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자고 일어나 아침에 눈을 뜨자, 방안에는 눈부신 햇빛이 넓은 창 가득히 비추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그만 왈칵하고 눈물이 쏟아졌다. 이 넓은 저택 어느 곳에도 레이몬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린 것이다.
공허함은 곧 내 영혼을 덮쳤다.
영상이라도 아니 사진이라도 한 장 있었으면 그리움을 덜어내는 데 도움이 됐을 텐데.
아무것도 없는 이 세계에서는 대공을 떠올리려면 그저 눈을 감고 그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틈만 나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시름시름 앓았고 급기야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걱정이 된 부모님은 공작 저로 의사를 불러들였다.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으십니다.”
“아아. 이런 에일린.”
진찰을 마친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자 부모님의 표정이 근심 걱정으로 뒤덮였다.
진찰결과는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나라서 내 몸을 잘 알 수 있었으니까.
이것은 그 병이었다. 바로 상사병.
대공이 보고 싶다. 너무 보고 싶어.
머릿속에는 오로지 이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영향으로 눈물이 쉴 새 없이 줄줄 흘렀다. 실제로 한 번 만나고 나니까 애정이라는 병은 더 깊어져 버렸다.
아아. 원작의 에일린도 혹시 상사병으로 앓아 누었을까. 그래서 저택 안에만 콕 박혀있었던 걸까. 나도 모르게 그랬을 거라고 확신을 하면서, 열감 가득한 숨을 헐떡이다가 의식이 혼미해졌다. 그리고 어스름한 꿈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곳에서 나는 대공과 함께 햇살로 뒤덮인 화사한 꽃밭을 누비며 신나게 뛰어다녔다. 하하호호 웃으며 서로가 서로를 쫓았고, 그러다가 지치면 손을 잡은 채 걸었다. 내 소원을 담은 행복한 꿈이었다.
그러다가 번쩍 눈을 떴다.
꼬박 하루가 지났고, 내 몸은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
대공이 사무치게 그리워 죽을 것 같던 상태가 무색하게도 나는 아주 건강해졌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났더니 몸과 마음이 이토록 멀쩡해지다니. 추측건대 빙의로 인한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몰려온 탓이 아니었나 싶다.
그 덕에 부모님께는 여태 미뤄둔 업무가 잔뜩 쌓여 있었다.
딸의 납치다, 병이다, 하며 헛되이 흘려보낸 과거의 시간을 현재가 대신 갚아주러 가야만 했다. 당분간은 얼굴을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덕에 나는 요양을 핑계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건 정말이지 괜찮은 일이었다. 소설 [미친 황제를 길들였다]에서 본 단편적인 정보만으로는 대공을 살리기가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웠고, 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책벌레였다는 에일린의 방에는 책이 아주 많았다. 나는 책장으로 다가가 제목을 쭉 훑었다.
프라레스 제국의 역사, 제국의 역대 황제들, 제국 상단의 흥망성쇠 등등 보기만 해도 지루하고 잠 올 것 같은 책들만 즐비했다.
아, 나랑은 읽는 종류가 달라.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웹소만 즐겨 읽는 독자로서 이해하기 힘든 취향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화려한 표지의 책이 한 권 눈에 띄었다. 제목은 [수도 퍼먼트의 맛집]. 내 취향을 저격한 책이었다.
“어! 이거 재밌겠는데?”
나는 얼른 책을 뽑아서 의자에 걸터앉아 한 장씩 넘겨보았다.
이곳에는 사진이 없기 때문에 대신 엄청난 솜씨로 그려낸 음식 그림들이 있었다. 얼마나 잘 그렸는지 그걸 보고도 침이 흐를 정도였다.
츄릅. 밥 먹고 왔는데도 또 먹고 싶네.
밥 배 따로 간식 배 따로라는 공식은 빙의가 된 세계에서도 여전히 통용되었다.
나는 입맛을 다시면서 요리 하나하나를 내 눈 속에 담았다. 그 요리의 모습과 맛을 묘사한 글자를 한 자 한 자 정독하면서 말이다. 언젠가는 나가서 꼭 맛집 투어를 다녀보겠노라고 결심했다.
그렇게 병을 훌훌 털어버리고 독서 생활을 하던 나에게 어느 날 반갑지 않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공녀님.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폐하께서 사람을 보내셨다고요?”
방에 홀로 앉아있던 나는 집사가 전해준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그리고 그 소식이 내게로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녀들이 방안으로 우르르 들어오더니 나를 꾸미기 시작했다. 머리를 빗질하여 정돈하고 땋고 드레스와 구두도 고급스러운 것으로 싹 갈아입혔다.
나는 그 일사불란함에 한번 놀라고, 바뀐 내 모습에 두 번 놀랐다. 어느새 당장 파티장에 가도 될 만큼 어여쁜 레이디로 탈바꿈해 있었다.
와우. 황제라도 왔다가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나.
아예 얼굴을 갈아 엎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귀족 가의 여식이란 쉬운 자리가 아님을 소박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집사를 따라 응접실로 갔다.
그러자 거기에는 멋들어지게 기른 콧수염을 매만지고 있는 한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고급스러운 재질의 옷차림으로 보아 황제가 보낸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공녀님.”
“안녕하세요.”
나는 그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일단 황제가 보냈다기에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사람이라 이건가.
분명 공작보다 지휘가 낮을 것임에도 그는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있었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어감은 전혀 공손하지 않았다.
무늬만 황제의 약혼녀인 에일린의 위상을 드러내 주는 대목이었다.
“공녀께서 납치되었다는 소식에 폐하께서 얼마나 근심하셨는지 모릅니다. 일대에 군사를 풀어 샅샅이 뒤지도록 하셨습니다만 그럼에도 찾지를 못했는데. 이토록 무사하신 모습을 보니 소식을 전해드릴 제 마음이 한결 가볍군요. 허허허.”
과연 샅샅이 뒤졌을까.
잘 숨은 대공이 대단한 건지, 찾는 척만 하고 끝내버린 황제가 대단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속으로 비아냥거리고 있는데 그는 대뜸 박수를 두 번 탁탁 쳤다.
“폐하께서는 공녀의 무사 귀환을 무척이나 기뻐하고 계십니다. 공작 저로 와보고 싶으나 공사가 다망하신 관계로 대신 선물을 보내오셨습니다.”
그 말과 함께 응접실의 문이 열리더니 알록달록한 꽃들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황제의 일꾼들은 황제가 에일린을 위해 주문했다는 꽃을 부지런히 날랐다. 응접실은 곧 꽃으로 가득히 채워졌다.
아니. 걱정된다는 사람이 직접 와보지는 않고 꽃만 보내?
나는 속으로 표리부동한 황제를 마구 씹어댔다. 그러나 겉으로는 귀족 가의 레이디답게 상냥하게 웃으며 폐하를 칭송해야 했다.
“어머. 고마워라. 마음이 넓기도 하시지. 폐하께 꼭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물론입니다.”
원하는 반응이 나오자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더 박수를 쳤다. 이번엔 뭐가 들어오려나 궁금해하고 있는데, 안으로 들어온 것은 웬 사내였다.
“안녕하십니까, 공녀님.”
사내는 건성으로 고개를 꾸벅하더니 꽃들이 즐비한 화려한 응접실 내부를 빙 둘러보았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것 같았으나 이내 본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중년 남자는 그를 소개했다.
“이 자는 조사관입니다. 이번에 납치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폐하께서 파견한 자이니, 공녀께서는 그간 겪은 일들을 소상히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비켜주려는 듯 응접실에서 나갔다.
중년 남자가 가버리자, 조사관은 약간 차리던 예의마저 집어던져 버렸다. 그는 의자를 꺼내어 삐딱하게 앉더니 테이블에 팔을 턱 걸쳐 올리고서는 다짜고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사건의 경위를 알아야겠으니 아는 대로 다 말해보시죠.”
높임말이었지만 마치 욕처럼 들리도록 말을 구사하는 능력이 있는 자였다.
그 고압적인 태도에 나는 기가 막혔다.
부모님은 혹시나 내가 괴로울까 봐 이야기 끄트머리조차 꺼내지 않았는데, 그는 정확히 정반대의 짓을 하고 있었다. 증거를 모은다는 명목하에 꼬챙이로 들쑤시고 있는 것이다.
“무엇부터 얘기해야 할지….”
“아니, 처음에 어떻게 끌려갔는지부터 얘기해보세요.”
내가 진짜 피해자였다면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못해 공황장애가 열 번이라도 생길 것 같았다.
다행히 나는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온 터라 괜찮았지만, 이런 정상적인 상태에서도 견디기 힘들 만큼 조사관의 태도는 X 같았다.
‘미친 새끼.’
나는 속으로 욕을 뱉었다.
원작의 에일린, 그녀가 납치사건에 대해서 왜 함구했는지 이제야 조금 알 수 있었다.
또한, 오직 “사흘 내내 복면을 쓰고 있어서 모르겠다.”라고 대답한 그녀가 얼마나 지조 있고 대찬지도 깨달았다.
나는 원작의 에일린 만큼 대차지도 않고 저 조사관의 압박하는 심문을 견딜 자신도 없었다.
물론 지조는 누구보다도 높다고 자부할 수는 있다. 그 대상이 다름 아닌 최애 대공이니까.
고로 내가 선택한 것은 적당히 거짓으로 꾸미기였다.
그럴듯하고 적당한 말을 툭툭 던져주면, 더 이상 내게 궁금한 것도, 물어볼 것도 없을 테니까.
“저희 집 정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제게 복면을 씌웠어요. 저는 그대로 기절했고요. 눈을 떠보니 웬 허름한 집이었어요.”
“허름한 집이었다고요? 평민의 가정집이었나요?”
“네. 그런 듯했어요. 더럽고 지저분하고 냄새도 나고. 저야 그런 곳이 처음이니까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들었어요.”
나는 일부러 팔을 부들부들 떠는 시늉을 했다. 내 연기가 그에게 제법 통하는 것 같았다.
“흐음. 그렇겠네요. 납치범의 모습은 어땠죠?”
“납치범이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 생김새는 모르겠고요. 키나 덩치는 조사관님과 비슷했고요, 머리는 아주 짧았어요. 목소리는 낮고 굵었고요.”
조사관은 술술 나오는 진술을 수첩을 꺼내어 펜으로 마구 휘갈겨 썼다. 그 후로도 질문이 몇 가지가 더 이어졌고, 나는 성실하게 거짓으로 대답했다.
“흐음. 협조 감사합니다. 공녀가 알려주신 것들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조사를 하도록 하죠.”
그는 내 협조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인상이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그래 봤자 찌그러진 캔 같은 못난 얼굴이 펴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