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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10화 (10/125)

10화

“안녕히 가세요.”

나는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두 남자를 배웅했다. 그리고 마차가 공작 저에서 빠져나가자마자 억지로 웃고 있던 가면을 냅다 벗어던져 버렸다.

“아오. 열 받아!!”

여태 얌전히 있던 내가 느닷없이 소리를 지르자, 주위에 서 있던 사용인들이 깜짝 놀랐다. 코웻 공녀의 성품에 반하는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을 만큼 화가 솟았다.

분통이 터진 나는 씩씩거리며 죄 없는 그들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저 사람은 대체 누구예요?”

그러자 하녀 중 하나가 대답했다.

“저분은 폐하의 시종장으로 계시는 리빙스턴 백작님….”

아. 황제의 시종장이었어?

나는 순간 성질이 누그러들었다가,

“…의 집사인 로저예요.”

대답을 듣자 도로 치솟았다.

“네? 백작님의 집사요?”

“네….”

나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대답한 하녀는 마치 자기가 잘못을 저지른 양 조심조심 대답하는 모양새였다.

뭐야. 시종장도 아니고 시종장의 하인 주제에 저렇게 뻣뻣하다고?

어이가 없어진 나는 체면이고 연기고 간에 눈에 뵈는 게 없어졌다. 열 받은 마음에 땅을 혼내기라도 하려는 듯 발을 번갈아 가며 쿵쾅 굴렀다.

그런데 웬일인지 내 발길질에 따라 땅이 푹푹 패고 있었다.

뭐야, 여기 지반이 왜 이렇게 약해?

움직이기 불편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이제부터 로저는 내가 이 소설에서 발견한 재수 없는 인간 2호다. 저 조사관은 3호고.

그리고 당연하게도 1호는 아직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황제 그 인간이었다.

내 앞에 영원히 나타나지 말아라!

***

그런 나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며칠 후 에일린 코웻 앞으로 황제의 서신이 도착했다.

며칠 후 황성으로 오라는 초대장이었다.

걱정된다면서 찾아와 들여다보지도 않는 약혼녀에게 대뜸 티타임 초대장이라니….

속이 빤히 보이는 황제의 행동에 한숨이 나왔지만, 저택의 사용인들은 황제의 초대장을 받았다며 그저 기뻐했다.

확실히 황제와의 약혼은 엄청난 일이고 가문의 영광이었다. 그러나 소설 원작을 본 나로서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에일린은 곧 약혼녀라는 자리에서 내쳐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약혼을 한 것도, 그녀를 내친 것도 순전히 황제의 변덕과 정치놀음이었다. 코웻 가는 그의 수많은 말들 중 하나에 불과했고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황제는 명실공히 제국의 일인자. 그의 초대를 거절할 명분 따윈 없었다.

초대 날이 되자 나는 아침부터 목욕물에 몸을 푹 담겼다.

네 명의 하녀들이 달려들더니 내 몸에 때를 빼고 광을 내었다. 그리고 물기를 닦은 후 동백꽃 향이 나는 오일을 온몸에 치덕치덕 발랐다. 머리카락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나자 얼굴에는 분을 바르고 머리에는 진주 같은 장식을 엮어 한쪽 어깨로 모아 내렸다. 머리칼과 색깔을 맞추기 위해 드레스는 피부색에 가까운 핑크빛을 골랐고, 액세서리는 투명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귀걸이, 목걸이, 팔지를 착용했다.

오호라…. 과연 옷이 날개라더니.

전신거울 앞에 선 나는 감탄을 터트렸다.

힘껏 꾸민 에일린은 이 세상 미모가 아니었다. 나조차도 눈이 부셔서 넋을 놓을 정도였으니까.

“공녀님. 정말 아름다우세요.”

“걸작이다, 걸작이야.”

하녀들은 자신들의 노고가 반짝반짝 빛을 발하자 뿌듯해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면면에 만족스러운 기색을 발했다.

나는 일전에 리빙스턴 백작의 집사가 찾아왔을 때보다 딱 열 배 더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마차에 실려 황성으로 향했다.

황성은 당연하게도 공작 저보다 몇 배는 더 크고 넓었다.

기본적으로 아이보리색 바탕에 창문마다 정교한 민트색 데코레이션이 달렸고, 꼭대기에는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아있었다. 건물의 디자인과 색상이 정말이지 화려했다.

게다가 건물은 티 하나 없이 깨끗했는데, 신하들을 얼마나 부려먹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내가 탄 마차는 길 위를 미끄러지듯이 굴러갔다. 길을 잘 닦아놓아 거칠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길이라면 오랫동안 달려도 영원히 멀미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윽고 마차가 건물 앞에 멈추어 섰다.

마차에서 내린 나는 시종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황제의 응접실로 이동했다.

앞서가던 시종이 굳게 닫힌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똑똑.

“폐하.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와라.”

백색으로 번쩍이는 문을 좌우로 열자, 한쪽 벽면이 커다란 창으로 이루어진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운데에는 통으로 짜인 탁자가 놓여있고 양옆에는 누울 수도 있을 만큼 넓은 소파가 있었다. 황제는 그곳에서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그는 앉은 자세 그대로 나를 향해 팔만 벌렸다. 그 모습이 퍽이나 건방지게 느껴졌다.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황제를 숭상해야 하니 저런 모습이 당연하게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엄연한 민주주의 사회 출신이니까.

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모르나? 내가 이래서 황제가 아닌 대공 파인가 보다.

민주주의가 당연한 사회에서 살아왔기에 저런 거만함은 차마 눈뜨고 봐주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더니, 대뜸 황제가 다가와서는 내 턱을 잡고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눈앞이 번쩍하며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내 앞의 남자는 엘도라도를 통째로 옮겨놓은 것 같이 금색으로 빛났다. 그의 구불구불한 황금빛 머리칼은 실크처럼 매끄럽고 탐스러웠다. 푸른 바다의 정기를 응축한 구슬이 있다면 그의 눈동자로 박아둔 것 같았다.

또, 코는 얼마나 높은지 옆으로 골짜기가 지나고 있었고 뚜렷한 이목구비는 조각상 그 자체였다.

와, 남자주인공이라더니 외모가 정말 대단하구나!

썩어빠진 성품에도 불구하고 결국 여주인공의 사랑을 받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내가 얼굴을 보며 넋이 빠져있으려니까, 조각상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입술 양 끝을 올렸다.

“공녀.”

“예……예. 폐하.”

황금색으로 빛나는 황제는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불렀다. 나는 넋을 놓고 있다가 뒤늦게 인지한 터라 대답을 더듬고 말았다.

그는 나를 에일린이 아닌 공녀라고 칭했다. 이것은 두 사람이 실제로는 친하지 않은 형식적인 사이라는 증거였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반갑군. 잘 지냈소?”

황제는 염려하는 척 가식적인 어조로 물어왔다.

“보살펴주신 덕분입니다.”

넌 대충 납치범을 찾는 척만 하고 끝이었지?

“아팠다고 하던데. 내 걱정을 많이 했다오. 몸은 이제 괜찮소?”

“염려해주신 덕분에 좋아졌답니다.”

그렇게 걱정이 됐으면 한 번 와보기나 하지 그랬어?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나는 속으로 욕을 씹었다.

“그것 참 다행이로군.”

황제는 어쩐지 의미심장한 말투로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입에서는 폭탄과도 같은 발언이 튀어나왔다.

“그렇다면 오늘은 온종일 나와 보낼 수 있겠군.”

“예? 폐하와 온종일요?”

뭐라고? 와나 미친!!

깜짝 놀란 나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채라도 붙잡고 싶었지만, 그런 진심을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겉으로는 아닌 척, 특히나 좋은 척 눈웃음을 지었다.

“어맛. 좋아라.”

“그렇게 좋소?”

두 손을 맞잡으며 가짜웃음을 쥐어 짜내자 황제가 고개를 시원하게 젖히며 껄껄 웃었다.

설마 진짜로 좋으려고?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웃었다.

황제는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다. 에일린과의 데이트 스케줄을 몽땅 짜둔 것이다. 일정은 먼저 점심 식사를 하고 극장에서 오페라를 본 후에 디저트를 먹고 헤어지는 순서였다.

티타임 초대라 해놓고 난데없이 데이트라니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나는 황제와 함께 시종의 안내를 받아 식당으로 들어갔다.

반짝거리는 샹들리에가 천장에 설치되어 있었고, 그 아래로 어마어마하게 넓은 식탁과 그 위로 먹음직한 음식들이 수십 가지가 차려져 있었다. 전생을 포함하여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화려한 요리들의 향연이었다.

우와. 이게 황제의 식탁이로구나!

나는 깜짝 놀라 입이 쩍 벌어졌다. 군침이 돌아 하마터면 침까지 흘러나올 뻔했다.

대공의 시골저택에서는 고기보다는 야채 위주로 기본적인 영양소가 꼭꼭 들어가 있는 균형 잡힌 식단이었다.

공작 저에서는 귀족의 식사인 만큼 다양한 고기들이 준비되어 나왔다.

그런데 황성의 음식은 그야말로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한 번 먹었다 하면 더위 먹고 쓰러졌던 티라노사우루스도 벌떡 일어설 것만 같은 영양이 가득함은 물론, 그 맛은 정말…!

“이 정도면 진짜 요리사한테 상 줘야 한다!”

포크를 꽉 움켜쥔 나는 식탁을 쾅 내리치며 말했다. 머리로만 생각한다는 게 그만 속마음이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공녀?”

옆을 돌아보자 당황한 황제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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