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우리는 야시장이 열린 길거리로 나섰다. 야심한 시각인데도 술집 안처럼 바깥도 사람들로 여전히 복작복작했다. 주로 먹는장사가 늘어서 있는 거로 보아 일종의 포장마차 같았다.
밤이지만 낮과 같은 활력에 절로 신나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대공과 함께 걷는 야시장 길은 꽤 낭만적이었다.
시장길을 조금 벗어나자 평민들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이 나왔다. 내 기억에 따르면 키 작은 나무와 그것과 같은 높이의 초록색 우편함이 나란히 서 있는 집이었다.
“바로 저기예요.”
“?”
대공의 의문이 담긴 시선이 내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저 집의 아비는 장사가 잘되지 않아 귀족한테 돈을 빌렸어요. 반강제로 말이죠.”
“고리대금인가 보군.”
“맞아요. 이자를 갚는 것조차 여의치 않아 곧 첫째 딸이 끌려갈 예정이에요. 그 사실은 귀족과 아비 그 둘만 알아요.”
“흐음.”
대공은 내 말을 경청하며 미간을 구겼다.
귀족들이 버젓이 고리대금업을 하도록 용인해준 것이 바로 황제였다. 고리대금은 폭정의 일부로, 이것은 선대 황제로부터 시작된 악습이었다. 중요한 것은 현 황제인 카일 역시 전혀 끊어낼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루슬로 대공이 칼을 갈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지금은 늦었으니 내일 날이 밝으면 확인해보겠소.”
“네. 그러시는 게 좋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공녀. 그러면 내 다시 엘리자베스, 아니 옥희를 통해 연락을 드리겠소.”
대공은 발걸음을 돌리며 내게 말했다. 볼일이 끝났으니 그만 나를 돌려보내려고 했다.
“저기. 대공님.”
“?”
그러자 다급해진 나는 다짜고짜 대공을 불렀다. 그는 눈을 말똥말똥 뜬 채로 뭔가 할 말이 있느냐는 눈빛을 보냈다.
내가 레이몬드에게 할 말이 뭐가 있겠어요. 사랑해요? 멋있어요? 나랑 연애할래요?
그 어떤 것도 적합하지 않자, 그나마 가장 상식에 가까운 차선책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있어 아주 급하고도 중요한 사안이었다.
“저랑 같이 놀아요!”
“같이… 놀자고?”
전혀 예상 못 한 말이었는지 대공은 대놓고 황당해하는 낯빛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그를 향해 이유를 되는대로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네. 밤공기도 좋고, 백성들이 지내는 모습을 보는 것도 공부가 될 것 같아요. 게다가 납치사건 때문에 경비가 엄청 삼엄해져서 정말 오랜만에 바깥에 나왔거든요. 이대로 들어가기는 너무 아쉬워서요.”
말하다 보니 의도치 않게 대공의 양심을 콕콕 건드린 것 같은데, 정말이지 나이스한 샷이었다. 그는 급기야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고개를 여러 번 끄덕거렸다.
“그대의 말이 맞는 것 같소만, 시간이 늦었는데 괜찮겠소?”
“물론이죠. 당연하죠. 안 되면 시간을 붙잡아서라도 놀아야죠!”
나는 아주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대공은 곧 허락을 입에 담았다.
“그럼 좋소.”
야호! 나는 기쁜 나머지 하마터면 펄쩍 뛸 뻔했다.
이것이 현판이라면 귓가에 이런 게임 알림음이 들려왔을 것이다. [레이몬드 루슬로와의 데이트를 획득했습니다.]
속으로는 내 영혼이 기쁨의 댄스를 추고 있었지만 나는 아주 차분하고도 우아한 미소만을 지어 보였다.
내 얼굴을 본 대공의 표정으로 보아 성공한 지는 미지수였지만. 어쩌면 내 눈코입이 대신 댄스를 추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저기에요, 우리 저거 먹으러 가요!”
나는 대공의 팔을 이쪽저쪽으로 잡아끌었다. 처음에는 분명 그와 보내는 시간에 집중했는데, 어느샌가 길거리 음식 섭렵하기로 콘셉트가 바뀌어있었다.
야시장이라지만 늦은 시간이라 열려있는 가게들이 많이 없는데도 먹는 것마다 족족 맛있었다. 마치 여행을 온 것처럼 들뜬 기분이었다.
이번에 먹게 된 음식은 고기와 과일이 긴 꼬챙이에 번갈아 가며 꽂혀있는 꼬치. 냄새가 어찌나 좋은지 아까부터 출처를 찾느라 발이 바빴다.
“얼마요?”
“10 포비입니다.”
대공이 값을 치르는 동안 나는 옆에서 입맛을 잔뜩 다시고 있었다. 마치 간식 앞에서 기다려!하고 있는 한 마리의 강아지 같았다.
백성들을 살필 줄 아는 루슬로 대공은 백성들 사이에 아지트가 있는 만큼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화폐 단위를 지니고 있었다. 어차피 나는 빈털터리로 왔기에 그에게 얻어먹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 정도는 사줄 수 있겠지?
“여기 드시오.”
“고맙습니다.”
나는 대공에게서 받아든 꼬치를 들고서 하나씩 야무지게 빼먹었다. 과일의 풍미를 껴안은 고기는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어찌나 맛있는지 스테이크 집에서 먹는 값비싼 고기 열 접시가 부럽지가 않았다.
맛에 취해 신나게 먹다가 문득 나를 보고 있는 대공의 시선을 느꼈다. 한 입 나눠줄까 싶어서 그를 향해 내밀었다.
“대공님은 안 드시나요? 엄청 맛있는데.”
“나는 되었소. 공녀 혼자 다 드시오.”
“진짜요? 후회 안 하실 거예요? 이거 엄청 맛있는데.”
나는 놀리듯이 그를 살살 꾀어내었다. 사람이란 자고로 배부르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누군가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나도 먹어볼까 싶기 마련이니까.
내 생각이 적중했는지 대공은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때다! 나는 팔을 쭉 뻗어서 꼬치를 그의 코앞에다가 갖다 대었다. 누구라도 갓 구운 고기 냄새를 맡는다면 참을 수 없는 법이지.
“어서요.”
“그럼 한 입만…?”
결국 본능이 손을 들었는지 대공이 고기와 과일 짝꿍을 입에 한꺼번에 물었다. 입으로 뜯어먹는 그 모습이 귀여워 하마터면 꼬치가 아닌 그를 깨물어줄 뻔했다.
대공은 그것을 오물오물 야무지게도 씹더니 꿀꺽하고 삼켰다.
오구오구 잘 먹는다. 우리 대공.
최애의 먹방은 봐도 봐도 즐거운 것이지.
지루한 시간은 달팽이처럼 기어가고 즐거운 시간은 눈 깜짝할 새에 증발해버렸다. 황제랑 있을 때는 1초, 2초가 의식되어 숨이 턱턱 막혔는데, 대공이랑 있으니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기만 했는데도 시간이 끝나있었다.
하아….
그와의 이별에 한숨부터 나왔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지난번과는 달랐다. 대공은 내가 던져놓은 예언을 확인한 다음에 곧바로 부른다고 했으니까.
어서 확인하고 불러줘요.
나는 간절한 바람을 그에게 전달하는 대신 마음속으로만 외쳤다.
“공녀. 잘 가시오.”
대공과 인사를 나눈 나는 이곳에 왔을 때처럼 코아의 뒤를 따랐다. 아스라이 멀어지는 그의 표정만이 잔상처럼 심장에 찍혔다.
***
그리고 우리는 다음 날 다시 만났다.
대공은 일 처리가 아주 빨랐고, 그 사실에 내게는 매우 흡족했다.
님을 만나러 가는 길 발걸음도 가벼워라!
코아를 뒤따라가는 내 걸음은 아주 경쾌했다. 무릎이 올라갈 때마다 닿는 구간도 날아가듯이 높았다.
얼굴도 보고 일도 하고 신뢰도 쌓고 데이트도 하고, 이런 일석사조라니 대환영이야.
아지트에 도착하자마자 대공은 내게 급히 이 말부터 꺼냈다.
“그대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소.”
그는 약간 흥분되어 있는 상태였다. 어서 말해주고 싶어 하는 모습이 아이같이 천진난만했다. 이에 나는 다 안다는 듯이 어른스럽게 차분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공교롭게도 오늘이 그 큰딸이 잡혀가는 날이었소.”
“세상에나. 정말요?”
하루만 늦었어도 소용없는 짓이 될 뻔했구나.
원작소설에는 정확한 날짜까지 나오지 않았기에 대략적인 시기만 알 수 있을 뿐이고, 아슬아슬하게 맞아떨어진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 집안에 닥친 안타까운 불행. 그 일의 1차적인 원인은 고리대금업을 한 귀족이고, 2차적인 원인은 그 모든 것을 묵과해주는 황제였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대공은 내게 자리를 권한 후에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
.
.
탕탕.
정오가 다가오는 오전 시간. 레이몬드가 평민 집의 문을 두들기자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새치로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남자는 그를 보자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다.
“누구십니까?”
목소리가 떨리는 거로 보아 필시 잘못을 저지른 사람 같아 보였다. 레이몬드의 깔끔한 차림새를 보며 잔뜩 날을 세우는 듯했다.
“물어볼 말이 있어 찾아왔어.”
“아. 예에. 물어보십시오.”
남자는 그의 말을 듣자 다소 경계를 푸는 눈치였다.
“집에 큰 빚이 있나?”
“아니. 그걸 어떻게… 역시 스펄 백작님께서 보내셨습니까? 지…지금 제 딸을 데려가실 건가요?”
다시 짐작이 엎어졌다.
남자는 돈을 빌려준 귀족이 보냈구나, 넘겨짚다가 아닌 줄 알고 안심했는데 다시 긴가 싶어진 것이다. 지금 당장 자신의 큰딸을 끌고 갈까 봐 두려웠는지, 문을 붙잡은 남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자 무슨 일이 있음을 감지한 식구들이 하나둘씩 현관문으로 튀어나왔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아빠. 이분은 누구예요?”
그의 부인과 딸들이 다가와 묻자, 남자는 제 식구들을 보호하려는 듯이 몸으로 막아섰다.
그것이 귀족을 상대로는 어림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부성애가 그렇게 만들었다.
‘스펄 백작이었군.’
대공은 고리대금업자의 정체를 되뇌면서 눈앞의 가장을 보았다.
부하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남자는 처음에는 운이 조금 나빴을 뿐이다. 장사치로 평생을 성실히 일했는데 팔고 있던 물건의 가격이 오르는 바람에 가게가 잠깐 어려워진 거였다. 여기까지가 주변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틈을 귀족이 파고들어 높은 이자의 돈을 빌리게 하고, 기간 안에 갚지 못하자 딸을 데리고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일은 오직 스펄 백작의 측근과 남자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진정하지. 내가 도와주려고 왔으니.”
“도…도와주신다고요? 귀인께서요?”
“그래. 내가 빚을 다 갚아주지. 그러니 안심하고 평소처럼 살아가면 될 거야.”
남자는 어안이 벙벙하여 “어째서….”라는 말만 연발했다. 식구들이 “여보. 빚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빠가 아는 분이셨어?”라며 질문들을 쏟아내는데도, 그는 하나도 귀담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대공이 돌아서서 몇 걸음을 딛자, 그제야 남자가 정신을 차리더니 달음질을 쳐서 따라왔다.
“귀인! 귀인!”
남자는 대공이 사라지기 전에 가까스로 그를 따라잡았다.
“어째서 이리도 큰 은혜를 베푸시는 겁니까?”
레이몬드는 몸을 돌려, 헐떡이며 숨을 고르는 남자를 가만히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귀족의 잘못을 귀족이 거두려는 것뿐. 다른 뜻은 없어.”
“그렇다면 귀인의 성함이라도 알려주시지요. 귀인의 은혜를 가문 대대로 뼈마디 하나하나에 새기겠습니다.”
“괜찮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대공은 그리 다독이더니 다시 몸을 돌려 길을 떠났다.
“고…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대차게 뒤돌아서는 모습에서 일말의 여지도 보이지 않아서일까.
붙잡기를 포기한 남자는 멀어지는 대공의 등에다 대고 큰절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