이라는 평민이었다.
모로로 지방에 사는 그는 마을의 중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농부였다. 집안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았기에 밭도 제법 넓었다. 농번기가 되면 온 식구가 동원되어 부지런히 움직인 덕에, 먹고 사는 게 평민치고는 넉넉한 편이었다.
그런데 지방의 영주가 이 비옥한 땅을 탐을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부린 수작이 ‘명찰제’의 도입. 이 땅이 누구의 땅인지 신고를 하고 명찰을 달으라는 제도였다.
만약 하지 않는다면? 그 땅은 영주의 것으로 귀속된다. 당연히 신고에는 기한이 정해져 있었다. 그래야 기한을 지키지 못한 평민들의 땅을 다 뺏어갈 수 있을 테니까.
이는 일종의 기한부 신고제로 역사책에서 탐관오리들이 부리던 그 행패였다.
오랜 옛날 조상 때부터 일구어왔던 땅이니 당연히 내 것인 줄 아는 것이 평민의 삶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해하기도 어려운 제도를 만들어서 갖다 붙이다니. 각종 약관이나 계약서를 전문용어를 써가며 어렵게 만드는 것과도 같은 이치였다.
원작소설을 읽었을 때도 생각했지만, 어디에나 있는 것들의 파렴치 짓은 똑같구나 생각하며 혀를 내둘렀다.
내 이야기를 들은 대공도 가슴에 답답함이 차오른 듯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명찰제는 기한이 얼마 안 남은 것으로 기억해요.”
“서둘러야겠군. 고맙소. 공녀.”
그는 다급해 보이는 눈동자를 반짝 빛냈다.
모로로 지방은 수도 퍼먼트로부터 거리가 좀 있었다. 말을 타고 달린다면 반나절을 쉬지 않고 달려야 할 터였다. 마법사의 텔레포트를 사용하면 빨리 갈 수 있지만, 내가 알기로 대공 쪽에는 그렇게까지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가 없었다.
바쁜 일정으로 인해 아쉽게도 오늘은 대공과 일찍 헤어져야 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지방에 대공이 직접 가야 귀족들을 제대로 혼내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각오를 하고 코아와 함께 떠나려는데, 대공이 내 옆에 슬쩍 따라붙었다.
“저쪽 길까지만 배웅해주겠소.”
“어머. 친절하셔라.”
갑자기 생긴 지방 일정으로 인해 앞으로 며칠은 못 볼 테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최애의 체취라도 잔뜩 흡입해놔야 이 험난한 세상을 버틸 수 있을 테니까.
우리 세 사람은 시장 거리를 통과했다.
나는 대공과 걸어가면서 구경했던 곳을 다시 복습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어제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상점을 하나 발견했다.
“앗. 저기는?”
전에 책에서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분홍색으로 잔뜩 색칠된 가게. 가장 위에 붙은 분홍색 간판에는 ‘하리네 디저트’라고 적혀 있었다.
공작 저의 책장에서 가장 먼저 읽게 된 취향 저격의 맛집 책! 거기서 보았던 가게였다. 사진이 없는 대신 그림으로 그려진 가게의 모습이 똑같아서 알아볼 수 있었다.
나의 알은 척에 대공이 시선을 돌리더니 함께 상점을 쳐다보았다.
“저길 아시오?”
“네. 책에서 봤어요. 맛있어서 엄청 인기라는데 이곳에 있는 줄 몰랐네요!”
나는 고이는 침을 츄릅 삼켰다. 잡지 책에 나열되어 있었던 디저트 그림이 떠올랐으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자정이 다 된 시각이라 문은 굳게 닫힌 상태였다.
“다음번에는 낮에 꼭 가봐야겠어요.”
나는 아쉬웠지만 대공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래도 위치를 알아놨으니 언제든지 갈 수 있겠는걸?
***
일주일은 걸리려나 생각했던 대공과의 만남은 근 이틀 만에 이루어졌다. 왔다갔다 하는 것만 해도 꼬박 하루가 걸릴 텐데? 어찌 된 명문인지 그는 이튿날 저녁에 바로 나를 불렀다.
코아를 따라 방으로 들어간 나는 다소 피곤한 기색의 대공과 얼굴을 마주했다.
“이렇게나 일찍 다녀오셨어요?”
“그렇소. 지체할 수 없었으니.”
피로가 쌓였지만 그에게서는 스트레스가 아닌 쾌감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역시 공녀의 말대로였어. 젠을 비롯한 평민들은 신고의 의무는 꿈에도 모르고 있더군. 그래서 다음 날 날이 밝았을 때 마을을 돌면서 명찰제에 대해 알렸소.”
그 후의 이야기는 이랬다. 평민들이 갑자기 관청으로 우르르 모여들자 업무가 마비되고 한바탕 난리가 났단다. 보고를 받고서 자신의 계획이 망했다는 것을 깨달은 영주는 그 즉시 명찰제를 취소했다고 했다.
일이 모두 끝난 다음에, 대공은 영주를 찾아가 다시는 이런 일을 꾸미지 않도록 약조를 단단히 받아두었다고 했다.
얘기를 들은 나는 의아한 지점을 콕 집었다.
“그런데요, 과연 그가 약속을 지킬까요?”
“목에 칼을 들이밀면 누구라도. 한 번 더 걸리면 칼끝에 스친 목에서 피가 배어 나오는 정도로는 그치지 않을 거라고 일러주었지.”
“아.”
맞다, 우리 레이몬드 악역이었지? 깜빡 잊고 있었네.
새삼스레 마주한 그의 자비 없는 손속에 등골이 서늘하면서도 통쾌함을 느꼈다.
비록 껍데기는 악역이지만 알맹이는 완전히 정의의 사도잖아?
대공의 발자취에서 의적이었던 홍길동의 향기가 물씬 느껴졌다. 이런 사람이 악역 취급을 받는다니 정말이지 통탄스러웠다.
그나저나 이제는 대공이 내 예언능력을 믿어주려나?
“대공님. 이제 증거는 충분하신가요?”
“흐음.”
그러나 의외로 그는 얼른 대답이 없었다. 잠시 턱을 매만지던 대공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하나만 더 보여줄 수 있을까?”
입술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흘러나온 건 증거를 더 원한다는 말. 하지만 그의 바뀐 말 속에는 신뢰가 바탕에 깔려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좋아요. 원래 삼세번이니까!”
내 경쾌한 대답에 대공이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그게 뭐지?”
“그런 게 있어요.”
나는 웃으면서 대충 얼버무렸다.
이후 대공은 내게서 총 다섯 번의 증거를 요구하고 나서야 “이제 되었소.”라며 멈추었다.
나를 믿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백성들을 돕고 싶어서 그런 듯했다. 그의 의중을 이해했기에, 그 시간들이 힘들고 지루하기보다는 기쁘고 즐거웠다. 정말이지 세상에 다신 없을 멋진 악역이라니까!
다섯 번째 증거에 대해 설명하고 난 날. 오늘은 또 어떤 적절한 핑계를 대고 대공과 시간을 보낼까 고민 중이었던 나에게 웬일로 그가 먼저 제안을 해왔다.
“공녀. 나와 어디를 좀 가지.”
“네? 네, 그래요.”
최애가 가자는데 당연히 가야지, 암.
나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면서도 기꺼이 그를 따라나섰다.
그런데 의외로 대공이 걸음을 멈춘 곳은 길거리였다.
문을 닫은 상점들 앞에 나무로 된 간이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었는데, 멀리서 보니 알록달록한 원색들이 축제를 펼치는 중이었다. 대체 저것은 뭘까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테이블 위에는 잡지에서 보았던 하리네 가게의 디저트들이 잔뜩 차려져 있었다.
“아니 이건!”
나는 눈앞의 것들을 믿을 수 없어서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이게 다 무어람?!
“밤에만 만나서 디저트 점에는 갈 수가 없으니 낮에 미리 사다 두라고 시켜두었소.”
깜짝 놀란 내게 대공은 쑥스러운 듯 앞만 쳐다보며 넌지시 설명해주었다.
세상에나. 이런 세심함이라니….
여러분. 이것 좀 보세요! 이걸 보시라고요. 우리 최애가 이렇게나 사랑스럽답니다!!
감격에 젖은 나의 마음을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포옹? 뽀뽀? 키스?
다 부족할 것 같았지만, 무척이나 안타깝게도 저 중에서는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절제하지 못할 두 손을 서로 감싸 쥐어 나의 가슴께에 꼭 붙였다.
“대공님.”
“크흠. 별 것 아니오. 애써주고 있는 것에 대한 보답이니까. 어서 앉아 드시오.”
내가 눈빛으로 온 애정과 감사를 쏘자, 대공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더더욱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딸기처럼 붉어진 그의 귓등이 보였다.
그렇단 말이지? 대공이 나를 위해 차려준 디저트 상인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드시오.”
나는 의자에 앉아서 현란한 포크 질을 시작했다.
디저트는 잡지 책에서 본 것처럼 예쁘고 또 맛있었다. 하나하나가 액세서리처럼 정교한 모양을 내고 있으면서도, 무작정 달기보다는 깊은 풍미가 느껴졌다.
“이렇게 신기한 맛이라니. 인기가 괜히 많은 게 아니네요.”
나는 연신 찬사를 늘어놓으며 혀끝에 모든 감각을 집중시켰다.
그런데 한창 맛보며 즐기고 있을 때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대공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차차. 내가 또 나만 먹고 있지. 사람을 앞에 두고 저 혼자 처먹다니 예의가 없어!
나는 가슴 깊이 반성하며 얼른 한 조각을 집어다가 대공의 입술에다 갖다 대었다.
“엇?”
“아, 하세요.”
그는 당황하여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군말 없이 입을 벌렸다.
아이고. 우리 최애 잘 먹는다.
그리고 이건 절호의 기회다! 나는 잽싸게 포크를 회수하여 내 입에다가 곧장 집어넣었다. 이 때다, 간접키스!!
그러자 대공의 눈동자가 실시간으로 마구 흔들리는 게 포착되었다.
아. 너무 대놓고 했나. 디저트라도 꽂아 넣을걸.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고 후회는 없고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디저트 정말 맛있어요. 대공님. 고마워요.”
곤란할 땐 분위기 전환이 최고지.
내가 일부러 더 환하게 웃음을 짓자, 대공의 눈동자는 지진을 멈추고 황당한 기색이 사라졌다. 그 대신 꽃이 피어나듯이 얼굴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이제 간접키스 사건은 대공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힌 듯했다.
분위기 전환 대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