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디저트 타임은 그렇게 어영부영 넘어가고, 황제는 시간이 남아도는 건 아니었는지 데이트 일정이 끝나자마자 곧장 자리를 떴다.
“그럼 난 먼저 가보겠소, 공녀. 조심히 돌아가시오.”
“네. 폐하. 강경하세요.”
그리 말하고 시종을 따라 떠나가는 그는 뒤를 돌아볼 여력조차 없어 보였다.
나는 멀어지는 황제의 등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마차를 타고 다시 공작 저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마차의 창밖으로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노을이 지고 있는 걸 보아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되어가나 보다. 잠깐 들렀다가 돌아가려고 했는데 하루를 꼬박 황제와 보내버렸다.
레이몬드는 잘 있을까?
황제 앞에서의 가식 연기로 인해 지친 마음은 최애를 떠올리면서 위로를 받았다.
황제와 대공.
두 사람의 머리칼은 흑발, 금발로 각자의 어머니 쪽을 물려받았지만, 벽안 만큼은 둘 다 아버지를 쏙 닮아있었다. 형인 선 황제와 동생인 선 대공처럼 말이다.
둘 다 소설의 메인 캐릭터라서 참 잘생기긴 했다. 한쪽은 화려함, 다른 한쪽은 차분함으로 스타일은 전혀 달랐지만.
과연 남주답게 황제의 매력은 위험했다. 설령 그 시커먼 속을 안다 할지라도 등장인물이 된 지금은 그에게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일 테니까.
그렇기에 내 마음을 스스로 단속할 수밖에 없었다.
흥. 절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야.
나는 주먹을 꽉 쥐면서 그렇게 다짐했다.
***
요즘 공작 저는 분위기가 소풍 전날처럼 아주 들뜬 상태였다. 황제가 틈틈이 나를 황성으로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줏대라고는 없는 내 성격 때문이었지만, 그 전에 에일린이 황제를 상대로 얼마나 철벽을 친지 몰랐던 본가에서는 너무나 고대하던 소식이었다.
“아가씨. 황제 폐하께서 어여삐 여기시니 외모를 더욱 잘 관리하셔야 합니다.”
클레어는 아래에 누워있는 내 얼굴에 얇게 썬 오이를 붙여주면서 단단히 일렀다. 그녀의 무릎을 베개 삼아 얼굴이 천장을 향해있던 나는 얌전히 팩을 받으며 두 눈만 끔뻑거렸다.
시원한 향내를 솔솔 풍기는 오이는 얼굴이 아니라 입에 넣어버리고 싶었지만, 클레어가 두 눈을 버젓이 뜨고 있었기에 침만 꿀꺽꿀꺽 삼켰다.
인상이 푸근한 아줌마인 클레어와 이제는 제법 친해졌다. 언니 같기도 하고 이모 같기도 한 그녀는 좋은 말동무였다. 특히나 수다쟁이라 맞장구만 잘 치면 쉽게 얻어낼 수 있는 정보가 짐 마차 한가득이었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폐하께서는 귀족들 두세 명을 차출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사냥을 나가신답니다. 거기서 잡아 온 산짐승들을 같이 사냥을 간 자들에게 선물로 하사하시지요.”
“호오. 선물이라니 좋네.”
“그렇죠? 더군다나 그 자리는 황제 폐하와 친분을 다질 수도 있는 기회라 많은 귀족이 같이 가고 싶어서 혈안들이랍니다.”
“폐하와 친해지면 좋은 게 있어?”
“물론이지요. 가까운 자들일수록 은혜를 입기 쉬우니까요.”
번역하면 저한테 잘 보일수록 백성들의 돈을 뜯어낼 비리를 더 많이 허락해준다는 뜻이지.
“폐하는 인기가 많으시겠지?”
“그럼요. 외모만 보아도 알 수 있잖아요? 제국에서 폐하에게 반하지 않은 여자는 아무도 없을걸요?”
그건 사실일 것이고, 이 세계에서 그 예외는 오직 나뿐인가 보다.
“또 얼마나 젠틀하신가요. 자상함이 양털처럼 포근포근하시지요.”
양털처럼 포근하다니? 사포처럼 거칠거칠하겠지.
하지만 클레어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는 본심을 감추는 데에 뛰어난 인간이고, 등장인물들은 주인공에게 후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
나는 아주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녀를 이해하려 했다.
“차갑고 냉정하신 루슬로 대공님과는 비교도 안 되지요.”
이 말을 하기 전까지는.
클레어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그 말을 강조했고, 그 모습은 미움을 넘어선 분노를 일으켰다.
덕후 앞에서 감히 최애를 욕해? 이건 도의적으로 선을 넘었어!
순간 흥분한 나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러자 수분을 빼앗겨 쪼글쪼글해진 오이들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어머나! 아가씨. 일어나시면 어째요.”
“클레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네? 제…제가 뭔가 실수를 했나요?”
씩씩거리는 내 반응에 깜짝 놀란 클레어가 기억을 더듬느라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어떻게 그런 터무니없는 비교를 할 수가 있어?”
“비교요? 아….”
클레어는 생각이 났는지 입을 벌리더니 별안간 눈을 초승달처럼 접었다.
“어멋. 아가씨도 참. 호호호호호.”
왜… 왜 웃는 거지?
“폐하가 그리도 멋있으실까. 대공 전하랑 비교했다고 화내시는구나? 알겠어요, 제가 잘못했네요. 호호호.”
클레어는 귀엽다는 듯 나를 어르고 달래었다.
아, 여기는 왜 다들 황제를 포인트로 잡는 거야?
하지만 나 역시 속으로 아차 싶었다. 여기서 대공 편을 들어서 어쩌려고.
최애를 최애라 말하지 못하는 내 입장을 화가 난 나머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기가 찼지만 별수 없다. 클레어의 오해를 오히려 감사해야할 판이니.
나는 속으로 가슴을 치며 어쩔 수 없이 다른 이야기로 넘겼다.
“패…팩은 이제 충분한 것 같네.”
“오. 그러네요. 얼굴이 뽀얘지셨어요.”
클레어는 수분을 가득 머금은 내 볼을 톡톡 두드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앞으로도 자주 오이 팩을 하도록 해요. 폐하는 인기가 아주 많으시지만 걱정마세요. 아가씨를 약혼녀로 선택했으니 폐하가 마음에 두고 계신 것 아니겠어요? 호호호.”
“그…그래.”
그녀는 내게 용기를 주기 위해 듣기 좋은 말을 뱉어내었다.
하지만 나는 겉으로는 동의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황제가 정말로 반한 진짜 여주인공인 아멜리아 소프는 에일린과는 전혀 다른 타입이다.
보라색 머리칼에 검붉은 눈동자를 가진 아멜리아는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끌릴 만큼 고혹적인 매력을 풍겼다. 서구적인 몸매의 소유자로, 특히나 가슴이 풍만했다. 두 주인공이 얼마나 뜨거운 밤을 보냈는지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염탐했기에 황제의 취향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마르고 여리여리한 에일린은 아니라고!
얼굴에 오이 같은 걸 붙여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게다가 나는 또 하나 아는 사실이 있었다. 황제는 에일린과 파혼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다는 것을.
원작에서는 납치사건으로 인해 콧대 높은 공녀가 자존심이 상하여 저택에서 두문불출하고, 황제는 그런 공녀의 순결을 확신할 수 없다며 파혼을 해버린다. 파혼하기 좋은 핑곗거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분명히 그랬는데 그래야 하는데…. 황제는 왜 나를 안 내치는 거지? 그럴 기간이 한참이나 지난 것 같은데?
원작과는 다른 황제의 반응은 내 안에 점점 의문을 휘몰아치게 했고, 그렇게 시름이 되어버려 완연히 여물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불안과 초조함이 극에 달할 때쯤, 황제는 한 번 더 나를 황성으로 불러들였다.
다그닥 다그닥.
“공녀님. 황성에 도착했습니다.”
이어지던 말발굽 소리가 멈추더니 마부가 친절하게 도착을 알렸다. 나는 몇 번 황성에 들락거렸다고 진작에 다 와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려서는 일전에 디저트 타임을 보냈던 넓은 테라스로 이동했다. 그곳에 도착해보니 황제가 미리 와서 앉아있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공녀. 어서 오시오.”
그는 소파에 앉은 채로 나를 맞이했지만, 지난번과 같은 거만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따라 가라앉은 듯한 분위기가 조금 우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오. 혹시 오늘 약혼을 파하자고 말하려는 건가?
나는 어두운 황제의 낯빛을 진심으로 반기며 설레는 마음으로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는 첫인사 때만 잠깐 나와 눈을 마주쳤을 뿐, 그 후로는 쭉 어떤 생각에 잠겨있었다.
황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우리가 머물고 있던 테라스는 조용했다.
똑똑.
그때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시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트레이에 올려진 커다란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그 주위로 접시와 포크를 세팅해두고서 고요히 사라졌다.
그러자 황제가 굳게 닫혀있던 입술을 열었다.
“지난번에 보니 이걸 가장 잘 먹더군. 그래서 크게 만들어오라고 지시했소.”
“앗. 감사합니다. 폐하.”
앗싸. 초콜릿 케이크…!
그는 제법 눈썰미가 있었다. 그때 내가 어떤 케이크를 가장 잘 먹었는지 기억해뒀던 모양이었다.
오. 혹시 이건 이별의 선물인가? 그렇다면 기쁘게 먹어주지.
내가 현란한 포크 질로 신이 나서 먹고 있으려니 황제는 그런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폐하도 드세요.”라고 권했지만 그는 “단 건 별로.”라며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고는 또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들려고 했다.
안 돼. 그러지 마.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해줘.
파혼선언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야 대공을 살릴 수 있으니까. 원하는 말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은 더욱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끝내 참다못한 내가 먼저 말문을 열기로 했다.
내쳐지기를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황제가 한시라도 빨리 파혼을 선언해주기를 바랐으니까.
나는 입안의 케이크를 처리하고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 그와 눈을 마주쳤다. 황제가 계속 내 쪽을 보고 있었으니 시선을 붙잡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폐하. 오늘 너무 조용하세요.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공녀.”
“예. 말씀하세요.”
황제는 나를 불러놓고서 또다시 말이 없었다.
눈으로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입은 도통 움직이질 않으니 급기야 답답함이 차올랐다.
제발 말씀하시라고요. 네? 각오 충분히 됐고, 기다리고 있다니까요.
나는 성질 급한 한국인의 성미를 속으로 유감없이 발휘했다. 멱살을 잡으며 빨리 말해라 응? 하고 싶었지만, 실상은 닦달을 절제하며 예를 차렸다.
그러자 황제가 나를 보며 붉은 입술을 서서히 떼었다.
“공녀.”
“예. 폐하.”
“짐은 그대가 마음에 드오.”
“네. 알고 있습니…, 네? 폐하? 지금 뭐라고….”
?
?
……예???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화들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