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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13화 (13/125)

13화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마음에 드신다고요???

혹시 실수로 ‘안’ 자를 빼먹은 거 아니세요?

기다리던 말과는 정반대의 말이 나오자, 그 말을 도로 황제의 입안으로 집어넣고 싶었다.

남주의 매력은 나만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 되는 거 아니었나.

나는 예상을 벗어난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

원작소설에서 황제는 에일린을 버린다.

내가 거울을 볼 때마다 발견하는 이 요정같이 아름다운 에일린을 말이다.

그는 최고 권력자에다 절세미남이라 레이디들이 줄을 섰으니 아쉬울 게 없을 터였다.

게다가 나중에 황제를 개과천선 시키는 여주인공은 앞에도 언급했지만 글래머러스한 여인이었다. 아무래도 카일이 그런 타입을 좋아하는 거겠지. 그런 여주에게 홀딱 빠지다 못해 성군으로 거듭나기까지 하니까.

황제의 취향은 나처럼 한결같은 소나무인가 봐. 나에게는 참 다행한 일이야, 그렇게만 생각했었는데….

내가 마음에 들었다니? 마음에 든다고? 정말?

나는 믿기지 않는 현 사태를 마주하자 멘붕이 오고 말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생각을 해보려 했지만 원인을 찾으려니 처음부터 끝까지 걸리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대공의 목숨을 살리자고 결심했다. 내가 이 소설 속에 빙의한 이유가 그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 그래서 대공을 죽은 것으로 위장해서 빼돌리고 기왕이면 같이 도망가 함께 여생을 보내는 게 나의 황금 같은 계획이었다.

내 계획은 그랬는데… 분명 가능하다 여겼는데….

그랬기에 계획을 비틀어버리는 저 발언은 가히 핵폭탄이었다.

황제가 나에게 관심을 갖다니, 이러면 내 시나리오에 차질이 생기는데……!

놀란 마음을 감추기에는 너무 드러내 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어떤 식으로든 수습을 해야 했기에 나는 동그래진 눈을 옆으로 길게 빼는 것을 택했다.

“그러시군요. 고맙습니다.”

내가 눈가를 곱게 접자 황제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그대를 에일린이라고 불러도 되겠소?”

황제의 직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공녀라는 직함이 아닌 에일린이라는 이름을 부른다는 건 누가 봐도 가까워지자는 뜻.

허락을 구하는 형식이었지만 사실상 명령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야 당연하지. 발언자가 누군데.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제국의 황제가 아닌가. 어떻게 거부할 수가 있겠어.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 닥치고 말았다.

이래서 원작의 에일린이 처음부터 철벽을 친 걸까?

황제한테 내쳐짐을 당하고만 가여운 여인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그녀는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철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세게 나갈 필요가 있겠구나 싶어졌다.

“폐… 폐하. 저희 사이가….”

‘저희 사이가 좀 더 깊어지면 그리하시지요.’라고 하려고 했는데 거절의 말이 쉽게 튀어나오지 않았다.

뜸을 들이고 있자 그는 유혹하는 남주의 전매특허 포즈로 한 번 더 밀어붙였다.

“우리 사이가…?”

황제는 조각 같은 얼굴을 내게로 불쑥 내밀었다. 느른하게 내리깐 눈과 조르듯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런 얼굴로 말하는 건 반칙이잖아?!

에일린. 정신 차려!!!

가슴의 내적 외침에도 불구하고 나의 뇌는 소설의 등장인물 쪽으로 기울었다. 내 입술은 온전히 뇌의 조종을 받아서 움직였다.

“가까워진 것 같아… 좋습니다.”

“그렇소? 하하.”

황제는 예의 그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표현하진 않았지만 어쩐지 ‘그대가 허락해주니 한결 기분이 낫군.’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망상을 넘어서 이젠 독심술까지 노리냐?

이런 나 자신이 미웠지만 이젠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버렸다.

***

햇살이 따뜻한 날.

나는 공작 저 2층의 내 방에 머물러있었다.

공작 저로 돌아온 나는 부모님의 과보호 아래, 방 안에 있을 때를 제외한 모든 시간에 호위를 대동했다. 물론 방에 있을 때는 호위들이 나 대신 내 방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그러니 혼자 있으려면 무조건 방 안에 있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지켜줬으면 하는 것은 내 몸의 안위 따위가 아니었다.

저 미친 황제로부터 날 건져줘! 그게 날 지키는 거라고!

현재는 안전한데 미래가 안전하지 않았다.

나는 명실공히 예비 황후의 자리를 닦아가고 있었으니까….

와. 미쳤다 미쳤어!!!

다른 소설이었다면 이것은 해피엔딩으로 가는 발걸음이자 디딤돌.

그러나 황제가 정상이 아닌 이곳에서는 모두가 파멸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이쯤에서 인정해야 했다. 원작의 에일린이 얼마나 지조 높은 성품의 소유자였는가를.

나란 존재, 갈대 새끼야….

모진 소리도 못 하고 황제가 하자는 대로 다 휩쓸려가고 있어.

이대로라면 원작보다 못한 진행이 될 수도 있었다.

황제는 황제대로 폭정을 지속하고, 대공은 처리되며, 나는 황제의 발닦개가 되는….

안 돼! 그럴 순 없어.

여기까지는 여차여차 휩쓸려왔다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해.

무엇보다 대공을 무사하게 생존시키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

이렇게 결심을 하고 났더니 문득 대공이 떠올랐다.

나의 최애 레이몬드. 그는 카르고의 간자질로부터 무사하겠지?

그러고 보니 황제가 다음 함정을 파고 있을 텐데 그것에 대해 알려줄 방법이 고민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공작 저에 거의 감금되어있다시피 한 상태고, 억지로 밖으로 나간다 해도 호위가 잔뜩 따라붙어서 대공을 만나기가 힘들 테니까.

그렇다면 대공한테 어떻게 전달해줘야 하지? 어떻게 연락을 취한담?

막 그런 고민이 들 때쯤, 때맞춰 공작 저로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야심한 시각.

생각이 많아 유난히 잠이 오지 않은 밤. 마법으로 된 등을 켜고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멀리서 야행성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간혹 들렸던 것이기에 아무 생각이 없었으나 왜인지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때 창을 톡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커튼에 새 형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뭐지? 정말로 날 찾아온 건가?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다가가 커튼을 살짝 걷었다. 그러자 창틀에는 눈이 동글동글한 올빼미 한 마리가 앉아 나를 빼꼼히 바라보고 있었다.

귀…귀엽잖아!

올빼미는 크기가 중형급인 새라 한 마리가 40cm에 달한다. 하지만 귀여운 것은 세상을 더 넓게 차지하는 게 옳다. 크기가 크다고 귀엽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으니까.

나는 서둘러 이 귀여운 손님을 맞이했다.

부딪치지 않도록 창문을 열자 올빼미가 그 틈을 통과해 얌전히 방안으로 들어왔다.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온 거니?”

올빼미가 대답할 리가 만무하지만 뭐라도 말을 해야 소통이 될 것 같았다.

그러자 흰색과 갈색 털이 뒤섞인 이 아이는 꼭 말귀를 알아들은 것처럼 발차기를 하듯 자신의 한쪽 발을 앞으로 척 내밀었다. 내민 짤막한 왼쪽 다리에는 쪽지가 묶여있었다.

“엇? 알고 보니 너 전령사였구나?”

올빼미는 자랑스러운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사람이 변신했다고 해도 믿을만한 행동이었다.

나는 혹시나 올빼미가 놀랄까 쪽지를 다리에서 조심스럽게 풀었다. 돌돌 말린 종이를 꾸역꾸역 열어보니 반가운 이름이 눈에 띄었다.

쪽지의 발신인은 루슬로 대공이었다.

앗. 레이몬드다!!

귀여운 전령사가 전한 내 님의 쪽지는 기분을 한껏 들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는 황제의 서신을 받들 듯이 경건한 마음으로 한 자 한 자를 곱씹어 읽어내렸다.

[무탈히 잘 지내시오? 공녀.

그대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올빼미를 보내었소.

그전에 우선 공작 저까지 날아가느라 힘이 들었을 테니 그 아이에게 물을 주었으면 좋겠군.]

이 대목까지 읽고 나자 당장 테이블로 가 주전자에 든 물을 컵에다가 부어서 돌아왔다. 그리고 올빼미에게 내밀자, 녀석은 주둥이를 살짝 집어넣고 부리를 깔짝이며 물을 마셨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작게 속닥거렸다.

“네 주인은 이름도 안 지어줬나 봐. 내가 지어줘야겠는걸? 가만있어 보자. 뭐가 좋을까?”

나는 턱을 두드리며 잠시간 고뇌했다.

대공이 부르면 내가 오키! 외치며 무조건 달려갈 테니까 옥희 어떨까? 오오, 괜찮은데?

옥옥, 하고 우니까 옥희! 오. 내 작명 센스 장난 아닌데?

마음에 결정을 내린 나는 그 사실을 즉시 올빼미에게 말해주었다.

“넌 이제부터 옥희야. 이 언니가 옥희라고 불러줄게.”

나는 옥희를 보며 싱긋 웃었다.

옥희는 왠지 내 말을 들은 것 같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지만, 순전히 내 기분 탓이겠지.

나는 쪽지를 마저 읽었다.

[다름이 아니라 공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직접 만났으면 좋겠소.

그대의 납치 일로 인해 경비가 삼엄할 거라 예상되오. 그러니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이 어떻겠소? 허락만 한다면 사람을 보내어 데리러 가리다. 그대의 답변을 기다리겠소. 답장은 받았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해주시오.]

눈이 왕방울만 해진 나의 시선은 오직 한 부분에 머물렀다.

직접 만났으면 좋겠소. 만났으면 좋겠소. 만났으면.

만나자고? 대공이 나한테 먼저 만나자고 하다니! 대공을 만날 수 있다!!!

나는 만세를 외치듯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소리 없는 환호성을 외치며 입 모양으로만 고성을 발사했다.

그 만남이란 당연히 정치적인 이유일 텐데도 마치 데이트 신청을 받은 것처럼 감격에 젖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대공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뭘 입고 나가지? 움직이기 편하면서도 예뻐 보일 수 있는 옷이 뭐가 있을까?

그렇게 한밤중에 무슨 옷을 입으면 좋을지 고민이 시작되려는데, 옆에서 방해가 들어왔다.

옥희가 나를 향해 재촉하듯이 울었다.

나는 그 소리에 정신이 확 들면서 겨우 망상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아차 알았어. 옥희야. 이럴 때가 아니지. 어서 답장부터 하자.”

나는 종이와 펜을 가져와 대공에게 보낼 답장을 부리나케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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