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다음 날 자정.
대공은 나를 데려가기 위해 사람을 보내왔다.
공작 저에도 나름의 호위들이 있건만, 호위망이 뚫렸는데도 아무도 모른 채 저택은 고요했다. 가드들이 엄연히 내 방 주위에 포진해있는데도 말이다. 정치계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과는 기본실력부터가 다른 것 같았다. 그곳은 소리 없는 전쟁통이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안녕하십니까. 대공 전하의 수하인 코아입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대공이 보내온 사람은 여자였다.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는 올블랙 차림에 붉은색의 긴 머리는 포니테일 스타일로 높게 묶은 모습으로, 난간을 타고 그림자 속에 숨어들어왔다.
무엇을 입어야 하나 온종일 고민하던 나는 결국 눈에 띄는 화려한 드레스 대신에 운동할 때 입는 가벼운 활동복을 착용했다. 눈에 띄는 분홍색 머리칼도 모자 속에 꼭꼭 감추었다.
코아는 그런 내 차림새를 보며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치렁치렁한 차림이면 몰래 데리고 나가는 데에 많이 곤란했을 테니까.
“제 어깨에 팔을 두르시지요.”
나는 낯선 여인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코아는 내 허리를 붙잡고서는 새처럼 날아오르듯이 테라스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나를 안은 코아는 휙휙 몇 번 발돋움을 하더니 그 넓은 공작 저를 순식간에 빠져나왔다.
우와. 멋있어 언니.
내가 속으로 감탄하고 있자 근처의 숲에 몸을 숨긴 코아가 내 몸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공녀님. 저와 조금만 걸으시지요.”
“네. 알겠어요.”
그녀는 작게 숨을 헐떡이며 안내를 위해 앞장서서 걸었다. 그리고 5분 정도 걷자 거리의 뒷골목이 나왔다.
여기는 대공의 아지트로 가는 지름길이야.
나는 원작소설에서 본 지도가 떠올랐다.
공작 저 옆의 숲을 가로질러 나가면 백성들이 이용하는 커다란 시장 거리가 나온다. 그 시장에 대공이 자주 이용하는 아지트가 숨겨져 있었다.
코아는 몇 발자국 더 걷더니 한 허름한 술집의 뒷문을 열었다. 저쪽에서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배경음처럼 흘러나왔다. 자정이 넘은 시간임에도 술자리가 한창인가보다. 그녀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가더니 가장 끝 방을 두드려 문을 열고서 나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대공 전하. 공녀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코웻 공녀.”
그리고 그곳에는 꿈속에서도 그리워 마지않았던 나의 최애 레이몬드가 앉아있었다. 여전히 실크 같은 흑발과 명철함을 담은 푸른 눈동자가 매혹적으로 빛나는 그였다.
대공은 내 존재를 인식하자마자 일어서서 다가왔는데, 나는 하마터면 달려가 그를 껴안을 뻔했다.
안고 나서 서양식 인사법이라고 하면 안 될까?
그러나 심호흡을 하며 가까스로 충동을 억누르고는 그에게로 사뿐히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대공님.”
나는 마치 드레스를 입고 있는 것처럼 옷자락을 집게손가락으로 잡아 올리며 인사했다. 그를 만나고부터 한 번도 정식으로 인사를 하지 않았기에, 한 번쯤은 꼭 해보고 싶었다.
대공은 살짝 멈칫하더니 “어서 오시오.”라는 말로 나를 자리에 앉게 했다. 아마도 나의 우아한 가상의 드레스 자태에 놀란 게 아닌가 싶었다.
“내 부탁을 이리 일찍 들어줄 줄은 몰랐소.”
그는 진심인지 인사치레인지 모를 말을 내놓았다.
누가 부르는데 당연히 달려와야지요.
실은 레이몬드가 나를 불러주었다는 것이 너무 고마워서 뽀뽀라고 하고 싶었지만, 순전히 내 욕심임을 알기에 스스로를 달래었다.
옥희가 오고 바로 그다음 날로 약속을 정했으니 사실 시기가 이르긴 일렀다. 하루빨리 레이몬드가 보고 싶은 나의 바람이 깃들어있는 날짜 선정이었으니까.
“어려운 것도 아닌걸요. 게다가 제게 좋은 선물을 주셨잖아요. 옥희가 정말 귀엽더라고요.”
“옥희?”
“네. 올빼미 전령사요. 이름이 없는 것 같아서 제가 지어줬답니다.”
“아.”
내 말에 대공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어렵사리 입술을 떼었다.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이 있는데….”
“이름이 있어요? 아….”
엘리자베스라고? 그렇게나 우아한 이름이라니. 옥희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잖아?
“옥희가 아니라 엘리자베스구나….”
내가 실망한 낯빛을 보이자 대공은 즉시 말을 바꾸었다.
“아니오. 지은 지 얼마 안 된 거라 바꿔도 괜찮을 듯싶소. 공녀의 것이 더 좋은 듯하오.”
“어머. 정말요?”
나는 기뻐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예전부터 반려동물을 키워보고 싶었는데 꼭 그 소원을 이룬 것 같아 행복했다. 내 전용 올빼미는 아니었지만, 바로 곁에서 보고 말도 걸 수 있으니까.
“엘리… 아니, 옥희 그 아이에게 물을 주어서 고맙소.”
“그리 당연한 걸 고마워하시나요.”
나는 열심히 물을 마시던 귀여운 옥희가 떠올라 흐뭇해졌다. 대공은 그런 나의 기꺼움이 기뻐 보였다.
그는 목소리를 크흠, 하고 가다듬더니 앉은 자세를 한층 더 바르게 고쳐잡았다. 아마도 이야기의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것 같았다.
“공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네. 말씀하세요.”
“카르고에 대해서 어떻게 아셨소?”
대공은 스스로가 물으면서도 긴장이 되었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목울대가 울렁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당연히 이 순간이 올 것을 예상했다.
자신의 부하가 자신을 해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제삼자에게서 전해 들었는데 그 누가 궁금하지 않으랴.
대답을 해주는 것 자체는 어려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대공이 이후에 황제가 도모할 일들을 피하기 위해서는 나를 믿게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하면 내 말이 설득력이 있어 보일까?
내가 믿는 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신력’에 관한 것이다.
나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대답을 꺼내 놓았다.
“저에게는 예지능력이 있어요.”
“예지력 말이오?”
“네.”
차분히 대답하는 나의 말에 대공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약혼녀라는 지위를 고려해봤을 때 황제의 이야기를 엿들었다거나, 혹은 우연히 카르고와의 밀회를 엿본 게 아닐까 생각했을 텐데 생뚱맞게도 예지라니?!
하지만 엉뚱한 대답은 오히려 믿음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게 내가 믿는 지론이다.
만약 내가 황제의 측근으로서 대공에게 정보를 넘겨주었다면 그 첫 번째 의심의 대상은 당연히 나일 테니까. 처음에는 도움을 주는 척하다가 후에 덜미를 붙잡으려는 계획이라고 여긴다면 신뢰는커녕 경계심만 부추기는 꼴이 될 수 있었다.
“예지라니. 구체적으로 말해주시오.”
“저의 예지능력은 꿈으로 와요.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볼 수는 없으나 정확한 편이지요.”
“그렇다면 그대의 꿈속에서 카르고가 나를 배신했단 말이오?”
“네. 정확히 말씀드리면 카르고가 대공의 스케줄을 넘기는 바람에 황제 쪽에서 대공을 해쳤어요.”
“…허.”
대공이 헛웃음을 지었다. 저 웃음의 의미가 놀라움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았다.
카르고가 넘기려고 했던 것이 자신의 스케줄이라는 것은 정확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대의 말 그대로요. 카르고는 나를 배신했소.”
“그래서 어찌 됐어요? 다친 곳은 없으세요?”
깜빡 잊고 있었던 사실이 이제야 떠올랐다. 아무리 내가 조언을 해줘봤자 상대가 듣질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나는 눈으로 대공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특별히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그가 내 말을 믿었다는 것.’
“그렇소. 그대의 조언대로 증거를 잡아 간자임을 확인했다오.”
“휴우. 다행이에요.”
나는 정말로 안심이 되어 가슴께를 쓸어내렸다.
대공은 무사했고 그의 세력 전체가 쇠락의 길에서부터 빠져나오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대공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는 노력이 보였다.
“솔직히 쉽게 믿어지진 않는군. 도움을 주었는데 미안하오.”
“아니에요. 대공님 입장에서는 당연한 거지요. 저라도 그럴 거예요. 이해해요.”
“혹 그렇다면 내게 증거를 보여줄 수 있겠소?”
“물론이지요.”
나는 어려울 것이 없다는 태도로 기꺼이 대답했다.
내게는 마침 소설에서 읽었던 백성들에 대한 곁가지 이야기들이 있었다. 모두 황제의 폭정에 의한 것으로, 예언의 증거로 들이밀기에 적당한 것들이었다.
대공은 그 사실에 깊이 안도했는지 시선을 똑바로 마주쳐왔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가능하겠소?”
그의 푸른 눈동자 속에 용솟음치는 기대와 희망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화답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오롯이 있는 것이다.
“지금 바로 할까요? 마침 근처에 예지를 받은 백성의 집이 있어요.”
나는 그리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안내를 하기 위해 앞장서려는데, 그 순간 따라 일어난 대공이 돌아서는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예기치 못한 행동에 놀란 나는 그대로 굳어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키 차이가 제법 났지만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혔다.
“한 가지가 더 있소.”
그는 진지한 눈동자를 빛냈다. 마치 나를 꿰뚫어 보려는 듯 집요했고 묻는 음성 속에는 아주 미세한 떨림마저 담겨있었다.
“그대는 황제의 사람이 아니오? 어째서 내게 이런 것들을 알려주는 거요?”
아까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진실을 이야기할 순 없었다. 사실 이곳은 소설 속이고 당신의 삶을 지켜보아 왔습니다, 라고는…. 그렇기에 나는 대답을 들려주는 대신 되묻는 쪽을 택했다.
“대공님은 제가 황제의 사람처럼 보이세요?”
나는 차분하고도 낮은 음성을 내었다.
이것은 진실이기도 하고 진심이기도 했다. 우리는 잠시 서로의 눈동자를 말없이 응시했다.
대공이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원초적인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미약한 발버둥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는 나의 모호한 답변을 듣고도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